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제1막 안티고네
제2막 스파르타쿠스
제3막 프로메테우스
제4막 프로스페로
제5막 넬슨 왕
제2막 스파르타쿠스
제3막 프로메테우스
제4막 프로스페로
제5막 넬슨 왕
본문내용
5월 10일, 전 세계의 텔레비전 시청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넬슨 만델라는 대통령에 취임한다. 그는 프리토리아의 거대한 대통령 집무실에 들어서면서 예의 그 거부할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백인 직원들과 악수를 나누고, 단 한 사람도 해고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했다. 그들은 자신의 이름과 가족에 대해서까지 알고 있는 이 친절한 노신사를 위해 헌신적으로 일했다. 프레데릭 데 클레르크가 자신의 비망록에서도 언급했듯이, 만델라는 자신과 접촉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를 특별한 존재로 느끼게 만드는 천부적인 재능을 지녔다. 이 재능이 바로 카리스마라고 불리는 자질이다. 그는 특히 중대한 일에서 이 능력을 잘 발휘했다.
아부의 물결이 도처에서 밀려오는데도 만델라가 진정한 민주주의자로 남을 수 있었다는 것은 그의 영웅적인 면모이다. 우리는 수카르노부터 카스트로까지 위대한 혁명가들이 절대 권력의 달콤한 묘약을 마시는 것을 보아왔다. 하지만 만델라는 과거의 적수에 대해서도 선입견 없는 검토로 인사를 단행했다. 국민당과의 합의문에 따라 프레데릭 데 클레르크가 제2부통령이 되었고, 제1부통령은 아프리카 국민회의를 이끌었던 외교관이자 경제학자였던 나보 음베키가 임명되었다. 그리고 이 다인종국가 의회의 의장은 훌륭한 재능을 갖춘 여성 변호사인 프린 진왈라가 되었다. 의회는 사형 제도를 폐지했고, 아파르트헤이트 체제를 이끌었던 아프리카너의 언어와 문화에 대한 보장도 승인했다. 또한 헌법재판소는 대통령의 초기 결정 가운데 두 가지에 대해 불신임 결의를 할 정도로 아주 독립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신임 대통령은 아프리카인들의 화해에 특별히 신경을 썼다. 그는 자신을 수십 년 동안 감옥에 가둔 장본인인 옛 대통령 피터르 빌렘 보타를 방문하고, 자신을 교수형에 처하려 했던 검사 퍼시 유타를 식사에 초대했다. 일각에서는 이러한 태도에 대해 만델라의 정치적 전략이라고 평가하지만, 여하튼 만델라는 용서를 통해 권력을 공고히 했으며 모두에게 바람의 방향이 바뀌었음을 상기시켰다. 그러나 만델라의 관대함은 복수의 가장 미묘한 형태들을 배제하지 않았다. 그는 노동력을 헐값으로 이용한 예전의 부유한 인종주의자들에게 점잖게 벌금을 물리는 데 각별한 재능을 보였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진정한 화해는 한 개인의 선의에 의해서만 좌우될 수는 없었다.
아파르트헤이트 체제에서 일어난 범죄는 너무나 많고 잔학해서 독일인들이 나치를 청산했듯 그 범죄를 정리할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그런데 새롭게 탄생한 남아프리카는 용서와 관용에 기반을 둔 과거 청산으로 전 세계에 평화와 상생의 메시지를 전파하게 된다. 만델라는 법학 교수인 카데르 이스말의 제안을 받아들여, ‘국민 통합의 증진과 화해를 위한 법’을 국회에 제출했다. 그것은 인권의 유린이나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이 사면을 요청할 수 있도록 규정하되, 단 철저히 고백한다는 조건이 따르는 것이었다. 투투 대주교는 일종의 청문회라고 할 수 있는 이 공적 고백을 성공시켜 많은 사람들의 상처를 치유했다. 범죄의 행위자와 희생자들의 만남은, 범죄자들에게는 자신이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를 자각하는 기회를 제공했고, 희생자들 특히 수많은 사형수들의 부모들에게는 과거의 상처를 딛고 마침내 다시 살아갈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78세 생일을 맞은 넬슨 만델라는 무대 위의 조연에 불과한 듯 행동했다. 그는 임기가 끝나가자 부통령인 음베키로 하여금 국무회의를 주재하게 하고 여러 당면문제들과 방문객들을 떠넘겼다. 문제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넬슨 만델라가 감옥에서 꿈꾸었던 법치국가는 깊이 뿌리를 내려 이제 독재정치나 쿠데타는 상상하기조차 힘들게 되었다. 제도는 정상적으로 운용되고, 언론은 완전히 자유로워졌다. 모든 종교들은 조화를 이루며 공존했고 에이즈를 퇴치하기 위한 진지한 싸움이 드디어 시작되었다. 백인과 흑인 학생들에게 할애되는 공교육 자금도 10대 1에서 5대 1로 그 간극이 좁혀졌고, 문맹률도 절반이나 줄어들었다. 사형제도는 폐지되었으며, 동성애의 권리가 인정되었다. 900만 명의 시민들이 식수를 공급받게 되었고, 3, 4백만에 이르는 흑인 증산층은 세계 경제에 이 나라가 편입되었음을 입증시켰다.
