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옹의 군사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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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나폴레옹은 기동전을 구사함에 있어 집중의 개념을 중요시 하였다. 18세기 이전의 집중의 개념은 단순히 수적으로 우세한 병력을 유지하는 것이었으나, 그는 비록 전체병력이 열세할지라도 결정적 지점과 결정적 시간에서 적보다 상대적으로 우세한 병력을 투입한다는 개념으로 발전시켰다. 그리고 내선(內線)의 위치에서 중앙돌파로써 적을 분리시키고, 적이 합류 하 기전에 신속한 기동으로 병력을 집결하여, 분리된 적을 각개격파 하였으며, 이를 위한 결정적 지점으로 적의 전선 상 가장 취약한 지점이나, 병참선 후방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롬바르디(Lombardy)전역에서의 기만과아우스테리츠(Austerlitz)전역에서의 유인작전에서 보듯이 적에게 정확한 상황판단을 할 수 없도록 기만(欺瞞)과 기습(奇襲), 양동(陽動) 및 유인작전(誘引作戰)을 실시함으로써 기동전의 효과를 극대화하였다.
나폴레옹은 전략적 전투를 즐겨 사용하였다. 그는 정면공격으로 적을 일단 봉쇄한 다음 측면을 돌아 적의 배후로 부대를 보내고 동시에 측면에 기동 대응하여 노출된 전선의 한 지점을 돌파 전투에서 적의 전열을 완전히 궤멸하는 방법을 주로 사용했다. 이 같은 방법은 한니발, 스키피오, 그리고 몽골의 징기즈칸이 주로 쓰던 전술이기도 했다.
나폴레옹의 또한 내선작전을 사용하였다. 내선의 위치란 상대적인 기하학적 중앙위치로 수개의 적으로부터 전략적으로 포위된 상태로서 장기지구전에 취약한 대신 짧은 기동거리로 부대기동에 용이하며 전투력 집중과 절약, 병참지원 그리고 상호지원 등이 용이한 점이 있다. 이러한 내선작전의 기본개념은 내선의 잇점을 최대로 활용하여 병력배비를 통해 적을 각개격파 하는 것으로서 적의 위협 및 능력평가를 통해 비결정적 정면에는 경미한 부대를 배치하고 결정적 정면에는 주 병력을 집중시켜 적의 접합부를 공격하여 적을 분리시킨 뒤 적을 각개격파 하는 것 이였다. 나폴레옹은 포위 및 우회기동이 불가능시 또는 강력한 전투력을 갖지 않았거나 필요한 전력을 증강할 수 없을 때 항시 고정배치에 의한 순수한 방어전투로 물러서지 않고 내선작전에 의한 공세적 방어의 길을 택하였음을 볼 수 있다.
그 외 나폴레옹은 대몰트케 전의 외선작전을 구사했다. 나폴레옹은 전투개시 훨씬 전에 부대를 전장으로 이동했으나 몰트케(Moltke)는 부대를 미리 집결시켜 다시 종대로 편성하여 이동시키는 데는 많은 시간이 소요되어 적으로부터 위협을 받으므로 전장 내에서 부대를 신속히 집중시켜서 하나의 구심점으로 기동시키는 전법을 발전시켰다. 이러한 외선작전이란 내부에서 외부를 향해 작전하는 적에 대하여 후방병참선을 외부에 유지하면서 분리된 전투력을 구심점으로 집중시키는 작전으로 수개의 부대를 집결시킨 뒤 전장내로 신속히 집중하여 적의 퇴로를 차단시키면서 격멸하는 작전이다. 다시 말해서 상호 분리된 전투력을 적시에 전장으로 집중시켜 전투력의 효과를 한 지점에 집중시키는 구심의 원리를 최대로 이용한 전법이다.
