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서론
Ⅱ. 바이마르 공화국의 탄생 배경 및 성립
1. 독일 혁명과 공화국의 성립
Ⅲ. 바이마르 공화국의 정치적 전개
1. 제 1기 : 1919 ~ 1923 - 성립기
2. 제 2 기 : 1924 ~ 1929 - 상대적 안정기
3. 제 3 기 : 1930 ~ 1933 - 몰락기
Ⅳ.바이마르 공화국 붕괴 요소
1.국제적인 요인(대외적인 요인)
1)베르사유조약 중하
2)세계공황과 독일경제의 파국
2. 바이마르 공화국의 주체적 규제 요인(대내적 요인)
1) 바이마르 헌법의 결함과 정치적인 요인
Ⅴ. 결론
Ⅱ. 바이마르 공화국의 탄생 배경 및 성립
1. 독일 혁명과 공화국의 성립
Ⅲ. 바이마르 공화국의 정치적 전개
1. 제 1기 : 1919 ~ 1923 - 성립기
2. 제 2 기 : 1924 ~ 1929 - 상대적 안정기
3. 제 3 기 : 1930 ~ 1933 - 몰락기
Ⅳ.바이마르 공화국 붕괴 요소
1.국제적인 요인(대외적인 요인)
1)베르사유조약 중하
2)세계공황과 독일경제의 파국
2. 바이마르 공화국의 주체적 규제 요인(대내적 요인)
1) 바이마르 헌법의 결함과 정치적인 요인
Ⅴ. 결론
본문내용
는 현실에서 오는 불안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하여 정치적 급진화를 추구하는 과격한 대중 운동을 지향함으로써 나치의 잠재적 지지자가 되었다. 경제 공황은 바이마르 공화국의 지주의 하나인 노동 조합의 약체화 결과를 가져왔다. 증가하는 실업률은 노동조합의 영향력과 통제력을 상실하게 했으며 노동조합으로부터 이탈한 실업자는 공산주의 운동이나 나치의 운동에 뛰어들었다. 이로 인해 노동 조합과 제휴한 바이마르 공화국 최대의 정당인 사회 민주당의 영향력도 약화되었다. 나치는 이 위기의 책임을 바이마르 공화국의 체제 정당, 마르크스주의자, 경제적 폭리의 취득자와 유태인에 돌렸다.
전후체제의 베르사유 조약 문제는 결과적으로 독일의 경제를 파탄시켰다. 이로 인해 독일의 중산계층이 몰락하고 실업자가 증가하였다. 잠시 동안의 경제적인 성장의 기회마저 세계 대공황으로 인해 독일은 경제적으로 결정적인 타격을 입게 되며, 이러한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인한 불안은 노동자와 중산계층으로 하여금 각각 나치와 급진적인 극우 정당으로 발을 돌리게 하였다. 그리고 독일 국민들의 반바이마르, 반민주주의 성향을 강하게 하였다.
2. 바이마르 공화국의 주체적 규제 요인(대내적 요인)
1) 바이마르 헌법의 결함과 정치적인 요인
바이마르 헌법의 기본 특징은 국민 주권의 선언에 따라 인간의 권리에 관한 정치적, 사회적 보장과 구체적인 정치 제도로서 의회 정치와 정당 정치를 전면적으로 도입한 데 있다. 그러나 바이마르 헌법 아래 철저한 비례 대표 선거 제도는 소당 분립(小黨分立)의 경향을 촉진하여 정부의 기반이 되는 의회 다수파 형성을 저해하였고 자연히 정부의 힘은 약화 될 수밖에 없었다. 또한 바이마르 헌법은 바이마르 국가가 정당 정치를 그 원리로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정당에 대한 어떠한 조항도 규정하지 않는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다음에는 대통령에 관한 규정인데, 국민의 직접 선거에 의하여 선출되는 대통령은 공화국 수상과 각료를 임명하고 또 헌법 제48조 규정으로 국가에 공공의 안전과 질서가 저해되는 위험이 있을 때 공공의 안전과 질서 회복을 위하여 필요한 조치를 취할 수 있으며 필요한 경우 국민의 기본권도 정지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의회의 이익이 국민 전체의 이익과 대립될 경우 대통령이 이를 견제하기 위한 데 본래의 의도가 있었으나 정치 통합 과정의 이원화를 초래하여 의회를 정치의 기점으로 한 정책 결정 과정의 기능을 저해하는 것이 되었고 바이마르 공화국 말기 힌덴부르크 대통령 아래서는 공화국 의회의 해산권, 긴급권, 임명권 등이 남발되어 의회 민주주의와는 먼 전제적 정치를 출현케 하였다. 이러한 대통령에 관한 규정은 후에 바이마르 체제를 부정하는 히틀러의 독재를 양산해내었다.
