[고구려][고구려시대][고구려문화][고구려의 문화][삼국시대]고구려의 성립, 고구려의 정복활동과 고구려의 정치, 고구려의 사회, 고구려의 음악, 고구려의 미술 및 고구려의 붕괴, 고구려의 부흥운동 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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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고구려][고구려시대][고구려문화][고구려의 문화][삼국시대]고구려의 성립, 고구려의 정복활동과 고구려의 정치, 고구려의 사회, 고구려의 음악, 고구려의 미술 및 고구려의 붕괴, 고구려의 부흥운동 분석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개요

Ⅱ. 고구려의 성립

Ⅲ. 고구려 초기의 정복활동

Ⅳ. 고구려의 정치와 사회

Ⅴ. 고구려의 음악과 무용

Ⅵ. 고구려의 신체활동

Ⅶ. 고구려의 미술

Ⅷ. 고구려의 유인

Ⅸ. 고구려의 사회생활 변천
1. 문화의 변천
2. 산수화의 발전 과정
3. 사회 형태와 경제
1) 사회 형태
2) 어로와 수렵
3) 농업
4) 수공업
5) 기타

Ⅹ. 고구려의 붕괴
1. 내부의 사회, 경제적 요인
2. 당과의 외교 교섭의 안일
3. 보장왕대 고구려 정권의 모순
4. 귀족층의 분열-남생, 남건 형제의 대립
5. 백제의 멸망과 신라의 공격

