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목차
Ⅰ.서론
1)성곽의 정의
2)성곽의 발생
Ⅱ.본론
1.경남지방의 주요성곽
-마산시
-창원시
-김해시
-진해시
-사천시
Ⅲ.결론
<참고문헌>
-http://www.cha.go.kr/
-http://www.naver.com/
Ⅰ.서론
1)성곽의 정의
2)성곽의 발생
Ⅱ.본론
1.경남지방의 주요성곽
-마산시
-창원시
-김해시
-진해시
-사천시
Ⅲ.결론
<참고문헌>
-http://www.cha.go.kr/
-http://www.naver.com/
본문내용
성 둘레 3,105척, 성벽의 높이 10.5∼11.5척, 성문과 옹성 이 각 3곳이라 되어있고, 그 후의 기록에는 성둘레 5,015척, 성벽의 높이 15척, 성문과 옹성이 각 3곳이라 되어있어 후에 증축하였음을 알 수 있다. 본래 백성을 보호하고 왜구를 방어하기 위하여 쌓았다고 전해지는데,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많은 수모가 있었다. 특히 선조 32년(1598) 정기룡 장군이 이끄는 조선군과 명나라 원군이 연합하여 이 성을 탈환하기 위해 혈전을 벌여 왜적을 몰아냈다 한다. 현재 성 안에는 충혼탑, 수양루, 활을 쏘는 관덕정이 있는 산성공원이 조성되어 있어 시민들의 좋은 휴식처가 되고 있다.
②사천금성리토성지
종목 : 시도기념물 177호
수량 : 2,000㎡(2필)
소재지 : 경남 사천시 곤명면 금성리 산40, 486-1
경상남도 사천시 곤명면 금성리 뒷산에 있으며, 산 정상 아래쪽 테를 맨 모양으로 둘러쌓은 성곽 으로 대부분 흙으로 쌓은 산성이다. 산성의 둘레는 약 2㎞이고 넓이는 약 8000평인데, 지금은 둘레 100m, 너비 1.5m 가량의 흔적만 남아 있을 뿐 성지는 대부분 과수원으로 개간되어 있다. 이곳에서 금동제마상 1개, 철제장검 1개, 민무늬 토기 조각, 기와조각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특히 기와조각에는 ‘삼정(三井)’이라고 새긴 글자를 통해 신라 때 기와로 보고 있다. 성을 쌓은 시기는 확실치 않으나 경남지방의 축성활동과 출토된 유물 등으로 미루어 삼국시대 때 쌓은 산성으로 추정하고 있다.
③각산산성
종목 : 문화재자료 95호
수량 : 일원
소재지 : 경남 사천시 대방동 산40
경상남도 사천시 대방동 각산의 정상에는 횃불과 연기를 이용해 소식을 전하는 옛 통신수단인 봉화대가 옛 모습대로 남아있고, 서쪽 등성이에 각산산성이 남아있다. 고려 원종(재위1259∼1274) 때에 성과 봉화대를 만들고, 줄항터에는 구라량영의 본거지를 두어 이곳을 지켰다. 고려 말에 사량도로 영을 옮기고 난 후, 이곳이 무방비상태로 되자 왜구가 침입하여 성에 불을 질르기도 했다. 그후 각산은 봉화대가 자리하는 곳이 되었으며, 봉수는 남쪽으로 대방산, 서쪽으로 곤양의 우산봉수, 북쪽으로 사천 안점봉수와 연결되었다.
④사천조명군총
종목 : 시도기념물 80호
수량 : 1,322㎡
소재지 : 경남 사천시 용현면 선진리 402
조명군총은 선조 30년(1597) 정유재란 때 선진리성에 주둔하고 있던 왜적을 몰아내기 위해 결전을 벌이다 희생된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의 무덤이다. 정유재란을 일으켜 북진하려던 왜군은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의 저항을 받자 경상도 남해안지방으로 퇴각하여 남해안 곳곳에 성을 쌓고 머물고 있었다. 사천지방에는 왜장 시마즈의 군사가 주둔하고 있었는데, 명나라 장군 동일원과 경상도 우병마사 정기룡이 진주를 거쳐 이곳의 적을 몰아내고자 하였다. 그러나 동정군(명나라군)진영에서 발생한 불의의 화재로 인해 적의 역습을 받게되어 수천 명의 희생자를 내었다. 왜군은 그들의 승리를 본국에 알리기 위해 죽은 군사들의 귀와 코를 베어 본국으로 보내고, 목을 베어 묻어 큰 무덤을 만들었다고 한다. 무덤의 형태는 사방 36㎡의 사각형으로 흔히 ‘당병무덤’, ‘댕강무데기’라고 부르며 매년 음력 10월 1일에 위령제를 지내고 있다.
