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들어가며
Ⅱ. 베르사유조약의 배경
(1) 종전상황
(2) 미국의 개입과 윌슨의 등장
(3) 전쟁의 결과
Ⅲ. 베르사유조약의 내용과 의미
(1) 파리강화회의
(2) 베르사유조약의 내용
Ⅳ. 베르사유 체제의 성립
(1) 국제연맹의 성립
(2) 그밖의 조약과 제국의 붕괴
Ⅴ. 맺음말
Ⅱ. 베르사유조약의 배경
(1) 종전상황
(2) 미국의 개입과 윌슨의 등장
(3) 전쟁의 결과
Ⅲ. 베르사유조약의 내용과 의미
(1) 파리강화회의
(2) 베르사유조약의 내용
Ⅳ. 베르사유 체제의 성립
(1) 국제연맹의 성립
(2) 그밖의 조약과 제국의 붕괴
Ⅴ. 맺음말
본문내용
제연맹은 식민지도 비록 독립국가는 아닐지라도 하나의 독립된 구성원으로서 참여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미국은 어떠한 사정으로 국제연맹에 참여하지 못하였을까? 전술한 바와 같이 국제연맹이 윌슨 대통령의 업적인 것 만큼은 분명하다. 하지만 확고한 신념을 갖고 있던 윌슨 대통령과는 달리 베르사유조약과 국제연맹을 바라보는 미국 상원의 입장은 부정적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윌슨 대통령이 파리강화회의에 참석 할 당시 자신의 측근만을 동행하고 공화당 의원들은 대부분 동행할 수 없도록 했을 당시부터 어느 정도 예견되어 있었다. 미국의 헌법상 조약의 비준은 상원에서 2/3 이상의 지지를 얻어야 했는데, 당시 미국 상원은 민주당 47명, 공화당 49명으로 야당인 공화당 의원들의 지지가 절실했던 상황이었다. 이기택, 앞의 책, P.280~281
결국 국내의 인준을 얻지 못한 윌슨 대통령은 병세까지 악화되면서 차기 선거에서 패배하였고, 미국은 다시 고립주의로 회귀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와 같이 현실적인 문제를 무시한 윌슨의 이상주의는 결과적으로 빛을 보지는 못하였지만 현대 미국 외교에 있어서 온건파의 사상적 기반을 제공해 주고 있다는 점에서 그 가치를 평가할 수 있다.
(2) 그 밖의 조약과 제국의 붕괴
독일과의 강화를 목적으로 한 베르사유조약이 1919년 6월 28일 조인된 이후 오스트리아, 헝가리, 불가리아, 그리고 오토만 터키 제국과의 강화협상이 연이어 진행되었는데 우선 소국가로 전락한 오스트리아는 생-제르망-앙-레이 조약을 통해 연합국과 강화를 맺게 되었다. 독일에 대한 조치가 워낙 가혹했던 탓에 오스트리아 문제는 이슈화되지 못하였지만, 그 내용을 살펴보면 오스트리아에 대한 전후조치도 독일 못지않게 가혹하였다. 영토가 축소되었을 뿐만 아니라 인구 또한 줄어들었으며 그나마 대부분이 비엔나에 집중되어 있어 존립 자체가 위협받을 지경에 이르렀다. 오스트리아는 1930년 독일과의 관세동맹 체결을 계기로 하여 결국 독일에 병합되고 말았다. 헝가리는 볼셰비즘의 영향을 받은 혁명 세력이 쿠데타를 통해 일시적으로 집권하여 연합국에 대항하였지만 왕당파에 의해 진압되고 1920년 6월 4일 트리아농 조약을 통해 연합국과 강화를 체결하였다. 오스트리아와 더불어 중부유럽을 호령하였던 헝가리도 마찬가지로 많은 것을 잃게 되었다.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등은 유고슬라비아에, 슬로바키아는 체코에 양여하는 등 결국 초기 헝가리 왕국 규모로 축소되었다.
