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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안동하회마을]안동하회마을의 전설, 안동하회마을의 지정문화재, 안동하회마을의 하회탈, 안동하회마을의 양진당, 안동하회마을의 하회별신굿탈놀이, 안동하회마을의 옥연정사, 안동의 조탑동5층전탑 분석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개요

Ⅱ. 안동하회마을의 전설

Ⅲ. 안동하회마을의 지정문화재

Ⅳ. 안동하회마을의 하회탈
1. 양반탈
2. 부네탈
3. 초랭이탈
4. 중탈
5. 할미탈
6. 각시탈
7. 백정탈
8. 이매탈
9. 선비탈

Ⅴ. 안동하회마을의 양진당

Ⅵ. 안동하회마을의 하회별신굿탈놀이

Ⅶ. 안동하회마을의 옥연정사

Ⅷ. 안동의 조탑동5층전탑

참고문헌

본문내용

)에 허정승의 묘소가 있어 자손인 김해 허씨들이 묘소를 찾아왔었다. 하회탈을 만들었다고 알려진 허도령 역시 김해 허씨이다.
허씨들이 터를 잡고 산지 백년 뒤 광주(廣州) 안씨(安氏) 안성이란 분이 경상감사로 부임하여 각 고을을 순시하던 중 하회에 와서 보니 산수가 너무나 좋아 화산 기슭 향교골에 터를 잡아 살기 시작했다. 천곡(泉谷) 안성(安省)이란 분의 아들 안종생(安從生)은 사헌부 감찰까지 지냈는데 배소(裵素)의 사위이기도 하다. \'광주안씨대동보\'에 의하면 안성은 전서공(典書公, 류종혜)과 동시대 인물이기 때문에 전서공이 고개 밖(峴外)에 터를 잡던 시기와 같은 때에 하회에 와서 살기 시작한 게 아닌가 생각된다. 안씨는 하회에 들어와 35대까지 내려왔다는 것만 보아도 그 역사가 유구했음을 알 수 있다. 지금도 마을 근처에 안씨 묘소들이 산재해 있으며 삼십년 전까지 한 집이 남아 있다 떠난 뒤로 지금은 한집도 남지 않았다.
\'안씨들이 피를 천석이나 했다\'는 말도 전한다. 부용대로부터 부계(富溪)쪽으로 만여평이나 광활하게 펼쳐진 농토에서 수확된 것으로 추정된다. 풍산 류씨들이 입촌하여 점차로 번성하게 되자 허씨들이 먼저 한 두집 떠나고 이어서 광주 안씨들이 뒤를 이었다. 그리하여 하회마을은 류씨 집성촌으로 자리잡으면서 대촌으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고 보여진다. 풍산 류씨들이 하회에 자리를 잡으면서 얼마 안되어 벼슬길이 열렸다. 중종대에 입암(立巖) 류중영(柳仲영, 1515~1573)은 과거에 급제한 뒤 벼슬이 관찰사에 이르렀고, 이분이 두 아들을 두었는데 바로 겸암 류운룡(1539~1601)과 서애 류성룡(1542~1607) 선생이다. 하회는 옛부터 삼백여 대촌(大村)이라 불려왔다. 이것은 하회 1, 2동을 합해서 부른 말이다. 갑술년(1934) 대홍수에 유실되어 현지는 본동에 120여호에 류씨는 70여호 정도이다.
Ⅲ. 안동하회마을의 지정문화재
하회탈 및 병산탈 - 국보 제 121호
징비록 - 국보 제 132호
류성룡 종손가문적 - 보물 제 160호
양진당 - 보물 제 306호
충효당 - 보물 제 414호
류성룡 종손가유물 - 보물 제 460호
하회별신굿 탈놀이 - 중요무형문화재 제 69호
병산서원 - 사적 제 260호
북촌댁 - 중요민속자료 제 84호
원지정사 - 중요민속자료 제 85호
빈연정사 - 중요민속자료 제 86호
류시주가옥 - 중요민속자료 제 87호
옥연정사 - 중요민속자료 제 88호
겸암정사 - 중요민속자료 제 89호
남촌댁 - 중요민속자료 제 90호
주일재 - 중요민속자료 제 91호
안동하회마을 - 중요민속자료 제 122호
하동고택 - 중요민속자료 제 177호
Ⅳ. 안동하회마을의 하회탈
1. 양반탈
