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통사회의 생활과 풍속 과목 전체 요약 - 일상사의 의미와 가치, 고대인의 생활과 풍속사, 고려시대 사람들의 생활과 풍속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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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전통사회의 생활과 풍속 과목 전체 요약 - 일상사의 의미와 가치, 고대인의 생활과 풍속사, 고려시대 사람들의 생활과 풍속사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일상사의 의미와 가치
가. 일상사란 무엇인가?
나. 일상사의 가치

2. 고대인의 생활과 풍속사
가. 암각화로 보는 선사인의 생활
나. 고분벽화를 통해 본 고구려인의 생활
다. 토우로 살펴본 신라인의 생활

3. 고려시대 사람들의 생활과 풍속사
가. 고려시대의 여성
나. 혼인과 가정생활
다. 장례풍속
라. 관리들의 삶과 죽음

* 참고 문헌

본문내용

다시 쓰기 위해 가져옴으로써 그의 아버지로 하여금 불효를 깨우치게 했다는 이야기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이러한 이야기는 사실은 다른 나라에서 전래된 이야기이다. 앞의 이야기는 불교경전인 『잡보장경』의 기로국연조의 설화와 유사하고, 뒤의 이야기는 중국 『효자전』의 원곡이야기와 유사하다. 원곡이야기는 노인에 대한 공경을 강조하는 점에서 효의 윤리를 확산시킬 목적으로 수용되었다고 보여진다. 또한 기로국이야기는 우리 나라에 수용·확산되면서 불경에 있는 천신(天神)이 중국으로, 기로국이 고려국으로, 기로의 풍습이 고려장으로 변용되어 고려시기에 실재로 존재한 풍속처럼 믿어지게 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고려장과 같은 이야기가 우리나라에만 있는 것이 아니며, 고려시대 장례제도는 더욱 아니다.
- 고려시기는 불효죄를 엄격하게 처벌하였다.
\"조부모나 부모가 살아있는데 아들과 손자가 호적과 재산을 달리하고 공양을 하지 않을 때에는 징역 2년에 처한다\" , “부모나 남편이 죽었다는 말ㅇ르 듣고도 슬퍼하지 않고 잡된 놀이를 하는 자는 징역 1년, 상이 끝나기도 전에 상복을 벗고 평상복을 입는 자는 징역 3년에 처한다”
『고려사』
실제 고려시대 장례풍습
- 관리 : 고려시대의 묘지에 의하면, 이 시기 지배층은 화장을 많이 했음을 알 수 있다. 사찰 근처에서 화장을 하고 유골을 거둬 사찰에 모시고, 아침·저녁으로 음식을 올리며, 어느 시일이 지나면 유골을 묻었다. 유골은 골호나 석관에 담아 묻었다.
- 서민 : 일반 서민의 경우는 자료가 거의 남아 있지 않아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대체로 관도 없는 구덩이에 시신을 매장하였을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 중에는 간혹 풍장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밖에 화장을 한 후에 재를 산이나 강물에 뿌리는 방법이 있었다.
- 국왕 : 국왕의 경우 매장을 하여 성대한 분묘를 만들었다. 석실의 벽면과 천장에 성신도, 사신도 등의 그림을 그렸다. 장례기일은 27개월이 27일로 줄기도 하였으며 3일장도 유행하였다.
관리들의 삶과 죽음
묘지명을 통해 본 고려 귀족
- 묘지명(墓誌銘)은 망자의 가계, 관직, 행적 등을 산문과 시의 형식으로 돌에 새겨 묻은 것을 말한다.
- 망자의 삶을 후세에 전하고자 지극히 개인적인 동기로 만들어진 묘지명은 문장 또한 가족이나 친구, 제자가 주로 맡지만 스스로 지은 자찬명도 있다.
- 정사(正史)에 없는 내용이 많아 당시 사회의 제도·풍속·내세관 등을 알 수 있는 기록으로서 가치가 크다.
- 우리나라에서 묘지명은 고구려의 안악 3호분 묵서명, 백제의 무령왕릉 지석 등 고구려 이래 계속 출토 되었다.
- 정형화된 묘지명, 말하자면 죽은 이의 이름과 가계, 관직 이력과 인품을 비롯한 여러 행적, 혼인 등 가족관계, 장례 절차, 그리고 죽은 이를 기리는 운문의 명을 갖춘 묘지명은 고려 때부터 확인된다.