마케도니아의 탈환을 위해 독일의 편에 서서 전쟁에 참여한 불가리아도 1919년 11월 27일 느이조약을 통해 남부 도브루자 지역을 루마니아에 할양하고 독일, 오스트리아와 마찬가지로 배상금을 지불하게 되었다. 전쟁 초반 중립을 지키다가 전세가 독일오스트리아 측에 유리한 것으로 판단하고 독일의 편에 서서 참전한 터키도 몰락한 제국 중 하나가 될 수밖에 없었다. 케말 파샤가 이끄는 터키의 민족주의 세력은 1923년 7월 24일 연합국과 강화조약을 맺었는데 이것이 바로 로잔조약이다. 이는 기존의 술탄 통치의 종말을 선언하는 것으로써 수세기 동안 유럽 역사의 한 획을 그었던 오토만 터키 제국도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지게 된 것이다. 이상의 조약들은 모두 1차 세계대전의 전후처리라는 목적으로 이루어졌으나 외형적으로만 보아도 유럽 지도의 재편이라는 결과를 낳았고, 이로써 2차 세계대전까지 유럽을 지배한 베르사유체제가 성립되게 되었다. 더불어 제국들의 붕괴는 영원한 강대국은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단순히 영토가 분할되고 신생국가들이 생겨난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ⅴ. 맺음말
베르사유조약은 윌슨의 이상주의를 등에 업고 평화적인 전후처리를 목적으로 하였지만, 협상에 임하는 모든 열강들의 이해관계를 충족시키기에는 구조적인 한계점을 지니고 있었다. 여기서 그 한계점을 정리해보자면 첫째, 지나치게 전승국 위주의 결과를 보여줬다는 점이다. 협상이나 강화의 기초는 상호간의 동등한 위치가 보장되어야 한다는 원칙이다. 비록 패전국일지라도 이 원칙이 무시될 수는 없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독일에 대한 가혹한 제재는 상상을 초월한 수준의 인플레이션과 중산층의 몰락을 낳았으며, 히틀러의 나치 독재정권이 민중에 의해 탄생하는 역설적인 상황을 야기시켰다. 둘째, 완벽한 협력체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윌슨 대통령을 비롯한 유럽의 열강들은 국제연맹을 통해 집단안전보장체제를 구축하려 했지만 정작 미국이 참여할 수 없었으며, 이탈리아와 같이 협상의 결과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으로 다가오는 경우도 있었다. 산둥반도와 남만주라는 전리품을 손에 넣은 일본도 결국 군국주의에 의해 연합국과 등을 돌리게 되었다. 셋째, 현실과 이상과의 부조화를 여지없이 드러냈다는 점이다. 현실과 이상이 부딪힌 사례는 본문에서 몇 가지 살펴본 바 있는데, 이는 윌슨의 이상주의 자체에 문제가 있었다기 보다는 이미 전쟁 중에 행해진 비밀조약에 문제가 있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물론 베르사유조약이 거둔 성과나 당시 상황의 어려움은 절대로 무시할 수 없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일어나고 있는 광우병 파문만 보더라도 ‘쇠고기 협상’이라는 표면적으로 단순해 보이는 문제만으로도 얼마든지 국제적인 마찰이 발생할 수 있다는 점을 볼 수 있는데, 하물며 100여 년 전 사상 초유의 피해를 남긴 전쟁의 전후처리를 위한 국제협상의 경우 그 어려움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더불어 국제연맹과 베르사유 체제는 훗날 2차 세계대전의 전후처리에 있어서 본보기가 될 수 있었다. 미국은 윌슨 대통령 시절의 미숙함을 거울로 삼아 루스벨트 대통령의 강력한 리더십을 무기로 2차 세계대전 이후 지구상의 유일한 패권국가가 될 수 있었다.
- 참고문헌 -
권용립, 「미국 대외정책사」, 민음사, 1997.
김용구, 「세계외교사」, 서울대학교출판부, 2006.
김학준, 「러시아혁명사」, 문학과 지성사, 1980.
오기평, 「세계외교사」, 박영사, 1985.
오기평, 「현대국제기구정치론」, 법문사, 1997.
이기택, 「국제정치사」개정판, 일신사, 2000.
두산동아대백과사전(인터넷판). http://www.encyber.com
결국 국내의 인준을 얻지 못한 윌슨 대통령은 병세까지 악화되면서 차기 선거에서 패배하였고, 미국은 다시 고립주의로 회귀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와 같이 현실적인 문제를 무시한 윌슨의 이상주의는 결과적으로 빛을 보지는 못하였지만 현대 미국 외교에 있어서 온건파의 사상적 기반을 제공해 주고 있다는 점에서 그 가치를 평가할 수 있다.
(2) 그 밖의 조약과 제국의 붕괴
독일과의 강화를 목적으로 한 베르사유조약이 1919년 6월 28일 조인된 이후 오스트리아, 헝가리, 불가리아, 그리고 오토만 터키 제국과의 강화협상이 연이어 진행되었는데 우선 소국가로 전락한 오스트리아는 생-제르망-앙-레이 조약을 통해 연합국과 강화를 맺게 되었다. 독일에 대한 조치가 워낙 가혹했던 탓에 오스트리아 문제는 이슈화되지 못하였지만, 그 내용을 살펴보면 오스트리아에 대한 전후조치도 독일 못지않게 가혹하였다. 영토가 축소되었을 뿐만 아니라 인구 또한 줄어들었으며 그나마 대부분이 비엔나에 집중되어 있어 존립 자체가 위협받을 지경에 이르렀다. 오스트리아는 1930년 독일과의 관세동맹 체결을 계기로 하여 결국 독일에 병합되고 말았다. 헝가리는 볼셰비즘의 영향을 받은 혁명 세력이 쿠데타를 통해 일시적으로 집권하여 연합국에 대항하였지만 왕당파에 의해 진압되고 1920년 6월 4일 트리아농 조약을 통해 연합국과 강화를 체결하였다. 오스트리아와 더불어 중부유럽을 호령하였던 헝가리도 마찬가지로 많은 것을 잃게 되었다.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등은 유고슬라비아에, 슬로바키아는 체코에 양여하는 등 결국 초기 헝가리 왕국 규모로 축소되었다.