고려초 유학이 이땅에 들어오면서 쓰여지기 시작한 양반, 당시엔 문반, 무반을 합친 벼슬을 지칭했고, 세습으로 이어지면서 국법보다 우선하는 권세를 누렸다. 이후 인격을 나타내는 말로 쓰이면서 양반은 엄격한 도덕적 조건을 갖춰야 했지만, 근세 유학의 이념이 무너지면서 단순히 사람을 지칭하는 말로 쓰여져 가끔 양반의 의미를 혼돈 할 때가 있지만, 하회탈의 양반은 문반과 무반을 지칭하는 벼슬아치다. 양반탈은 계란형에 감홍색, 매부리코에 실눈으로 온화하고 인자하게 웃는 한국인을 대표하는 얼굴이다. 광대가 고개를 젖혀 입을 크게 벌리면 호탕하게 웃고, 고개를 숙이며 입을 다물면 화난 표정이 되는데. 희, 노, 애, 락을 자유로이 표현 할 수 있는 기능이 세계적인 탈로 평가받는 이유다.
하회탈의 대표적인 인물로 가면 미술의 극치라고 한다. 얼굴 전체가 부드러운 선으로 묘사되어 있고 전체적으로 여유 있는 표정을 하고 있다. 양반의 탈을 반으로 나누어 보면 왼쪽은 40대 오른쪽은 60대의 형상을 띠고 있다. “양반은 대추 세알 먹고도 배부르다.” 는 말처럼 허풍스러움과 여유스러움이 있는 표정이다.
2. 부네탈
얼굴에는 살색으로 분칠을 했고, 연지 곤지 찍은 흔적이 보이며, 입술에는 붉은 칠을 했다. 머리는 잘 빗겨서 뿔처럼 얹은머리를 했다. 갸름한 얼굴, 반달 같은 눈썹, 오똑한 코, 조그마한 입이 전형적인 미인상이다. 눈과 입가의 가벼운 웃음기는 바람기가 있는 상이다. 소첩 혹은 기녀의 신분으로 등장한다. 계란형 얼굴에 눈웃음치며, 수줍은듯 미소를 머금고, 풍만하게 포개진 아랫턱에 복스러움이 담긴 부네탈, 맏며느리감 같은 이런 얼굴이 옛날에는 미인의 기준이었다. 눈섭은 반달모양으로 또렸하고, 찹쌀가루로 분 바르고 연지, 곤지, 찍어 진한 화장을 했다. 이런 화장은 고려때, 기녀들이 하는 화장으로 \"분대화장\"이라 했고, \"분대화장한 아낙네\"란 뜻의 \"분네\"가 자연스런 발음현상으로 \"부네\"가 된 것이다.
부네는 여염집 아낙이 아닌 주막의 작부다. 때문에 길에서도 화급하게 오줌을 눌수 있고, 이를 본 늙은 중이 욕정을 참지 못해 파계의 길로 이르며 음흉한 중의 유혹에 넘어가 함께 춤을 추다 들켜서 야유를 받는다.
부네 입은 작게 뚫려있어 양반과, 선비가 부를 때 복(거절), 보-옥(승락)의 대답밖엔 할 수 없고 코 구멍도 흔적만 있을 뿐, 구멍은 뚫려있지 않다. 이는 말도 자유롭게 할 수 없고, 숨도 제대로 쉬고 살 수 없었던 사회성을 나타낸 것이라 한다. 그러나, 머리모양은 고려시대 여성의 머리모양을 연구하는데 매우 귀중한 자료가 된다. 부네의 춤사위는 \"맵시 있다, 부네 걸음\"이다. 눈웃음치며 치마 자락 감싸고 옷고름 입에 물고 오금을 비비며 살랑살랑 걷는 모습이 술집의 작부답게 맵시 있어 보이기 때문이다.
3. 초랭이탈
얼굴은 주홍색 바탕에 갈색이 덮였다. 미간 위 이마가 혹처럼 튀어나왔으며, 눈썹은 검게 칠했고둥글고 조그마한 눈도 툭 튀어 나왔다. 양 볼에 주름이 있고, 코 밑과 아랫입술에는 식모공이 남아 있다. 아랫턱 가운데에 금이 가 있다. 탈놀이에선 마당 요소 요소에 등장, 놀이 전체를 이끌며 직설적이고, 공격적인 말투와 행동으로 양반, 선비를 조롱한다. 초랭이는 항상 얼굴을 상하, 좌우로 흔들면서 촐랑거린다. 경망스럽고 촐랑대는 사람은 체구가 작고 얼굴도 작아 움직임이 가볍기 때문에 초랭이탈을 작고 가볍게 만들어 탈을 쓰고도 움직임을 쉽게 했다. 초랭이는 바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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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9.03.26
  • 저작시기2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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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525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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