독일에서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하여 의회주의를 채택한 것은 대규모의 대중 정당인 사회 민주당이었다. 독일을 둘러싼 국제 환경, 경제의 악화, 정치적 약화 등은 의회로 하여금 사회 경제적으로 갈등을 겪는 독일 국민의 통합을 어렵게 했다. 세계 대공황으로 인한 실업 보험비를 둘러싼 예산안 문제로 뮐러 대 연합 정부가 붕괴되고, 이에 반해 정당 지배 체제의 종식을 약속한 극우 정당(나치)과 극좌 정당(공산당)의 급속한 성장은 바이마르 민주주의 붕괴의 촉진을 의미하였다.
Ⅴ. 결론
이상에서 바이마르 공화국의 성립과 전개과정, 바이마르 공화국이 시도한 민주주의 헌법과 그의 한계, 그리고 바이마르 붕괴의 요인 등에 관하여 살펴보았다. 바이마르 공화국은 전후 체제 하에서 탄생하여 최초의 민주주의 헌법을 시도했다는 평가를 후세에 받고 있으나, 대내외의 여러 가지 문제점에 부딪히게 되면서 14년 만에 단명하고 말았다.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시도한 민주주의 헌법은 민주주의 공화국, 권력의 균형체계, 국민주권론, 국민의 기본권과 사회권 등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시도였다. 그러나 이 민주적인 헌법은 공화국의 혼란스러운 대내외적 상황과 좌우파 양측에서 비롯되는 체제전복의 위협 속에서 자신을 증명할 기회를 정상적으로 갖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바이마르체제를 지탱하던 정당들은 의회민주주의의 기능방식에 익숙하지 않았고 위기상황을 극복할 수 있을 만큼 성숙하지 못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시민 혁명을 거치지 않고 시민 정치 문화의 전면적 개화를 경험하지 않은 독일인에게는 군국주의 정부를 신뢰하는 정치의식이 뿌리깊게 남아있었다. 따라서 권위주의적 정치 생활의 종속으로부터의 내면적 자기 해방이 전제되어야 하는 민주주의적 정치의식을 갖지 못한 독일인들에게 갑작스레 주어진 자유는 개인의 정치적인 판단의 한계를 넘어 예측, 대처하기 어려운 환경에 대한 무력감, 불안, 그리고 정치적 무관심을 초래하였다. 그리고 그 위에 베르사유 조약에 의한 배상 지불의 중압, 인플레이션 및 세계 공황의 연속적인 충격이 겹쳐, 독일 국민은 정치적 가치 판단의 혼란을 겪게 되었고 바이마르 공화국 헌법이 규정한 자유를 자기 것으로 활용하는 방법을 알지 못하였다. 오히려 의회 밖에서 일어난 시위나 집회 같은 직접 행동들이 대중의 감정을 선동, 조작하여 전체주의적 지도자의 대두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나치는 많은 사람들을 동원하기 위해 그 이데올로기의 명확성을 규정하지 않고 여러 잡다한 요소를 가지고 있었으며 히틀러는 반민주주의 사상을 기초로 현존 국가에 반대하는 전 세력을 결집시켜 거대한 대중으로 조직하여 나간 것이다.
결국 바이마르 공화국이 제창했던 민주주의 시도는 체제를 부정하는 정당을 체제 안에 공존하게 하여 나치의 등장을 가져왔다. 이러한 결과에는 의회민주주의를 권위주의적 모델로 대체하려한 구엘리트 집단의 집요한 노력도 커다란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그들의 반민주주의적 사상이 궁극적으로 나치 성장의 토양을 제공해주었으며 세계를 경악하게 한 나치의 독재체제 형성을 가능하게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바이마르 공화국의 실패와 나치 등장의 경험을 통해서 독일에서 ‘방어적 민주주의’가 연구되고 뿌리내리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비록 바이마르 공화국의 역사는 짧았으나 그 헌법의 민주적 정신은 현대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여기에서 바이마르 공화국의 세계사적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본다.
전후체제의 베르사유 조약 문제는 결과적으로 독일의 경제를 파탄시켰다. 이로 인해 독일의 중산계층이 몰락하고 실업자가 증가하였다. 잠시 동안의 경제적인 성장의 기회마저 세계 대공황으로 인해 독일은 경제적으로 결정적인 타격을 입게 되며, 이러한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인한 불안은 노동자와 중산계층으로 하여금 각각 나치와 급진적인 극우 정당으로 발을 돌리게 하였다. 그리고 독일 국민들의 반바이마르, 반민주주의 성향을 강하게 하였다.
