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 서 론 >
< 본 론 >
1. 내레이터의 성격과 소설의 다양한 해석 가능성
2. 내레이터의 눈에 비친 대영주
1) 대영주의 성격
2) 대영주가 추구하는 예술의 성격
3. 내레이터의 눈에 비친 요시히데
1) 요시히데의 성격
2) 요시히데가 추구하는 예술의 성격
3) 요시히데의 한계와 극복(딸의 존재를 중심으로)
◇ 작품에서 원숭이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 결 론 >
< 본 론 >
1. 내레이터의 성격과 소설의 다양한 해석 가능성
2. 내레이터의 눈에 비친 대영주
1) 대영주의 성격
2) 대영주가 추구하는 예술의 성격
3. 내레이터의 눈에 비친 요시히데
1) 요시히데의 성격
2) 요시히데가 추구하는 예술의 성격
3) 요시히데의 한계와 극복(딸의 존재를 중심으로)
◇ 작품에서 원숭이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 결 론 >
본문내용
요시히데와 같은 이름으로 불려진다. 그 이유는 요시히데가 하는 행동이 꼭 원숭이 같다고 하여 '猿秀'라는 별명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어느날 원숭이는 대영주의 어린 아들로 인해 위험에 처하게 된다. 도련님이 원숭이를 벌하려 하자 요시히데의 딸은「게다가 요시히데라 하시면 아버지가 혼이 나는 것 같아 아무래도 단지 보고만 있을 수 없습니다」 それに良秀と申しますと、父がご折檻を受けますやうで、どうもただ唯見ではおられませぬ。26頁 4行目
라고 하자 「그래? 아버지의 목숨구걸이라면 뜻을 굽히고 용서해주겠다.」 そうか。父親の命ごいなら、枉げて赦してとらすとしよう。26頁 7行目
라며 원숭이의 목숨을 구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이 사건 이후로 원숭이는 외동딸의 곁을 잠시도 떠나지 않고 대영주는 원숭이를 잘 돌보는 것을 보고 그녀의 孝行에 포상을 내린다. 효행이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원숭이 요시히데는 사루히데라는 별명이 붙은 화가 요시히데의 연장선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원숭이를 통해 딸에 대한 요시히데의 사랑이 드러난다고 가정해보면, 딸이 감기에 들었을 때 손톱을 물어뜯으며 걱정을 하거나, ある時娘の風邪のここちで、床につきました時なども、小猿はちゃんとそのまくらもとにすわりこんで、のせいか心細そうな顔をしながら、しきりに爪をかんでおりました。26頁 11行目
가마를 불태울 때 딸을 향해 뛰어드는 장면 등을 통해 작자가 의도적으로 원숭이를 통해 딸을 향한 요시히데의 진짜 속마음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해볼 수 있다.
특히 대영주가 가마를 불태우는 장면에서 요시히데는 딸이 불타는 모습을 보고 인간으로서 당연히 느끼게 되는 고뇌를 느꼈으나, 예술에 대한 열정으로 전환해내며 가마를 바라보게 된다. 가마에 불이 붙고 딸이 불에 타 죽어 가는 장면을 바라보면서도 딸을 구하러 불길에 뛰어들지 않는다. 인간적인 고통을 느끼면서도 딸의 생명 구하기를 거부한 것이다. 그러나 바로 이 때 원숭이 요시히데는 불구덩이 속으로 쏜살같이 뛰어들면서 딸과 함께 생을 마친다. 60頁 6行目
즉, 원숭이는 요시히데의 인간적인 모습의 화신이라 생각된다. 요시히데는 원숭이의 별명이기는 하지만 원숭이에게 가탁되어진 화가 요시히데의 인간적인 부분으로 딸과 죽음을 함께 한 것이며, 원숭이의 죽음으로 인해 요시히데의 인간적인 부분은 소멸하고 그림의 부분, 예술가 요시히데만이 남게 된 것이다.