- 천인이나 일반 평민은 말할 것도 없고, 지방에서 상당한 지위를 누리던 향리의 경우에도 현재 그 묘지명이 전해지지 않는다. 고려 묘지명 문화는 철저하게 관인층 이상의 지배층만이 누린 전유물이었던 것이다.
- 고려 묘지명은 320여개가 남아있는데 주인공이 관리, 여성, 승려 등으로 다양하다.
- 묘지명에서 불교와 풍수지리가 고려인의 일상 생활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이는 고려 귀족들의 장례는 고려말 성리학의 보급 전까지는 불교식 화장이 보통이고, 유골은 골호나 조립식 석관에 묻었다. 석관은 천장 바닥, 네 벽면의 안팎에 사신도·비천상·북두칠성 등의 장식에서 살펴 볼 수 있다.
고려 관인들의 생활
- 최고의 특권을 누린 문벌 귀족
고려의 최고 신분인 문벌 귀족은 왕실을 비롯하여 신라의 옛 귀족과 공신들이 그 바탕을 이루고 있었다. 문벌이란 대대로 고위 관리를 배출하고 권세를 떨친 집안을 말한다. 문벌 귀족에게는 공음전이라는 토지가 지급되었는데, 이것은 자손들에게 물려줄 수 있었다. 또 음서라고 하여 고위 관리의 자손은 과거를 통하지 않고도 벼슬을 얻을 수 있었다. 공음전과 음서 덕분에 고려의 문벌 귀족은 자신들의 특권과 지위를 자손들에게 대대로 물려줄 수 있었다.
- 행정 실무를 당당한 중소 지배층
중소 지배층은 대부분 지방의 중소 호족 출신으로 과거를 통해 중앙의 관리로 진출하였다. 하지만 문벌을 이루지 못한 중소 지배층은 관리가 되어도 높은 자리에 오르지는 못했다. 간혹 어렵게 높은 자리에 오르더라도 후손에게까지 그 지위를 물려주는 경우는 드물었다. 중앙에 진출하지 못한 나머지 호족들은 지방에서 향리가 되어 조세, 부역, 소송 등의 행정 실무를 담당하였다.
- 결혼은 보통 남자 관인의 경우 20세 여성의 경우 16세에 했고 고려 후기에 가면 더 낮아져 남성 18세 여성 14세에 하였다. 여성의 경우 자신이 낳은 자식을 데리고 재혼하기도 하였다.
- 관인들은 보통 영아 사망률까지 고려해보았을 때 실제로 6~8명 정도를 낳았고, 성비가 100:123명으로 아주 불균형했다.
- 묘지명에 나타나는 전체 관리의 평균 수명은 65.6세, 여성은 64.5세 승려는 70.2세 국왕은 44세 정도 이다. 일반인의 경우 부실한 영양공급, 과도한 노동등으로 수명이 짧았을 것이다.
* 참고 문헌
- 이해준 송찬섭 전경목 정연식 정승모, 「전통사회와 생활문화」, 한국방송통신대학교출반부, 2006.
- 장재영 , 「오늘의 역사학」 제 1장 ‘일상의 역사’란 무엇인가 , http://www.cyworld.com/dandylion/2982325 , 2009.09.08.
- 한미라 전경숙 「한국인의 생활사」, 일진사
- 신지향, 「고구려벽화를 통해 보는 고구려인들의 생활상」, http://blog.naver.com/tlswl304/100067220012 , 2009
- KBS 역사스페셜, 「역사스페셜 2」 , 효형출판 , 2000.12
- 한국역사연구회, 「고려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1 」, 청년사, 2005
- http://blog.naver.com/knightblack
- 서성호, 「무덤 속 역사 코드, 고려 묘지명」, 국립전주박물관 학예연구관
- 「경향신문」, [서예가 열전]고려시대 묘지명 320개 여성사·글씨연구의 寶庫 , 2006-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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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4.12.20
  • 저작시기20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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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52394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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