2. 바이마르 공화국의 주체적 규제 요인(대내적 요인)
1) 바이마르 헌법의 결함과 정치적인 요인
바이마르 헌법의 기본 특징은 국민 주권의 선언에 따라 인간의 권리에 관한 정치적, 사회적 보장과 구체적인 정치 제도로서 의회 정치와 정당 정치를 전면적으로 도입한 데 있다. 그러나 바이마르 헌법 아래 철저한 비례 대표 선거 제도는 소당 분립(小黨分立)의 경향을 촉진하여 정부의 기반이 되는 의회 다수파 형성을 저해하였고 자연히 정부의 힘은 약화 될 수밖에 없었다. 또한 바이마르 헌법은 바이마르 국가가 정당 정치를 그 원리로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정당에 대한 어떠한 조항도 규정하지 않는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다음에는 대통령에 관한 규정인데, 국민의 직접 선거에 의하여 선출되는 대통령은 공화국 수상과 각료를 임명하고 또 헌법 제48조 규정으로 국가에 공공의 안전과 질서가 저해되는 위험이 있을 때 공공의 안전과 질서 회복을 위하여 필요한 조치를 취할 수 있으며 필요한 경우 국민의 기본권도 정지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의회의 이익이 국민 전체의 이익과 대립될 경우 대통령이 이를 견제하기 위한 데 본래의 의도가 있었으나 정치 통합 과정의 이원화를 초래하여 의회를 정치의 기점으로 한 정책 결정 과정의 기능을 저해하는 것이 되었고 바이마르 공화국 말기 힌덴부르크 대통령 아래서는 공화국 의회의 해산권, 긴급권, 임명권 등이 남발되어 의회 민주주의와는 먼 전제적 정치를 출현케 하였다. 이러한 대통령에 관한 규정은 후에 바이마르 체제를 부정하는 히틀러의 독재를 양산해내었다.
독일에서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하여 의회주의를 채택한 것은 대규모의 대중 정당인 사회 민주당이었다. 독일을 둘러싼 국제 환경, 경제의 악화, 정치적 약화 등은 의회로 하여금 사회 경제적으로 갈등을 겪는 독일 국민의 통합을 어렵게 했다. 세계 대공황으로 인한 실업 보험비를 둘러싼 예산안 문제로 뮐러 대 연합 정부가 붕괴되고, 이에 반해 정당 지배 체제의 종식을 약속한 극우 정당(나치)과 극좌 정당(공산당)의 급속한 성장은 바이마르 민주주의 붕괴의 촉진을 의미하였다.
Ⅴ. 결론
이상에서 바이마르 공화국의 성립과 전개과정, 바이마르 공화국이 시도한 민주주의 헌법과 그의 한계, 그리고 바이마르 붕괴의 요인 등에 관하여 살펴보았다. 바이마르 공화국은 전후 체제 하에서 탄생하여 최초의 민주주의 헌법을 시도했다는 평가를 후세에 받고 있으나, 대내외의 여러 가지 문제점에 부딪히게 되면서 14년 만에 단명하고 말았다.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시도한 민주주의 헌법은 민주주의 공화국, 권력의 균형체계, 국민주권론, 국민의 기본권과 사회권 등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시도였다. 그러나 이 민주적인 헌법은 공화국의 혼란스러운 대내외적 상황과 좌우파 양측에서 비롯되는 체제전복의 위협 속에서 자신을 증명할 기회를 정상적으로 갖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바이마르체제를 지탱하던 정당들은 의회민주주의의 기능방식에 익숙하지 않았고 위기상황을 극복할 수 있을 만큼 성숙하지 못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시민 혁명을 거치지 않고 시민 정치 문화의 전면적 개화를 경험하지 않은 독일인에게는 군국주의 정부를 신뢰하는 정치의식이 뿌리깊게 남아있었다. 따라서 권위주의적 정치 생활의 종속으로부터의 내면적 자기 해방이 전제되어야 하는 민주주의적 정치의식을 갖지 못한 독일인들에게 갑작스레 주어진 자유는 개인의 정치적인 판단의 한계를 넘어 예측, 대처하기 어려운 환경에 대한 무력감, 불안, 그리고 정치적 무관심을 초래하였다. 그리고 그 위에 베르사유 조약에 의한 배상 지불의 중압, 인플레이션 및 세계 공황의 연속적인 충격이 겹쳐, 독일 국민은 정치적 가치 판단의 혼란을 겪게 되었고 바이마르 공화국 헌법이 규정한 자유를 자기 것으로 활용하는 방법을 알지 못하였다. 오히려 의회 밖에서 일어난 시위나 집회 같은 직접 행동들이 대중의 감정을 선동, 조작하여 전체주의적 지도자의 대두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나치는 많은 사람들을 동원하기 위해 그 이데올로기의 명확성을 규정하지 않고 여러 잡다한 요소를 가지고 있었으며 히틀러는 반민주주의 사상을 기초로 현존 국가에 반대하는 전 세력을 결집시켜 거대한 대중으로 조직하여 나간 것이다.
결국 바이마르 공화국이 제창했던 민주주의 시도는 체제를 부정하는 정당을 체제 안에 공존하게 하여 나치의 등장을 가져왔다. 이러한 결과에는 의회민주주의를 권위주의적 모델로 대체하려한 구엘리트 집단의 집요한 노력도 커다란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그들의 반민주주의적 사상이 궁극적으로 나치 성장의 토양을 제공해주었으며 세계를 경악하게 한 나치의 독재체제 형성을 가능하게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바이마르 공화국의 실패와 나치 등장의 경험을 통해서 독일에서 ‘방어적 민주주의’가 연구되고 뿌리내리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비록 바이마르 공화국의 역사는 짧았으나 그 헌법의 민주적 정신은 현대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여기에서 바이마르 공화국의 세계사적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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