원숭이를 등장시키지 않아도 인간이라면 얼마나 요시히데가 괴로울지를 추측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원숭이를 등장시킨 것은 인간적인 면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예술가의 고뇌를 잘 대변해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만약 도덕적 잣대로 원숭이라 불길 속으로 뛰어든 것처럼 요시히데가 불길 속으로 뛰어들었다면 그는 예술을 포기해야 하는 것이며 예술도 딸도 구원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예술지상주의란 예술의 유일한 목적이 예술자체 및 美에 있으며 도덕적 사회적 또는 그 밖의 모든 효용성을 배제해야 한다는 예술의 자율성과 무상성을 강조한 '예술을 위한 예술'을 주장한 이론이다. 흔히 아쿠타가와를 예술지상주의자로 논하는데, 그가 하라요시 이치로(原善一) 앞으로 보낸 서간「햇빛을 받아 점점 하늘 쪽으로 뻗어가는 풀처럼 생활력이 넘치는 예술입니다. 그 의미로 예술을 위한 예술에는 찬성하지 않습니다. 이전까지 내가 썼던 감상적인 문장이나 시는 이제 영원히 안녕입니다 (日をうけてどん空の方へのべて草のやうな生活力の溢れている芸術です基意味で芸術のの芸術には不成です……(中略)」(書簡『全集第17卷』238頁)
에서 예술을 위한 예술에 찬성하지 않는다고 밝히고 있다. 즉 단지 예술만을 위한 예술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살아갈 수 있도록 힘을 줄 수 있는 예술을 원했던 것이며 그것이 진정한 예술의 힘이라 파악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즉 자신의 인생에 있어 예술은 자신이 살아갈 수 있는 생명이었던 것이며 또한 아쿠타가와는 예술에 대해「예술을 위한 예술은 한발 더 나아가면 예술유희설에 빠지며, 인생을 위한 예술은 한발 더 나아가면 예술공리설에 빠진다」고 지적하였다. 그는『지옥변』에서 한결같이 예술완성을 위해 정진해가는 모습과 자신의 딸을 희생시키면서까지 지옥변을 완성하려고 하는 요시히데를 통해 예술의 우월성을 설명하려 했으며 (예술)유희설에 빠지지 않기 위해 원숭이를 등장시켰다고 생각된다. 또한 요시히데에게 남겨졌던 인간적인 부분인 사랑하는 딸의 생명을 구하는 일은 그의 화신인 원숭이 요시히데에 의해 잔재를 씻게 되는 것이다.
< 결론 >
지옥변은 예술지상주의, 즉 예술이란 무엇인가에 중점을 두고 읽어봐야 할 작품이다. 대영주가 추구했던 예술의 성격을 규정해 본다면, 그것은 자신이 다스려야 하는 ‘인간’들을 위한 예술, 혹은 그들의 ‘인생’을 위한 예술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즉, 대영주는 권력자의 입장에서, 사람들을 도덕적인 방향으로 이끌어 가고자 하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예술’을 바라본 것이다.
반면 요시히데에게 있어 예술이라는 것은 인생 그 자체이며 또한 영생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요시히데는 대영주라는 실생활의 권력에 대응하기 위해 예술을 선택한다. 그가 사랑하는 외동딸을 대영주에게 뺏기지 않기 위해 현생에서의 목숨은 포기하고 예술작품 속에서 살아있는 딸의 영생을 선택했던 것이다. 요시히데의 자살과 예술과의 관련성을 지옥변 주제를 파악하는데 있어 핵심이 되는 요소로도 생각해볼 수 있겠다. 요시히데의 자결 이후 그를 이해하지 못하였던 많은 이들이 그의 작품인 지옥변을 보고 딸의 희생에 관한 부분과 자결까지 아울러 모두 긍정의 태도를 취하는 것은 결국 완성된 작품만이 요시히데를 작가로서 영원히 살게 한다는 작품완성론을 나타내고 있는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작품 속의 대영주와 비교하여 요시히데는 예술을 위하여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까지 버릴 각오가 되어 있다. 실제 혼을 담은 예술 작품을 요즘에는 보기가 힘들다. 물론 예술만을 중시하여 자기 딸까지 죽게 만든 요시히데도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없지 않아 있지만 지옥변이 관심을 끄는 이유는 상품화 되어만 가는 요즘 예술계의 폐단이 어느정도 문제화 되고 있기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어느날 원숭이는 대영주의 어린 아들로 인해 위험에 처하게 된다. 도련님이 원숭이를 벌하려 하자 요시히데의 딸은「게다가 요시히데라 하시면 아버지가 혼이 나는 것 같아 아무래도 단지 보고만 있을 수 없습니다」 それに良秀と申しますと、父がご折檻を受けますやうで、どうもただ唯見ではおられませぬ。26頁 4行目
라고 하자 「그래? 아버지의 목숨구걸이라면 뜻을 굽히고 용서해주겠다.」 そうか。父親の命ごいなら、枉げて赦してとらすとしよう。26頁 7行目
라며 원숭이의 목숨을 구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이 사건 이후로 원숭이는 외동딸의 곁을 잠시도 떠나지 않고 대영주는 원숭이를 잘 돌보는 것을 보고 그녀의 孝行에 포상을 내린다. 효행이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원숭이 요시히데는 사루히데라는 별명이 붙은 화가 요시히데의 연장선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원숭이를 통해 딸에 대한 요시히데의 사랑이 드러난다고 가정해보면, 딸이 감기에 들었을 때 손톱을 물어뜯으며 걱정을 하거나, ある時娘の風邪のここちで、床につきました時なども、小猿はちゃんとそのまくらもとにすわりこんで、のせいか心細そうな顔をしながら、しきりに爪をかんでおりました。26頁 11行目
가마를 불태울 때 딸을 향해 뛰어드는 장면 등을 통해 작자가 의도적으로 원숭이를 통해 딸을 향한 요시히데의 진짜 속마음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해볼 수 있다.
