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역사의 객관성과 주관성
기독교와 역사의 의미
-진보의 영역
-모호성의 영역
-소망의 영역
진리와 거짓
비폭력적 인간과 역사 참여
국가와 폭력
정치적 모순
-결 론-
기독교와 역사의 의미
-진보의 영역
-모호성의 영역
-소망의 영역
진리와 거짓
비폭력적 인간과 역사 참여
국가와 폭력
정치적 모순
-결 론-
본문내용
로 축소될 수 없는 특수 형태의 합리성을 발전시킨다. 그러나 동시에 특수한 악을 발전시킨다. 정치적 악, 정치권력의 악이 그것이다. 경제적 착취는 사라질 수도 있을지 모르나 정치적 악은 지속 된다. 특수한 합리성과 특수한 악은 정치성의 이중적인 모순이다. 이 둘의 모순은 인정되어야 한다. 가장 큰 악은 가장 위대한 합리성에 붙어 있는 것과 정치가 상대적으로 자율적이기 때문에 정치적 소외는 존재한다는 것이다.
정치는 그 목적이 철학 자체의 근본적인 의도 즉 선과 행복과 관련 될 때만 그 의미를 드러낸다. 정치성의 자율은 인간이란 동물의 이 모호한 공동체적 운명 이상의 그 무엇이며, 이간이 시민권을 통해 인간됨으로 들어오는 것 이상의 무엇이다. 거짓은 자주 쉽게 정치성으로 미끄러져 들어온다. 정치성이 거짓으로 기울기 쉬운 이유는 정치적 결속이 관념성의 현실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권력이 악인 것은 아니다. 하지만 권력은 악을 현저하게 필요로 하는 인간의 위대함이다. 역사상악의 가장 위대한 기회이며 악의 가장 큰 실험일 것이다. 그 이유는 권력이 매우 위대한 것이기 때문이며, 국가의 역사적 합리성의 도구이기 때문이다. 죄는 권력 안에서 자신을 드러내며 권력은 죄의 진짜 본질을 폭로한다. 이 본질은 쾌락이 아니라 소유와 권력의 악인 권세의 교만이다.
마르크스가 폭력의 문제를 재발견 한 것은 바로 이러한 본질적인 거짓으로 부터이며, 국가의 주장과 실제 국가 존재 사이의 불일치에서 부터이다. 사실 주권이란 구체적 현실 안에 있는 국민의 실체가 아니라 다른 공상 세게이기에 실제적이고 구체적이며 경험적인 주권자의 지지를 자신에게 부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이 모순의 자율적 성격을 보지 못했다. 그는 단순한 상부구조만 보았다. 하부영역에 속한 모순들과 계급 대립의 결과를 하나의 덧붙여진 영역으로 옮겨놓은 것이다. 그 때 국가는 계급의 폭력적 도구에 불과하게 된다.
-결 론-
역사는 진보의 역사이다. 진보를 통해서 많은 발전과 성장을 한 것이 사실이다. 많은 물질적 풍요와 업적들을 이룩해 내었다. 더 풍요로운 방향으로 진보했으며, 또 더 많은 것을 얻는 방향으로 진보 했다. 그러나 그 진보의 이면에는 모호성이 존재한다. 발전과 풍요가 있지만 오히려 퇴보하고 후퇴한 것들이 존재한 것이다. 그것은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계몽주의 이성의 힘으로 많은 물질적인 부를 이룬 시점에 일어난 2차 세계대전이라는 인류 최대의 비극적인 참사, 물질적 풍요로움으로 편해진 시점에서 윤리적인 벽들이 허물어져가고 있는 현실은 진보의 이면에 있는 모호성을 보여준다.
본서의 저자는 본서를 통해 이런 모호성과 진보의 관계에 있는 역사의 두 가지 측면을 바라보게 한다. 역사는 진보와 모호성의 역사이며, 진리와 거짓이 공존하는 역사이다. 이런 현실에서 국가는 진리의 잣대를 가지고 앞에서 정치권력을 행사하여 정의와 자유를 부르짖지만 그 뒤에서는 거짓과 폭력이라는 다른 수단을 사용하게 된다. 이런 국가의 한계와 거짓과 폭력 모호성의 상황에 필요한 것은 비폭력적 방법이다. 간디는 비폭력을 통하여 그 가능성을 입증했다. 비폭력은 국가의 모호성과 거짓의 한계에 대한 처방으로 작용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한계를 가지고 있다.
더 필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이다. 또 역사의 주관자 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소망이다. 진리와 거짓, 진보와 모호성이 공존하며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는 것들을 통해 이끌어지는 듯이 보이는 이 역사가 바로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이끌어진다는 사실은 그리스도인들이 반드시 받아들이고 바라보아야 할 소망이다. 그래서 리쾨르는 역사를 진보, 모호성, 소망이라는 말로 표현한 것이다.
