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일 3국 도자기의 역사 및 종류와 각 특성에 따른 발달과정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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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 중국의 도자기
1. 서론
2. 시대별 도자기의 발달과정
3. 중국 도자기 원료와 명칭

◈ 일본의 도자기
1. 서론
2. 일본 도자기의 역사
3. 일본 도자기의 종류
4. 일본인의 신앙생활과 도자기
5. 일본 도자기의 특성

◈ 한국의 도자기
1. 서론
2. 시대별 도자기의 발달

◈ 3국의 도자기의 비교와 역사적 고찰
1. 청자
2. 분청사기
3. 백자
4. 도자기와 관련된 역사적 사건 고찰

본문내용

속속 건설되고, 국내 수요는 물론 수출산업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현재에는 현대화된 공장이 날로 증가하고 있으며, 국책산업으로 지정 육성되고 있다.
네 번째. 삼국 도자기의 비교와 역사적 고찰
1. 청자
중국에서 옥(玉)은 군자(君子)를 상징하며, 부귀(富貴)와 사후내세를 보장해 주는 신앙적인 의미를 지녀 영생을 의미하며 악귀를 쫓는다고 믿어 부장품으로 많이 사용하였다.
당시 지배계급의 옥에 대한 소유 욕구와 부모의 묘에 옥을 부장하려는 사람은 많았으나, 옥은 생산이 적어 매우 비싸 귀한 옥을 흙으로 만들어 보려는 노력중 전국시대를 걸쳐 삼국시대에 청자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4C에서 6C경의 고분에서 중국의 청자가 발견되었으며 이는 당시 중국의 청자를 왕실의 옥기(玉器)로써 수입하여 사용한 것으로 알 수 있다. 차를 마시는 습관이 확산되면서, 청자를 찻잔으로 사용하며 실용화되기 시작하였다.
고려 초 청자를 국산화하려는 노력 중 10C 후반 청자를 생산하기 시작하였다.
그 후 질이 좋은 흙을 찾아 전라도 강진, 고창에서 우수한 고려청자가 생산되기 시작한다.
초기의 청자는 대체로 갈색을 띄며 무늬가 없는 깔끔하고 지적이며 단정한 순청자로 만들어 지다가 12C들어 문양이 새겨진 청자가 등장한다.
당시에는 고려인들의 세계가 불교적인 세계이었으므로 그들은 그들의 마음을 고려청자에 담아 영원한 세계에 대한 동경으로 구름과 학, 불교적 선의 세계인 연못, 버드나무, 물살을 따라 노니는 오리, 고요함과 적막함을 나타낸 들국화. 그와 같은 문화로 수백년을 이어온 삶의 염원을 담아낸 청자가 은은하면서 맑은 그 신비한 비색과 어울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자기가 탄생되었던 것이다.
2. 분청사기
한국 도자기의 독특한 분야인 분청사기는 14C 고려후기 고려시대를 이끌어오던 불교사회의 내세를 추구하는 관념이 유학의 가르침에 따라 현실에 치중하는 사회로 변화하게 된다.
그 전의 청자는 귀족적이며 종교적인 영향으로 실생활에서 사용하기에는 한계를 갖고 있었다. 사회의 변화에 따라 청자 또한 실생활에 필요한 검소한 것으로 변화하며 문양이 대범하여지고 표현기법도 간략해지기 시작하고 대량 생산화 되기 시작한다.
그때부터 상감청자의 모습은 대중화 되며 분청자의 모습으로 바뀌게 되었다.
15C에서 16C를 거치며 현대적이면서도 가장 한국적인 미(美)의 원형을 간직한 문화유산으로 자리를 잡았다. 옛날 우리의 사기장들은 대를 이어가며 평생 도자기를 만들었으나 그 생활은 무척 가난하였고 무명(無名)으로 평생 무념(無念)속에서 자연과 같이 자연의 일부가 되어 욕심이 없는 마음으로 도자기를 만들며 그 특질은 도자기에 배어 꾸밈없는 아름다움으로 드러났다.