특히 대영주가 가마를 불태우는 장면에서 요시히데는 딸이 불타는 모습을 보고 인간으로서 당연히 느끼게 되는 고뇌를 느꼈으나, 예술에 대한 열정으로 전환해내며 가마를 바라보게 된다. 가마에 불이 붙고 딸이 불에 타 죽어 가는 장면을 바라보면서도 딸을 구하러 불길에 뛰어들지 않는다. 인간적인 고통을 느끼면서도 딸의 생명 구하기를 거부한 것이다. 그러나 바로 이 때 원숭이 요시히데는 불구덩이 속으로 쏜살같이 뛰어들면서 딸과 함께 생을 마친다. 60頁 6行目
즉, 원숭이는 요시히데의 인간적인 모습의 화신이라 생각된다. 요시히데는 원숭이의 별명이기는 하지만 원숭이에게 가탁되어진 화가 요시히데의 인간적인 부분으로 딸과 죽음을 함께 한 것이며, 원숭이의 죽음으로 인해 요시히데의 인간적인 부분은 소멸하고 그림의 부분, 예술가 요시히데만이 남게 된 것이다.
원숭이를 등장시키지 않아도 인간이라면 얼마나 요시히데가 괴로울지를 추측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원숭이를 등장시킨 것은 인간적인 면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예술가의 고뇌를 잘 대변해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만약 도덕적 잣대로 원숭이라 불길 속으로 뛰어든 것처럼 요시히데가 불길 속으로 뛰어들었다면 그는 예술을 포기해야 하는 것이며 예술도 딸도 구원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예술지상주의란 예술의 유일한 목적이 예술자체 및 美에 있으며 도덕적 사회적 또는 그 밖의 모든 효용성을 배제해야 한다는 예술의 자율성과 무상성을 강조한 '예술을 위한 예술'을 주장한 이론이다. 흔히 아쿠타가와를 예술지상주의자로 논하는데, 그가 하라요시 이치로(原善一) 앞으로 보낸 서간「햇빛을 받아 점점 하늘 쪽으로 뻗어가는 풀처럼 생활력이 넘치는 예술입니다. 그 의미로 예술을 위한 예술에는 찬성하지 않습니다. 이전까지 내가 썼던 감상적인 문장이나 시는 이제 영원히 안녕입니다 (日をうけてどん空の方へのべて草のやうな生活力の溢れている芸術です基意味で芸術のの芸術には不成です……(中略)」(書簡『全集第17卷』238頁)
에서 예술을 위한 예술에 찬성하지 않는다고 밝히고 있다. 즉 단지 예술만을 위한 예술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살아갈 수 있도록 힘을 줄 수 있는 예술을 원했던 것이며 그것이 진정한 예술의 힘이라 파악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즉 자신의 인생에 있어 예술은 자신이 살아갈 수 있는 생명이었던 것이며 또한 아쿠타가와는 예술에 대해「예술을 위한 예술은 한발 더 나아가면 예술유희설에 빠지며, 인생을 위한 예술은 한발 더 나아가면 예술공리설에 빠진다」고 지적하였다. 그는『지옥변』에서 한결같이 예술완성을 위해 정진해가는 모습과 자신의 딸을 희생시키면서까지 지옥변을 완성하려고 하는 요시히데를 통해 예술의 우월성을 설명하려 했으며 (예술)유희설에 빠지지 않기 위해 원숭이를 등장시켰다고 생각된다. 또한 요시히데에게 남겨졌던 인간적인 부분인 사랑하는 딸의 생명을 구하는 일은 그의 화신인 원숭이 요시히데에 의해 잔재를 씻게 되는 것이다.
< 결론 >
지옥변은 예술지상주의, 즉 예술이란 무엇인가에 중점을 두고 읽어봐야 할 작품이다. 대영주가 추구했던 예술의 성격을 규정해 본다면, 그것은 자신이 다스려야 하는 ‘인간’들을 위한 예술, 혹은 그들의 ‘인생’을 위한 예술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즉, 대영주는 권력자의 입장에서, 사람들을 도덕적인 방향으로 이끌어 가고자 하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예술’을 바라본 것이다.
반면 요시히데에게 있어 예술이라는 것은 인생 그 자체이며 또한 영생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요시히데는 대영주라는 실생활의 권력에 대응하기 위해 예술을 선택한다. 그가 사랑하는 외동딸을 대영주에게 뺏기지 않기 위해 현생에서의 목숨은 포기하고 예술작품 속에서 살아있는 딸의 영생을 선택했던 것이다. 요시히데의 자살과 예술과의 관련성을 지옥변 주제를 파악하는데 있어 핵심이 되는 요소로도 생각해볼 수 있겠다. 요시히데의 자결 이후 그를 이해하지 못하였던 많은 이들이 그의 작품인 지옥변을 보고 딸의 희생에 관한 부분과 자결까지 아울러 모두 긍정의 태도를 취하는 것은 결국 완성된 작품만이 요시히데를 작가로서 영원히 살게 한다는 작품완성론을 나타내고 있는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작품 속의 대영주와 비교하여 요시히데는 예술을 위하여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까지 버릴 각오가 되어 있다. 실제 혼을 담은 예술 작품을 요즘에는 보기가 힘들다. 물론 예술만을 중시하여 자기 딸까지 죽게 만든 요시히데도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없지 않아 있지만 지옥변이 관심을 끄는 이유는 상품화 되어만 가는 요즘 예술계의 폐단이 어느정도 문제화 되고 있기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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