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문화]도요토미히데요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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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만 인간으로서 모든 부와 권력을 거머쥔 히데요시였지만 그에게는 가문을 이을 자식이 없었다.
당시 히데요시는 기타노만도코로(네네)라는 정실 외에도 15명이나 되는 측실을 거느릴 정도로 호색가였지만 친자식은 단 한명도 없었다. 자식이 없었던 히데요시는 예전에 주군인 오다 노부나가에게 청하여 그의 4남 오츠기마루를 양자로 들였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가 후에 첩실로 맞이한 요도 기미(오다 노부나가의 조카, 아사이 나가마사의 딸)가 그토록 원하던 아들(츠루마쓰)을 출산하니 히데요시의 기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을 것이다.
히데요시는 당연히 츠루마쓰를 후계자로 삼으려 했지만 이전에 친척인 히데쓰구를 후계자로 정했기 때문에 히데요시는 히데쓰구를 밀어내고 그 자리를 자신의 아들 츠루마쓰에게 넘겨주려 했다. 하지만 츠루마쓰는 갑자기 급사하고 말았고 히데요시는 이후 실의에 빠져 간바쿠의 자리를 친척인 히데쓰구에게 양도, 자신은 타이코에 올랐다.
실의에 빠졌던 히데요시에게 요도 기미는 다시 아들을 안겨주었는데 그가 바로 히로이(후의 히데요리)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있는데 히데요시가 15명의 측실에서도 얻지 못한 자식을 어떻게 요도 기미는 그렇게 쉽게 생산해 내었는지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15명이나 되는 측실을 두고도 자식을 보지 못했다는 것은 히데요시가 성적으로 문제가 있었다는 것을 대변 하는데 요도 기미가 신이 아닌 이상 무슨수로 성불구자의 아들을 낳았겠는가? 이에 학자들은 요도 기미가 히데요시의 신임을 얻기 위해 다른 남자와 간통하여 낳은 자식이 히데요리라는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히데요시는 히데요리가 자신의 아들이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고, 히데요리를 후계자로 세우기 위해 간바쿠 히데쓰구를 고야산으로 추방시켰다가 할복시켜 버렸다. 거기다 1596년, 겨우 4살에 불과했던 히로이의 성인식을 올리고 종4위의 벼슬을 주어 자신의 후계자로 삼았다. 히데요리에 대한 그의 사랑은 지나칠 정도였으며 일설에는 히데요시가 임진왜란을 일으킨 이유가 자신의 귀여운 아들 히데요리를 위해서였다는 학설도 있다(우습게도 가토 기요마사는 호랑이 고환이 불임에 좋다는 소문을 듣고 백두산 호랑이의 고환을 약으로 만들어 히데요시와 요도 기미에게 진상했는데 이후 히데요리가 태어났다고 한다).
4. 사망
권세는 10년을 못간다는 말이 있으니... 히데요시는 일본을 통일한지 8년째 되는 1598년, 파란만장했던 인생을 뒤로 하고 숨을 거두었다. 히데요시, 그는 일본을 통일하고 농민 출신에서 일본을 다스리는 천하인에 즉위한 성공한 인생을 살았으나 그가 이룩한 정권은 그다지 오래갈 것이 못되었다(히데요시는 자신의 죽음이 알려지는 것조차 두려워 해 자신의 시신을 몰래 암매장하도록 지시했으며 가신들은 그의 시신을 교토의 아미다 가미네에 묻었다고 한다). 위에서 수차례 언급했듯이 일단 히데요시에게는 무사들을 지배할만한 카리스마와 힘이 부족했고 특히 도쿠가와 이에야스 같은 유력 다이묘는 히데요시 생전에 임진왜란에 군사를 파견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제제를 받지 않았으니 그의 다이묘들에 대한 통치력은 그다지 강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여실히 드러나는 것이다.
다이묘들의 배신으로 자신의 정권이 무너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히데요시는 마에다 토시이에, 우키다 히데이에, 도쿠가와 이에야스, 모리 데루모토, 우에스기 카게카쓰를 5대로에 봉하여 도요토미 가문을 이끌어가도록 했으며 그 아래 행정관인 5봉행을 두어 히데요리를 보좌하도록 했다. 5대로에 이에야스가 포함된 것을 이상하게 여길 사람들이 있으나 당시 히데요시로서는 어쩔수 없는 선택이었다. 임진왜란 이후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하고 회군하여 불만이 높아진 무공파들을 포섭해 온 이에야스는 이미 많은 이들의 지지를 받는 상황이었고 만약 그가 5대로에서 제외된다면 도리어 그것은 위기의식을 느낀 이에야스의 궐기를 부채질 할 위험이 있었기 때문에 히데요시는 이에야스를 히데요리의 후견인인 5대로에 봉하여 이에야스에게 무거운 짐을 지운 것이다(이에야스가 히데요리의 후견인이면서 정당한 이유 없이 모반을 일으킨다면 그것은 그의 명성에 흠을 내는 것이었다). 히데요시의 의도대로 이에야스는 5대로에 임명된 뒤 함부로 행동하지 않았고 기회만 엿보고 있다가 의도적으로 아무 죄가 없는 우에스기 카게카쓰의 모반을 토벌한다는 구실 아래 미쓰나리의 거병을 자극, 미쓰나리가 거병하여 오사카 성을 접수하고 다이묘들의 처를 감금하자 미쓰나리의 거병을 도요토미 정권에 대한 반역으로 몰아 무공파 다이묘들의 지지를 얻어 세키가하라 전투를 일으킨 것이다(마에다 토시이에를 비롯한 나머지 대로들은 서로 힘을 합쳐 이에야스를 견제하기 위해 임명된 것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히데요시가 가장 신뢰했던 마에다 토시이에는 히데요시를 뒤따르듯 병으로 숨을 거두었고 실질적으로 도요토미 가문의 1인자에 오른 이에야스는 히데요시가 사망한 이후, 다이묘들간의 통혼을 금하라는 히데요스의 유언마저 무시한 채 다테 마사무네와 같은 유력 무장들과 통혼을 하여 자신의 세력을 넓혀 나갔다.
5. 도요토미 가문 몰락
1598년, 히데요시 사망 1599년, 마에다 토시이에 사망
1600년, 5봉행 중 일인인 이시다 미쓰나리가 각지의 다이묘들을 포섭하여 세키가하라 대전을 일으켰으나 유력 무장들이 대거 전선에서 이탈하거나 배반하는 바람에 패배하였고 도요토미 가문의 영지는 65만석으로 대폭 감소
1603년, 도쿠가와 이에야스 세이다이쇼군 취임, 유력 다이묘들이 대거 이에야스에 가담했고 이후 세키가하라 대전에서 이에야스를 도운 친 히데요시 파들은 몰락하기 시작
1614년, 친 도요토미 파들이 많이 제거되자 이에야스는 호코지 종명 사건을 트집잡아 20만의 대군을 동원하여 오사카 성을 공략, 하지만 사나다 유키무라의 활약으로 패배한 이에야스는 오사카 성의 바깥 해자(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파놓은 물길)를 메우는 조건으로 화의를 요청했으나 안쪽 해자마저 강제로 메워버렸다(사나다 마루까지 무너뜨림).
1615년, 이에야스 군을 향해 돌격을 감행한 사나다 유키무라 군은 전멸하고 불타는 혼마루에서 도요토미 히데요리와 그의 어머니 요도 기미는 자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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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8.11.21
  • 저작시기200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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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494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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