역사의 주관자는 하나님이시다. 진보와 애매성, 진리와 거짓이 모순과 부조리, 폭력의 모습으로 보여 져서 어둡고 어쩔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역사의 주관자는 하나님이시다. 종말론적 시각에서 하나님은 구원자로서 완성을 향해 역사를 움직여 가고 계신다. 그러기에 소망이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가슴으로 품고 비폭력의 수준을 넘어선 헌신과 사랑으로 역사 안에서 살아야 하며, 하나님께서 이루실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바라보아야 한다. 그러나 이렇게 바라보는 것에서 그쳐서는 안 된다. 이런 폭력과 억압의 상황에서 모호성이 드러나는 현실에서 비폭력적인 방법으로 매일 같이 죽는 듯이 보이지만 궁극적 승리의 방법인 비폭력 더 나아가 적극적인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을 주창하며 나아가야 한다.
정치는 그 목적이 철학 자체의 근본적인 의도 즉 선과 행복과 관련 될 때만 그 의미를 드러낸다. 정치성의 자율은 인간이란 동물의 이 모호한 공동체적 운명 이상의 그 무엇이며, 이간이 시민권을 통해 인간됨으로 들어오는 것 이상의 무엇이다. 거짓은 자주 쉽게 정치성으로 미끄러져 들어온다. 정치성이 거짓으로 기울기 쉬운 이유는 정치적 결속이 관념성의 현실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권력이 악인 것은 아니다. 하지만 권력은 악을 현저하게 필요로 하는 인간의 위대함이다. 역사상악의 가장 위대한 기회이며 악의 가장 큰 실험일 것이다. 그 이유는 권력이 매우 위대한 것이기 때문이며, 국가의 역사적 합리성의 도구이기 때문이다. 죄는 권력 안에서 자신을 드러내며 권력은 죄의 진짜 본질을 폭로한다. 이 본질은 쾌락이 아니라 소유와 권력의 악인 권세의 교만이다.
마르크스가 폭력의 문제를 재발견 한 것은 바로 이러한 본질적인 거짓으로 부터이며, 국가의 주장과 실제 국가 존재 사이의 불일치에서 부터이다. 사실 주권이란 구체적 현실 안에 있는 국민의 실체가 아니라 다른 공상 세게이기에 실제적이고 구체적이며 경험적인 주권자의 지지를 자신에게 부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이 모순의 자율적 성격을 보지 못했다. 그는 단순한 상부구조만 보았다. 하부영역에 속한 모순들과 계급 대립의 결과를 하나의 덧붙여진 영역으로 옮겨놓은 것이다. 그 때 국가는 계급의 폭력적 도구에 불과하게 된다.
-결 론-
역사는 진보의 역사이다. 진보를 통해서 많은 발전과 성장을 한 것이 사실이다. 많은 물질적 풍요와 업적들을 이룩해 내었다. 더 풍요로운 방향으로 진보했으며, 또 더 많은 것을 얻는 방향으로 진보 했다. 그러나 그 진보의 이면에는 모호성이 존재한다. 발전과 풍요가 있지만 오히려 퇴보하고 후퇴한 것들이 존재한 것이다. 그것은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계몽주의 이성의 힘으로 많은 물질적인 부를 이룬 시점에 일어난 2차 세계대전이라는 인류 최대의 비극적인 참사, 물질적 풍요로움으로 편해진 시점에서 윤리적인 벽들이 허물어져가고 있는 현실은 진보의 이면에 있는 모호성을 보여준다.
본서의 저자는 본서를 통해 이런 모호성과 진보의 관계에 있는 역사의 두 가지 측면을 바라보게 한다. 역사는 진보와 모호성의 역사이며, 진리와 거짓이 공존하는 역사이다. 이런 현실에서 국가는 진리의 잣대를 가지고 앞에서 정치권력을 행사하여 정의와 자유를 부르짖지만 그 뒤에서는 거짓과 폭력이라는 다른 수단을 사용하게 된다. 이런 국가의 한계와 거짓과 폭력 모호성의 상황에 필요한 것은 비폭력적 방법이다. 간디는 비폭력을 통하여 그 가능성을 입증했다. 비폭력은 국가의 모호성과 거짓의 한계에 대한 처방으로 작용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한계를 가지고 있다.
더 필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이다. 또 역사의 주관자 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소망이다. 진리와 거짓, 진보와 모호성이 공존하며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는 것들을 통해 이끌어지는 듯이 보이는 이 역사가 바로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이끌어진다는 사실은 그리스도인들이 반드시 받아들이고 바라보아야 할 소망이다. 그래서 리쾨르는 역사를 진보, 모호성, 소망이라는 말로 표현한 것이다.
역사의 주관자는 하나님이시다. 진보와 애매성, 진리와 거짓이 모순과 부조리, 폭력의 모습으로 보여 져서 어둡고 어쩔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역사의 주관자는 하나님이시다. 종말론적 시각에서 하나님은 구원자로서 완성을 향해 역사를 움직여 가고 계신다. 그러기에 소망이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가슴으로 품고 비폭력의 수준을 넘어선 헌신과 사랑으로 역사 안에서 살아야 하며, 하나님께서 이루실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바라보아야 한다. 그러나 이렇게 바라보는 것에서 그쳐서는 안 된다. 이런 폭력과 억압의 상황에서 모호성이 드러나는 현실에서 비폭력적인 방법으로 매일 같이 죽는 듯이 보이지만 궁극적 승리의 방법인 비폭력 더 나아가 적극적인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을 주창하며 나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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