나폴레옹은 정보수집 을 위하여 군단(軍團)의 정찰(偵察)을 담당할 기병대(騎兵隊)를 군단 내에 별도로 편성하였으며, 더욱이 기병대 단독의 군단을 편성하여 효과적인 기동전술을 구사하였다.
지휘통제면(指揮統制面)에서의 나폴레옹은 작전지휘(作戰指揮)를 강조하였다. 1796년 롬바르디를 정복한 후 「나폴레옹」군의 이탈리아 진격이 순조롭게 진행되자 프랑스 정부는 그의 세력이 비대해질 것을 두려워하여 지휘권을 「켈러만(Kellermann)」 장군과 이원화시키려 하였다. 이러한 정보를 입수한 「나폴레옹」은 1인의 우장(愚將)이 2인의 양장(讓將)보다 낫다고 하면서 지휘권 통일에 대한 강한 의견을 제시하였다.
통신면(通信面)에서 이 같은 대규모 군대를 보다 용이하게 지휘통제하기 위하여 항상 부령(傅令)과 우수한 말을 대비하였으며, 필요시 각 부대로 보내어 명령을 하달하였다. 그리고 명령과 지휘계통을 확립하기 위해 문서(文書)에 의한 명령하달(命令下達)을 함으로써 지휘 및 명령 수발 체계에 관한 새로운 장을 열게 되었다.
프랑스의 군대는 질량에 있어 많은 변화를 하고 있었다. 혁명의 결과 국민개병제가 채택되고, 용병제로부터 징병제로 바뀌고 지금까지의 귀족의 용병과는 달리 혁명방위의 의기에 불타는 국민의 군대는 사명감이 넘쳐 있었다. 그들의 대부분은 혁명의 와중에서 오랜 전란 속에 익숙해졌고 피를 흘리는 것에 적응되어 있었다. 단시간에 만들어진 병졸들이었으나 전투기량 면에서는 충분하지 않아도, 실전경험에 익숙해 있었고, 하사관출신의 장교들이 많아서 실 병 지휘가 탁월하였다.
나폴레옹은 이들 병졸과 병제 변화의 특색을 잘 살려 적정이나 지형에 적응하게 하고 집중과 분산, 중앙집권과 예하 분권 정(靜)과 동(動), 정공법과 기습, 기동과 하력, 전진과 후퇴, 공격과 방어등을 적절하게 조화시켜 군인과 무기를 결합 일체화해서 실전 전력화하고, 그들을 효율적이면서 안전하게 운용해서 작전목적을 달성했었다. 이것이 그의 전략전술의 가장 큰 특색이었으며 현대전에서도 통할 수 있는 보편성을 다분히 갖추고 있었다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전투는 최후의 수단이고 포위가 주된 공략 방법이었던 19세기의 관행을 버렸다. 그는 적과 신속하게 직접 부딪쳤다. 그리고 전술은 상황에 따라 변동이 있었지만 자신이 1797년에 규정한 법칙 - 군대의 질이 낮을 때는 공격을 하거나 공격을 당하는 시점에서 항상 적보다 더 많은 병력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에서 별로 벗어나지 않았다. 나머지는 지형, 대치병력, 원정의 최종 목표에 따라 좌우된다. 황제는 종종 긴 명상 끝에 순식간에 그날의 전술을 결정했다.
결론적으로 나폴레옹 시대의 전략과 전술, 군사 제도는 새로운 시대적 환경에 적합한 것이었다. 나폴레옹의 전쟁은 기동에 의한 결전을 추구하나 섬멸기동전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그리고 당시 보편적인 군사술의 운용개념인 전략과 전술의 이분법적 상황 속에서 이러한 나폴레옹의 전쟁수행 개념은 작전 적 수준의 전쟁을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18세기 산업혁명을 계기로 발전한 각종 화기의 발달은 비록 작전술 차원의 군사사상으로 발전되지는 못하였지만 전쟁의 새로운 양상을 제시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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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9.02.26
  • 저작시기2008.4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5204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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