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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신숙주][신숙주의 생애][신숙주의 업적][신숙주와 긴밀한 교섭관계를 가진 인물][신숙주의 현대적 평가]신숙주의 생애, 신숙주의 업적, 신숙주와 긴밀한 교섭관계를 가진 인물, 신숙주의 현대적 평가 분석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신숙주의 생애

Ⅱ. 신숙주의 업적
1. 『고금운회거요(古今韻會擧要)』에 대한 한글 주음(注音) 사업
2. 『동국정운』 편찬과 신숙주
3. 『홍무정운역훈』 편찬 사업에 참여
4. 『사성통고(四聲通攷)』

Ⅲ. 신숙주와 긴밀한 교섭관계를 가진 인물
1. 세종(1397˜1450)
2. 문종(1414˜1450)
3. 안평대군(1418 ˜1453)
4. 성삼문(1418˜1456)
5. 이개(1417˜1456)
6. 박팽년(1417˜1456)
7. 하위지(1412˜1456)
8. 이석형(1415˜1478)
9. 정인지(1396˜1478)
10. 최항(1409˜1474)
11. 강희안(1417˜1464)
12. 이선로(?˜1453)

Ⅳ. 신숙주의 현대적 평가

참고문헌

본문내용

래 주도적 위치를 차지한 가운데 활발히 움직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5. 이개(14171456)
이개는 사가독서를 함께 하였고, 역시 훈민정음 및 운서 연구에 참여하였으므로 신숙주의 집현전 활동에 있어서 매우 가까운 친구요 동료였다. 그는 이색의 증손이요, 이종선의 손자였는데, 세종 26년 왕을 호종하여 청주에 갔다가 마침 청명 때이므로 왕의 특별한 배려로 홀어머니가 계신 고향 한산(韓山)에 성묘를 위해 다녀올 수 있게 되었다. 그때 함께 왕을 호종한 신숙주는 지를 지어 축하해 주었다.
6. 박팽년(14171456)
박팽년도 역시 사가독서와 훈민정음 연구의 두 가지 면에서 겹치는, 신숙주의 아주 가까운 지우였다. 그는 이개와 더불어 신숙주의 동갑 친구였으나, 과거 합격이 가장 빠르기 때문에 신숙주가 일본에 통신사 서장관으로 가서 박다(博多)에서 사가독서를 함께 한 「산중구우」(山中舊友)들을 그리워하며 시를 띄울 때 박팽년의 이름을 앞세웠던 것이다.
7. 하위지(14121456)
하위지는 사가독서를 함께 한 신숙주의 친구, 동료였다. 그러나 그의 나이가 5년 앞서는 까닭인지 둘 사이의 직접적 교섭을 알려 주는 자료는 잘 나타나지 않는다. 성삼문, 이개, 박팽년과 하위지는 사육신으로서 너무나 유명한 사람들이다.
8. 이석형(14151478)
이석형은 신숙주와 사가독서를 함께 하였으나, 훈민정음과 운서 연구에는 끼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소과와 대과에 걸쳐 3과에 장원을 한 수재였고, 집현전 학사로서 치평요람과 고려사 편찬에 참여하였다. 신숙주는 이석형과 꾸준히 교분을 나누었고, 뒷날 세조 집권 이후에도 두 사람은 시를 주고 받으며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9. 정인지(13961478)
정인지는 신숙주보다 21년이나 연상으로 한 세대 앞선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미 태종 때부터 문명을 드날린 그는 세종 10년 집현전 부제학에 임명되어 이 연구 기관의 성장에 크게 기여한 바 있는데, 세종 말엽 판서로서 예문관 대제학을 겸하여 학술 문화를 대표하는 위치에 올라 훈민정음 창제를 돕는 등 큰 구실을 했다. 세조의 집권을 도왔고, 뒤에 영의정을 역임했다. 신숙주에게 정인지는 어려운 존재였다. 그가 「은부(恩傅)」라고 말했던 점으로 보아 신숙주가 본 과거 시험의 시관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뿐만 아니라 젊은 나이로 왕의 총애를 받으며 문명을 드날리게 된 신숙주로서는 문학의 종사(宗師)로서 대선배인 정인지를 조심스럽게 대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시기 두 사람의 직접적 교유를 말해 주는 자료는 찾기 어렵지만, 뒷날 신숙주가 59세의 나이로 별세하자 80세의 정인지가 쓴 만장(挽章)을 접할 수 있다.
