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대통령 통치(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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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이승만 대통령 통치(정치)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이승만

<목 차>

Ⅰ. 서론

Ⅱ. 본론
1. 이승만의 생애
2. 미국 망명시절의 이승만
3. 미군정의 정치적 입장
4. 귀국 후의 이승만의 태도
5. 이승만의 통일노선
6. 이승만의 통치와 과오

Ⅲ. 결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기가 순간적으로 이성을 잃었다는 것을 한 회고록에서 고백했다.
6. 이승만의 통치와 과오
유엔에서 실시하는 총선거는 그것이 남북총선거가 아니라 처음부터 남한 단선이 된다는 것은 이미 예상한 바였다. 그리고 남한 단선에 있어 치안을 담당한 경찰은 한민당의 영향 아래 있는 인사들이 장악하고 있었고 한민당은 선거를 앞두고 인권유린을 막기 위해 유엔 위원단의 요청으로 성안된 개정 형사 소송법의 실시를 연기해줄 것을 요청했다. 경찰을 보조하기 위한 '향보단'이 전국 촌락에 조직되어 단선의 반대는 물론 선거 보이코트도 할 수 없게 엄중 감시했으며 이승만은 자기 선거구인 동대문 갑구에서 출마한 최능진을 방해해서 출마를 못하게 하고 후일 최를 학살하였다.
선거는 96%의 투표일을 보였다고 발표되었고 이승만은 "모든 동포가 건국정신으로 이와 같이 애정을 나타낸 것은 깊이 감사하며 마지 않을 일이다"고 만족해하면서 마침내 미군정 3년간의 통치로부터 정권을 이양받았으나 정치경제 사회문화는 극도로 혼란되고 부패는 만연되고 있었다. 미군정 3년간, 1945년 8월 15일을 100으로 칠 때 1948년 9월 군정이 끝날 무렵 통화발행고 지수는 506%로 팽창했고 물가지수는 같은 기간에 1,060%로 10배 이상 폭등했으며 정부는 262억 2천 4만 원의 부채를 지고 있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정권을 이양받은 이승만은 성안중인 농지개혁법이 한민당에 의해 지연되어 명무실하게 된 것을 방치했고 농민에게 불리한 '양곡도입법'이 제정 공포되는가 하면 '반민처벌법'이 온갖 방해 속에 겨우 제정 공포되었으나 특위의 행동이 개시되자 특위 습격을 지시하여 '특경대'를 해산시키고 결국 유명무실한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김약수 부의장 이하 13명의 국회내의 반대파인 '소장파 의원들'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투옥했고 (국회 푸락치사건), 단정을 반대한 김구를 암살하고 김구와 동조한 각 정당, 한국독립당민족자주연맹사회당 등은 정부 압력으로 사실상 활동이 끊어지고 말았다. 언론에 대해서는 공보처를 통해 7개항의 언론 단속지침을 발표하여 '국시위반' '정부모략' '허위사실 날조' '국위손상' '자극적 기사로 민심에 악영향을 끼치는 기사' '국가기밀 누설' 등을 금지해 언론의 기능을 위축시켰다. 반대파에 대해 이같은 온갖 탄압을 가하면서도 1950년 5월 30일의 선거에서 이승만계는 여당인 대한국민당이 겨우 24석, 독립국민회 12석, 대한청년당 11석 등 모두 합쳐야 57석밖에 당선되지 않았고 반이승만계는 조소앙, 안재홍, 원세훈 등 거물이 다수 당선되었다.
625후 피난지에서 이승만 정권은 갖가지 추태를 연출했다. '국민방위군사건' '거창사건' '중석불사건' 등, 연이은 의혹사건 속에서 이승만은 국회에서의 간접선거로는 대통령에 당선될 가망이 없다고 보자 야당의원 다수를 공산당과 내통했다는 혐의로 구속하고 대통령 국민 직선제를 골자로 한 개헌안을 국회에서 강제 통과시켰다.
그리고 이승만은 삼선금지 조항으로 계속 집권의 길이 막히자 1954년 10월 경쟁자인 신익희를 '뉴델리 회담설' 조작으로 실각시키려 한 한편 같은 해 12월에는 삼선의 실을 열어주는 개헌안이 부결되었는데도 사사오입으로 통과된 것으로 번복하는 전무후무한 횡포를 자행했다.
그 이후에도 김성주 살해, 장면 부통령 저격사건, 양당 시국 강연장 테러습격, 진보당수 조봉암의 사형집행(간첩혐의), 보안법파동, 『경향신문』폐간, 315 부정선거 강행 등 12년간 집권기간 중 온갖 횡포를 부리다 마침내 국민의 궐기로 추방되어 하와이에서 쓸쓸히 여생을 보내다 1965년 7월 19일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승만은 여러 일을 했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그가 범한 많은 과오 중에서도 민족으로부터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은 외세의 국가이익 추구에 편승하여 이 나라를 분단하는 데 앞장섰다는 것이다. 그리고 일제시대 때 민족을 배반한 친일 역적들을 싸고돌아 민족정기를 흐려놓은 점 과 12년의 통치기간에 이 나라를 자주 아닌 열강 예속으로 전락시켰다는 사실도 들어야 할 것이다. 이승만의 집권기간 동안 그로부터 직접 간접으로 혜택 받아 영화를 누린 층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나 오늘 한반도가 겪고 있는 민족의 수난은 다름 아닌 이승만의 지도노선에 일단의 책임이 있다는 것은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
Ⅲ. 결론
앞에서 우리는 이승만의 독립운동부터 제1공화국 대통령으로서의 그를 살펴보았다. 이승만 그는 과연 어떤 인물인가?
그의 독립운동의 과정과 결실이 어찌하였든 그는 대한민국의 자유와 독립을 위하여 일생을 바친 애국자이며 또한 6.25 동란의 와중에서 대한민국의 독립과 자유를 지켜낸 공로자라고 할 수 있으며 멸공 북진통일론, 휴전협정체결반대, 반공포로 석방 등 반공주의자이자 자유민주체제의 수호자였다. 그리고 외교적인 측면에서 주체적인 외교론자라는 평가가 있었다.
반면 그는 외세의 국가이익 추구에 편승하여 이 나라를 분단하는 데 앞장섰고 국민앞에 전제적인 군주로 군림하기를 원했으며 일제시대 때 민족을 배반한 친일 역적들을 싸고돌아 민족정기를 흐려놓은 점과 12년의 통치기간에 이 나라를 자주가 아닌 열강 예속으로 전락시켰다는 의견이 있었다.
이승만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우남 이승만은 아직도 우리와는 매우 가까운 시대의 사람이며 그에 대한 평가는 곧 개인적인 이해와 관련이 되는 경우가 적지 않은 현실이므로, 이승만에 대해서는 아직도 모든 견해가 주관적이며 감정적이라는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우남을 탁월한 초인적인 인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가장 독선적이고 이기적인 사람이라 혹평하는 사람도 많다.
그러나 우리는 우남을 객관적으로 이해하려고 노력함으로써 그가 한 일에 대한 공정한 재평가를 내려야 할 시기에 이르지 않았나 생각 한다.
<참고문헌>
송남헌, 해방 3년사,까치, 2005
브루스 커밍스 지음, 김자동 엮음, 한국전쟁의 기원, 일월서각, 2002
유영익 지음, 이승만의 삶과 꿈, 중앙일보사, 2006
유영익 편, 이승만 연구, 연세대학교 출판부, 2000
우남실록 : 편찬회 편, 열화당, 1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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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9.02.22
  • 저작시기200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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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5198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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