⑤사천선진리왜성
종목 : 문화재자료 274호
수량 : 일원
소재지 : 경남 사천시 용현면 선진리 402외
경상남도 사천시 사천읍 선진항의 북방에 있는 이 성은 삼면이 바다에 접하고 동쪽만 육지에 닿아 있는 반도 지형에 세워졌다. 조선시대에는 항구로 유명했으며 선진이 설치되기도 하였는데, 선진은 싸움터에서 앞장서는 군대를 뜻한다. 『읍지』와 『대동지지』의 기록을 보면 이 선진에는 전함이 1척, 병선이 1척, 하후선이 2척 있었다고 하여, 삼천진이라 불렸다. 선조 30년(1597)에 왜의 석만자가 이곳에서 지내면서 울산의 도산, 순천의 왜교와 더불어 3굴이라 불렀다고 한다. 임진왜란 당시 왜군이 지은 성으로, 규모나 구조면에서 볼 때 활동의 주요 근거지로 만들어진 것이며, 이순신 장군에 의해 격파 당하기도 하였다. 현재 흙으로 쌓은 성벽이 1㎞ 가량 남아 있으며, 돌로 만든 누(樓)는 무너졌으나 대체로 성의 규모대로 터가 남아 있다.
⑥사천성황당산성
종목 : 시도기념물 132호
수량 : 64,827㎡(7필)
소재지 : 경남 사천시 정동면 예수리 45-1외
경상남도 사천시 정동면에 있는 이 산성은 일명 ‘고읍성’이라고도 한다. 옛 사천고을의 중심이 되는 읍의 소재지가 산성과 가까운 정동면 고읍리에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성은 정상의 산봉우리를 둘러싼 테뫼식 산성으로, 현재는 둘레 약 1109m, 높이 3.5m의 흙으로 쌓은 성벽이 남아 있다. 그러나 남쪽 가파른 언덕에 길이 4m, 높이 3m 가량의 돌로 쌓은 벽이 남아 있어, 원래는 흙과 돌을 혼합하여 쌓은 산성으로 보인다. 기록에 의하면 돌로 쌓은 벽의 둘레는 1,941척이라 하였으며, 성 안에는 샘, 무기고, 서낭신을 모시는 성황단, 통신수단인 봉수대가 있었다고 한다. 이 산성의 축성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부근에서 출토되는 기와와 토기 조각으로 보아 삼국시대에 쌓은 것으로 추정된다
3. 결론
→성곽은 국가가 군사적인 목적을 갖고 국방이나 교통의 요지에 설치했던 군사 시설물이다. 따라서 해당지역의 역사나 지리적인 특성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으며 축성 당시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우리의 역사 전반을 이해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번 과제를 통해서 성곽에 대한 중요성과 성곽의 현황, 특히 경남지방의 성곽에 대해서 알 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다.
특히 다른 지역보다 성곽이 많이 분포 되어 있었다. 이것은 지리적인 요건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다른 지역보다 성곽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지역에 비해서 부진한 상태이며, 관심 또한 부족한 실정이다. 또한 관리조차 허술하게 되고 있어 무참하게 방치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각 시도에서 관리만 잘해준다면 이러한 성곽도 관광지로써 이용될 수 있을 것이다. 문화재인 만큼 그 가치를 소중하게 생각해야 할 것이다.
②사천금성리토성지
종목 : 시도기념물 177호
수량 : 2,000㎡(2필)
소재지 : 경남 사천시 곤명면 금성리 산40, 486-1
경상남도 사천시 곤명면 금성리 뒷산에 있으며, 산 정상 아래쪽 테를 맨 모양으로 둘러쌓은 성곽 으로 대부분 흙으로 쌓은 산성이다. 산성의 둘레는 약 2㎞이고 넓이는 약 8000평인데, 지금은 둘레 100m, 너비 1.5m 가량의 흔적만 남아 있을 뿐 성지는 대부분 과수원으로 개간되어 있다. 이곳에서 금동제마상 1개, 철제장검 1개, 민무늬 토기 조각, 기와조각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특히 기와조각에는 ‘삼정(三井)’이라고 새긴 글자를 통해 신라 때 기와로 보고 있다. 성을 쌓은 시기는 확실치 않으나 경남지방의 축성활동과 출토된 유물 등으로 미루어 삼국시대 때 쌓은 산성으로 추정하고 있다.
③각산산성
종목 : 문화재자료 95호
수량 : 일원
소재지 : 경남 사천시 대방동 산40
경상남도 사천시 대방동 각산의 정상에는 횃불과 연기를 이용해 소식을 전하는 옛 통신수단인 봉화대가 옛 모습대로 남아있고, 서쪽 등성이에 각산산성이 남아있다. 고려 원종(재위1259∼1274) 때에 성과 봉화대를 만들고, 줄항터에는 구라량영의 본거지를 두어 이곳을 지켰다. 고려 말에 사량도로 영을 옮기고 난 후, 이곳이 무방비상태로 되자 왜구가 침입하여 성에 불을 질르기도 했다. 그후 각산은 봉화대가 자리하는 곳이 되었으며, 봉수는 남쪽으로 대방산, 서쪽으로 곤양의 우산봉수, 북쪽으로 사천 안점봉수와 연결되었다.