10. 최항(14091474)
최항은 운회의 번역으로부터 시작하여 훈민정음 완성 및 동국정운 편찬에 이르는 일련의 사업에 신숙주와 함께 참여하였다. 신숙주보다 8년 연장이지만, 함께 어울리며 집현전 학사로 활동하고, 예문관 관원도 겸하였으며, 고려사 편찬 사업에 참여하였다. 세조 대 이후의 여러 편찬 사업에서도 활동하였고, 영의정에까지 올랐다. 신숙주와는 일찍부터 교유가 있었다. 그가 일본 통신사 서장관으로 떠날 때 긴 시를 지어 장도를 축하하였고, 성삼문과 더불어 요동으로 황찬을 만나러 갈 때에도 역시 시를 써 주었다. 세조 집권 이후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11. 강희안(14171464)
강희안은 훈민정음 및 운서 연구에 참여하였으나 당시 집현전 학사는 아니었다. 세종의 인척이기도 했던 강희안은 시서화에 뛰어난 인재였고, 세종 대 말엽에는 집현전 직제학에 임용되어 학사로서 근무하였다. 신숙주와는 매우 절친한 사이여서 집현전 학사 시절 그가 강희안에게 시를 써 보내기도 했다. 세조 집권 이후 강희안은 근신하는 자세를 취하며 관찰사에까지 오르는데, 신숙주는 그에게 그림을 부탁해 10첩 병풍을 만든 일도 있었다.
12. 이선로(?1453)
집현전 학사로서 훈민정음 및 운서 연구에 참여했던 이선로는 곧 병조정랑으로 전직되었다가 죄를 짓고 유배되었다. 단종 즉위 초에 다시 관직에 나갔으나 안평대군의 측근에서 활약하다가 계유정난 때 죽음을 당하였다. 신숙주와는 별다른 교분이 없었던 것 같다.
Ⅳ. 신숙주의 현대적 평가
신숙주는 정치가로서 특히 세조, 예종, 성종 초에 이르는 기간에 큰 공적을 세웠지만, 그에 못지않게 학자로서도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 세종의 훈민정음 곧 한글 창제에 대표적인 협찬자로서 『훈민정음(해례본)』을 편찬하고 거의 동시에 착수된 것으로 보이는 『동국정운(東國正韻)』과 『홍무정운역훈(洪武正韻譯訓)』의 편찬에 중심 인물로 참여하고, 스스로 『사성편고(四聲便攷)』를 편찬하여 『홍무정운역훈』의 앞에 수록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언어 정책과 관련된 업적 이외에 세조 이후로 별세할 때까지 스스로 편찬한 서적이 있는가 하면, 나라에서 서적을 편찬하는 데 거의 다 참여하였다. 『직해동자습(直解童子習)』, 『예기(禮記)』, 『어제무경(御製武經)』의 번역과 구결, 실록과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국조보감(國朝寶鑑)』, 『동국통감(東國通鑑)』 등 역사, 『오례의(五禮儀)』, 『경국대전(經國大典)』 등 의례와 법전, 『북정록』, 『병장설(兵將說)』, 『해동제국기(海東諸國紀)』 등 군사 및 외교에 관한 서적의 편찬 등이다. 사후에 한 아들이 편찬하여 성종이 간행하도록 한 문집 『보한재집』(17권)은 문필가로서의 모습을 남김없이 보여주지만, 학자로서의 그의 성실성과 박학을 보이는 글도 없지 않다. 여러 분야에 걸쳐 해박한 식견을 가진 학자가 아니고서는 하지 못할 업적이 아닐 수 없다.
참고문헌
박덕규(1995) : 신숙주 평전, 도서출판 둥지
박현모(2003) : 세종, 실록 밖으로 행차하다, 푸른역사
박경희(1983) : 해동제국기에 나타난 신숙주의 대일인식, 이화여자대학교 석사학위논문
신숙주(2004) : 신숙주, 해동제국기, 범우사
최승희(1966,1967) : 집현전 연구, 역사학보 32, 33
한영국(2002) : 보한재 신숙주의 학문과 업적 중(中) - 조선 초기 대일통교와 신숙주, 한국어문교육연구회
한영우(1981) : 조선 전기 사학사 연구, 서울대학교 출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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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9.04.19
  • 저작시기2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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