Ⅺ. 고구려의 부흥 운동

참고문헌

본문내용

만호를 이끌고 당에 투항했다. 뿐만 아니라 연개소문의 동생 연정토도 황해도지역의 12개 성을 이끌고 신라에 투항했다. 이러한 와중에 고구려 귀족인 고문(高文)을 비롯한 다수의 귀족세력 및 지방세력들이 고구려를 이탈하여 당에 투항했다. 이것이 고구려가 수, 당과의 전쟁에서 승리하다가 막판에 지게 된 원인이었다. 서로 간의 경쟁과 협조로 정국을 운영하던 고구려의 정치가 독재정치로 전환되었다는 내부의 문제 때문에 분열 후 망국한 것이다.
5. 백제의 멸망과 신라의 공격
백제는 고구려와 한동안 맞서 싸우기도 했지만, 고구려와 수나라의 전쟁에서는 중립을 지켰으며, 고구려와 당의 전쟁에서는 소극적이나마 고구려의 편에 있었다. 백제의 주된 역할은 신라의 견제였다. 그런데 660년, 백제는 신라와 당의 연합군에 의해 무너지고 말았다. 백제가 멸망한다는 것은 결국 고구려 남부 국경에서 신라의 침입을 받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고구려는 백제의 멸망을 지켜볼 뿐, 당나라의 공격을 막느라고 도와주지 못했다. 당나라는 백제 공격을 고구려를 정복하기 위한 원대한 계획의 일환으로 시도했는데, 고구려로서는 그 점을 너무나 쉽게 간과한 것이다. 고구려는 신라 김춘추의 백제공격 요청을 거절했다. 이 때부터 신라는 고구려에 원한을 갖게 되었고, 당나라에 붙어 고구려를 공격했다. 신라는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 전력을 다해 백제를 무너뜨렸다. 그런데 고구려는 신라를 과소평가 했다. 신라가 고구려의 등뒤에서 칼을 들이대는 데도 고구려는 남방경영에 대해서 무심했다. 이것도 고구려 멸망의 중요한 원인이다. 만약 고구려가 신라, 백제와 함께 연합했더라면, 설령 그렇지 않았더라도 백제가 멸망하지 않았더라면, 혹은 신라가 당과 연합하지만 않았더라면 고구려의 운명은 충분히 달라졌을 것이다. 고구려는 5~6세기에 동아시아의 외교관계에서 보여준 뛰어난 외교력을 상실하고 신라를 적으로 만듦으로써 멸망을 초래했던 것이다.
. 고구려의 부흥 운동
고구려 부흥운동의 시작은 당나라에 점령당하지 않은 11개성을 비롯하여 전국에서 일어났다. 이 중 기록으로 남아 알 수 있는 것은 검모잠의 부흥운동과 보장왕의 부흥운동이 있다. 검모잠은 고구려 왕족출신의 안승을 왕으로 삼고 고구려국을 세우기도 했지만 당군이 침공해오자 안승에 의해 죽임을 당하게 된다. 보장왕의 부흥운동은 그가 연개소문에 의해 왕이 된 단순한 허수아비 왕이 아니라, 백성들의 존경을 받고 고구려의 구심점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왕이었음을 시사한다. 당나라는 요동지방의 고구려 사람들이 당의 지배에 심하게 저항하자, 이들을 안정시킬 의향으로 당나라로 끌고 갔던 보장왕을 676년에 다시 요동으로 불러들여 안동도독선국왕에 임명하고서 자신들의 의향대로 고구려 유민들을 다스려 줄 것을 원했다. 그러나 보장왕은 요동성에 오자, 고구려 백성들을 규합하고 당나라에 반대하는 투쟁을 벌였다. 이렇게 되자 당나라는 681년에 다시 보장왕을 끌고 가서 귀향을 보냈다. 요동지방의 고구려 사람들은 보장왕이 부흥운동에 실패한 이후에도 당나라 지배에 저항하여 8세기에는 반독립국가를 이루기도 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앞서 보았던 보장왕의 아들 덕무가 있었다. 고구려 부흥운동의 결실은 영주지역에 끌려가 있던 고구려 유민인 대조영과 그 집단에 의해 발해가 건국됨으로 그 결실을 맺는다. 고구려가 망한 지 31년 후의 일이다. 한반도 내의 부흥운동을 먼저 보면 당의 지배정책에 반발한 670년 태대형 고연무가 정병 1만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당으로 진격하자 당시 신라는 사찬 설오유를 보내어 부흥군을 지원했다. 670년 4월에 검모잠은 궁모성에서 군사를 일으켜 부흥군을 이끌고 한성(재령)으로 가 근거지로 삼고 앞서 신라에 귀부한 안승을 맞이하여 고구려 사직을 잇는 국왕으로 추대, 신라에 구원을 청했다. 이에 당황한 당은 672년 7월 고간,이근행이 이끈 4만 병력으로 평양에 와서 주둔, 부흥군 토벌에 나섰다. 부흥군은 672년 8월에 한시성, 마읍성에서 크게 패하고, 673년 호로하에서 크게 패하자 남은 군사들은 신라로 달아나고 안승 역시 재차 부흥군을 이끌고 신라로 돌아갔다. 이로써 대동강 이남에서의 부흥운동은 실패로 끝나고 그 유민은 신라에 통합되고 말았다. 요동에서의 부흥운동을 보면 이 지역 역시 고구려 멸망후 안동도호부 관할에 속했었는데, 당시 압록강 이북 지방의 32성 가운데 당에 항복한 성은 11개 성에 불과했다. 이때 당 고종은 반당나라적인 고구려 유민을 선무하기 위해 보장왕을 요동도독 조선왕으로 봉하고(677), 안동(신성)에 살게 하면서 그 지역 고구려 유민을 진무하도록 회유책을 쓰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항복하지 않은 11개 성 등지의 고구려 유민을 거느리고 말갈인과 함께 항전을 꾀하다가 앙주(사천성)로 유배되었다. 그리고 그 잔민들은 하남 등 여러 주로 분산, 이주당하였다. 이후 당은 보장왕의 손자인 보원을 686년 조선왕으로 봉하였다가 다시 충성국왕으로 봉하여 안동의 고구려 유민을 통솔하도록 하였으나 그 역시 부흥운동을 전개하려고 하자 그 대신에 보장왕의 아들 덕무를 안동 도독으로 삼아 고구려 유민을 통할하게 하였다. 이와 같이 안동도독의 직책이 고려왕에게 맡겨졌다는 사실에 주목하여 고구려인의 정치적 역할이 강화되었다고 간주, \"소고구려국\"이 요동지방에 건국되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어쨌든 요동지방의 고구려 유민은 대조영이 고구려 유민을 이끌고 천문령 전투에서 당군을 몰아내고 발해를 건국(698)하자 고구려 유민은 대조영을 중심으로 집결하게 되었다.
참고문헌
- 국사편찬위원회(1996), 한국사5:삼국의 정치와 사회Ⅰ-고구려, 국사편찬위원회
- 김선민 역(1999), 아시아의 역사와 문화2, 신서원
- 김용만(1998), 고구려의 발견, 바다
- 노태돈(1999), 고구려사 연구, 사계절
- 노태돈, 5세기 금석문에 보이는 고구려인의 천하관, 한국사론 19, 서울대 국사학
- 박영규, 고구려 본기, 웅진출판
- 이종욱(2005), 고구려의 역사, 김영사
- 이지린, 강인숙(1988), 고구려 연구, 사회과학 출판사
- 한영우(2001), 다시 찾는 우리역사1, 경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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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8.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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