마케도니아의 탈환을 위해 독일의 편에 서서 전쟁에 참여한 불가리아도 1919년 11월 27일 느이조약을 통해 남부 도브루자 지역을 루마니아에 할양하고 독일, 오스트리아와 마찬가지로 배상금을 지불하게 되었다. 전쟁 초반 중립을 지키다가 전세가 독일오스트리아 측에 유리한 것으로 판단하고 독일의 편에 서서 참전한 터키도 몰락한 제국 중 하나가 될 수밖에 없었다. 케말 파샤가 이끄는 터키의 민족주의 세력은 1923년 7월 24일 연합국과 강화조약을 맺었는데 이것이 바로 로잔조약이다. 이는 기존의 술탄 통치의 종말을 선언하는 것으로써 수세기 동안 유럽 역사의 한 획을 그었던 오토만 터키 제국도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지게 된 것이다. 이상의 조약들은 모두 1차 세계대전의 전후처리라는 목적으로 이루어졌으나 외형적으로만 보아도 유럽 지도의 재편이라는 결과를 낳았고, 이로써 2차 세계대전까지 유럽을 지배한 베르사유체제가 성립되게 되었다. 더불어 제국들의 붕괴는 영원한 강대국은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단순히 영토가 분할되고 신생국가들이 생겨난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ⅴ. 맺음말
베르사유조약은 윌슨의 이상주의를 등에 업고 평화적인 전후처리를 목적으로 하였지만, 협상에 임하는 모든 열강들의 이해관계를 충족시키기에는 구조적인 한계점을 지니고 있었다. 여기서 그 한계점을 정리해보자면 첫째, 지나치게 전승국 위주의 결과를 보여줬다는 점이다. 협상이나 강화의 기초는 상호간의 동등한 위치가 보장되어야 한다는 원칙이다. 비록 패전국일지라도 이 원칙이 무시될 수는 없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독일에 대한 가혹한 제재는 상상을 초월한 수준의 인플레이션과 중산층의 몰락을 낳았으며, 히틀러의 나치 독재정권이 민중에 의해 탄생하는 역설적인 상황을 야기시켰다. 둘째, 완벽한 협력체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윌슨 대통령을 비롯한 유럽의 열강들은 국제연맹을 통해 집단안전보장체제를 구축하려 했지만 정작 미국이 참여할 수 없었으며, 이탈리아와 같이 협상의 결과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으로 다가오는 경우도 있었다. 산둥반도와 남만주라는 전리품을 손에 넣은 일본도 결국 군국주의에 의해 연합국과 등을 돌리게 되었다. 셋째, 현실과 이상과의 부조화를 여지없이 드러냈다는 점이다. 현실과 이상이 부딪힌 사례는 본문에서 몇 가지 살펴본 바 있는데, 이는 윌슨의 이상주의 자체에 문제가 있었다기 보다는 이미 전쟁 중에 행해진 비밀조약에 문제가 있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물론 베르사유조약이 거둔 성과나 당시 상황의 어려움은 절대로 무시할 수 없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일어나고 있는 광우병 파문만 보더라도 ‘쇠고기 협상’이라는 표면적으로 단순해 보이는 문제만으로도 얼마든지 국제적인 마찰이 발생할 수 있다는 점을 볼 수 있는데, 하물며 100여 년 전 사상 초유의 피해를 남긴 전쟁의 전후처리를 위한 국제협상의 경우 그 어려움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더불어 국제연맹과 베르사유 체제는 훗날 2차 세계대전의 전후처리에 있어서 본보기가 될 수 있었다. 미국은 윌슨 대통령 시절의 미숙함을 거울로 삼아 루스벨트 대통령의 강력한 리더십을 무기로 2차 세계대전 이후 지구상의 유일한 패권국가가 될 수 있었다.
- 참고문헌 -
권용립, 「미국 대외정책사」, 민음사, 1997.
김용구, 「세계외교사」, 서울대학교출판부, 2006.
김학준, 「러시아혁명사」, 문학과 지성사, 1980.
오기평, 「세계외교사」, 박영사, 1985.
오기평, 「현대국제기구정치론」, 법문사, 1997.
이기택, 「국제정치사」개정판, 일신사, 2000.
두산동아대백과사전(인터넷판). http://www.encyb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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