④사천조명군총
종목 : 시도기념물 80호
수량 : 1,322㎡
소재지 : 경남 사천시 용현면 선진리 402
조명군총은 선조 30년(1597) 정유재란 때 선진리성에 주둔하고 있던 왜적을 몰아내기 위해 결전을 벌이다 희생된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의 무덤이다. 정유재란을 일으켜 북진하려던 왜군은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의 저항을 받자 경상도 남해안지방으로 퇴각하여 남해안 곳곳에 성을 쌓고 머물고 있었다. 사천지방에는 왜장 시마즈의 군사가 주둔하고 있었는데, 명나라 장군 동일원과 경상도 우병마사 정기룡이 진주를 거쳐 이곳의 적을 몰아내고자 하였다. 그러나 동정군(명나라군)진영에서 발생한 불의의 화재로 인해 적의 역습을 받게되어 수천 명의 희생자를 내었다. 왜군은 그들의 승리를 본국에 알리기 위해 죽은 군사들의 귀와 코를 베어 본국으로 보내고, 목을 베어 묻어 큰 무덤을 만들었다고 한다. 무덤의 형태는 사방 36㎡의 사각형으로 흔히 ‘당병무덤’, ‘댕강무데기’라고 부르며 매년 음력 10월 1일에 위령제를 지내고 있다.
⑤사천선진리왜성
종목 : 문화재자료 274호
수량 : 일원
소재지 : 경남 사천시 용현면 선진리 402외
경상남도 사천시 사천읍 선진항의 북방에 있는 이 성은 삼면이 바다에 접하고 동쪽만 육지에 닿아 있는 반도 지형에 세워졌다. 조선시대에는 항구로 유명했으며 선진이 설치되기도 하였는데, 선진은 싸움터에서 앞장서는 군대를 뜻한다. 『읍지』와 『대동지지』의 기록을 보면 이 선진에는 전함이 1척, 병선이 1척, 하후선이 2척 있었다고 하여, 삼천진이라 불렸다. 선조 30년(1597)에 왜의 석만자가 이곳에서 지내면서 울산의 도산, 순천의 왜교와 더불어 3굴이라 불렀다고 한다. 임진왜란 당시 왜군이 지은 성으로, 규모나 구조면에서 볼 때 활동의 주요 근거지로 만들어진 것이며, 이순신 장군에 의해 격파 당하기도 하였다. 현재 흙으로 쌓은 성벽이 1㎞ 가량 남아 있으며, 돌로 만든 누(樓)는 무너졌으나 대체로 성의 규모대로 터가 남아 있다.
⑥사천성황당산성
종목 : 시도기념물 132호
수량 : 64,827㎡(7필)
소재지 : 경남 사천시 정동면 예수리 45-1외
경상남도 사천시 정동면에 있는 이 산성은 일명 ‘고읍성’이라고도 한다. 옛 사천고을의 중심이 되는 읍의 소재지가 산성과 가까운 정동면 고읍리에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성은 정상의 산봉우리를 둘러싼 테뫼식 산성으로, 현재는 둘레 약 1109m, 높이 3.5m의 흙으로 쌓은 성벽이 남아 있다. 그러나 남쪽 가파른 언덕에 길이 4m, 높이 3m 가량의 돌로 쌓은 벽이 남아 있어, 원래는 흙과 돌을 혼합하여 쌓은 산성으로 보인다. 기록에 의하면 돌로 쌓은 벽의 둘레는 1,941척이라 하였으며, 성 안에는 샘, 무기고, 서낭신을 모시는 성황단, 통신수단인 봉수대가 있었다고 한다. 이 산성의 축성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부근에서 출토되는 기와와 토기 조각으로 보아 삼국시대에 쌓은 것으로 추정된다
3. 결론
→성곽은 국가가 군사적인 목적을 갖고 국방이나 교통의 요지에 설치했던 군사 시설물이다. 따라서 해당지역의 역사나 지리적인 특성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으며 축성 당시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우리의 역사 전반을 이해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번 과제를 통해서 성곽에 대한 중요성과 성곽의 현황, 특히 경남지방의 성곽에 대해서 알 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다.
특히 다른 지역보다 성곽이 많이 분포 되어 있었다. 이것은 지리적인 요건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다른 지역보다 성곽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지역에 비해서 부진한 상태이며, 관심 또한 부족한 실정이다. 또한 관리조차 허술하게 되고 있어 무참하게 방치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각 시도에서 관리만 잘해준다면 이러한 성곽도 관광지로써 이용될 수 있을 것이다. 문화재인 만큼 그 가치를 소중하게 생각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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