이러한 모습은 당시 일본의 불완전함에서 완전함을 추구하는 미감(美感)을 갖는 지배계급들의 문화와 맞아 조선 도자기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된다. 이러한 문화 속에서 일본인들은 조선의 좋은 찻잔을 갖는 것은 부와 명예의 상징으로써 하나의 성(城)과도 바꿀 수 있는 가치를 지니게 되며 마침내 신기(神器)로까지 부르게 된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조선도공이 만드는 막사발은 보물(이도다완井戶茶碗)이 되어 일본인들이 도자기 전쟁이라 부르는 한일전쟁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으며 조선 도자기에 대한 경모감을 갖고 그들이 데려간 도공들은 일본도자기 산업의 중심이 되었다.
그 후 조선의 분청사기는 한일전쟁으로 인한 도공과 가마의 상실, 사회적 변화를 거치며 점차 백자화 되어가며 사라지게 되었다.
3. 백자
14C 도자기는 중국으로부터 청자에서 백자 중심으로 변화한다.
당시 중국과 더불어 백자를 만들 수 있는 유일한 우리나라는 왕실을 중심으로 사용되어지기 시작하며 은기(銀器)를 대신하여 백자를 사용하게 되었다. 당시 유학을 중심으로 사대부들이 이룬 사회는 우리 내부의 진리발견, 우리의 재발견을 통해 가장 한국적인 모습을 찾고자 노력하였다.
그러한 사상은 화려한 중국의 자기를 배척하고 간결하면서 기품이 있는 순백자를 만들어 내었다. 조선백자의 미학을 이야기 할 때 흔히 중국과 일본의 도자기와 비교하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중국의 도자기는 형태의 완벽성과 위엄을 보여주고, 일본의 도자기는 색채의 화려함과 장식성을 보여준다고 한다면, 조선백자는 유교적인 원숙미와 소박함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4. 도자기와 관련된 역사적 사건 고찰
당시 중국의 자기는 유럽인에게는 중국을 CHINA(자기)라 할 만큼 선망의 대상이었으나 우리는 중국의 화려한 자기를 받아들이지 않고 우리만의 것을 찾아 독자적인 백자문화를 이루었다.
당시(17C)일본은 중국의 그것을 배워 아리타(유전) 도자기문화를 발전시켰다. 이 과정에서 유럽인은 일본의 자기기술을 배워 18C초 유럽 자기를 만드는데 성공하며 거기에 소뼈를 태운 재를 첨가한 본차이나(Bone China)를 생산하게 된다.
16세기에 이르러 바스코 다가마가 인도 항로를 열자 많은 사람이 아시아로 뱃머리를 돌렸다. 이로 인해 중국, 일본과의 교류가 빈번해진다. 따라서 상호 필요에 의한 상품 교역이 나타날 수밖에 없게 된다. 당시 열등한 유럽은 아편을 중국에 팔기 시작했고 우리는 이를 아편전쟁이라고 한다. 아편전쟁의 내면에는 문화적인 열등감이 도사리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국제 시장을 헤집고 다녔던 장사꾼의 나라 네덜란드와 교류하면서 국제 정보를 훤히 알고 있었던 일본은 원천 기술을 빼앗기로 결정하고 조선반도를 침략한다. 급기야 세계 최고의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던 조선의 도공들을 납치하는 데 성공한다. 이로써 일본도 17세기 후반에 들어서면서 도자기 국제 경쟁의 대열에 뛰어든다. 네덜란드와 손을 잡고 유럽에 자기를 수출하여 엄청난 이익을 챙길 수 있었다.
일본의 규슈 지역은 유럽과 도자기 교역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사쓰마, 죠오슈, 사가 등 규슈 지방이 강력한 에도의 도쿠가와 막부체제에 도전해 이를 무너뜨릴 수 있었던 것은 결국 도자기 교역을 통해 얻은 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조선 도공들의 손길에서 시작된 일본 백자가 일본의 역사를 바꾸는 명치유신의 원동력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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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9.02.04
  • 저작시기200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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