퇴임이 가까워오면서 만델라는 회고록 제2권을 집필하기 시작했고, 직무와 위신 때문에 침묵해야 했던 문제에 대해 드디어 자유롭게 말하는 기쁨을 얻은 듯했다.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이라크 문제에 대해 중재의 노력을 계속했다. 미국이 유엔을 경시하는 태도를 드러내 보이는 것에 충격을 받은 그는 조지 부시에 대해 “올바르게 생각하는 것이 불가능한 사람”이라며 비난했다. 또한 독재 지배하의 나이지리아를 비판했고, 민주주의를 향한 진전을 거부하고 있는 스와질란드와 잠비아에 대한 제재를 제안하는 데 거침이 없었다. 백인에 대한 정책이 자신의 나라와는 정반대인 이웃 나라의 무가베 정권에 대해서는 어떠한 원조도 거부했다. 그리고 불행히도 실패했지만 콩고 강 하구에 내린 남아프리카 전함의 선상에서 모부투-카빌라 간의 회담을 주선해 자이레르의 파산을 최소화하려 하기도 했다.
1999년 대통령의 지위에서 물러난 이후에도 만델라는 에이즈, 아동 인권, 아프리카 기아 등 전 지구적인 사회문제 해결을 위해 열정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러한 만델라를 남아프리카공화국 국민들은 일종의 수호신처럼 여긴다. 그들은 일상생활에서 접할 수 있는 많은 것들, 즉 냉장고에 부착하는 자석, 컵받침, 시계 등에 만델라의 초상을 새겨놓고 그를 기린다. 그의 85세 생일날, 대기업들은 남아프리카 대로를 따라 늘어선 그들의 광고 게시판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그 다음 날에는 사람들이 시내의 두 곳을 연결하는 ‘넬슨 만델라 다리’ 준공식을 거행했다. 신이 그에게 90세까지의 삶을 허락하신다면, 사람들은 그의 생일을 기념하기 위해 또 무엇인가를 기획할 것이다. “내가 가야 할 머나먼 여정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감히 꾸물거릴 틈이 없다.”라고 만델라 스스로 고백한 바와 같이 89세의 생일을 지낸 지금도 그는 계속해서 세상을 뛰어다니고 있다. 강제노역으로 햇빛에 손상된 눈과 절름거리는 다리의 병도 잊은 채로 말이다.
아부의 물결이 도처에서 밀려오는데도 만델라가 진정한 민주주의자로 남을 수 있었다는 것은 그의 영웅적인 면모이다. 우리는 수카르노부터 카스트로까지 위대한 혁명가들이 절대 권력의 달콤한 묘약을 마시는 것을 보아왔다. 하지만 만델라는 과거의 적수에 대해서도 선입견 없는 검토로 인사를 단행했다. 국민당과의 합의문에 따라 프레데릭 데 클레르크가 제2부통령이 되었고, 제1부통령은 아프리카 국민회의를 이끌었던 외교관이자 경제학자였던 나보 음베키가 임명되었다. 그리고 이 다인종국가 의회의 의장은 훌륭한 재능을 갖춘 여성 변호사인 프린 진왈라가 되었다. 의회는 사형 제도를 폐지했고, 아파르트헤이트 체제를 이끌었던 아프리카너의 언어와 문화에 대한 보장도 승인했다. 또한 헌법재판소는 대통령의 초기 결정 가운데 두 가지에 대해 불신임 결의를 할 정도로 아주 독립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신임 대통령은 아프리카인들의 화해에 특별히 신경을 썼다. 그는 자신을 수십 년 동안 감옥에 가둔 장본인인 옛 대통령 피터르 빌렘 보타를 방문하고, 자신을 교수형에 처하려 했던 검사 퍼시 유타를 식사에 초대했다. 일각에서는 이러한 태도에 대해 만델라의 정치적 전략이라고 평가하지만, 여하튼 만델라는 용서를 통해 권력을 공고히 했으며 모두에게 바람의 방향이 바뀌었음을 상기시켰다. 그러나 만델라의 관대함은 복수의 가장 미묘한 형태들을 배제하지 않았다. 그는 노동력을 헐값으로 이용한 예전의 부유한 인종주의자들에게 점잖게 벌금을 물리는 데 각별한 재능을 보였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진정한 화해는 한 개인의 선의에 의해서만 좌우될 수는 없었다.
아파르트헤이트 체제에서 일어난 범죄는 너무나 많고 잔학해서 독일인들이 나치를 청산했듯 그 범죄를 정리할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그런데 새롭게 탄생한 남아프리카는 용서와 관용에 기반을 둔 과거 청산으로 전 세계에 평화와 상생의 메시지를 전파하게 된다. 만델라는 법학 교수인 카데르 이스말의 제안을 받아들여, ‘국민 통합의 증진과 화해를 위한 법’을 국회에 제출했다. 그것은 인권의 유린이나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이 사면을 요청할 수 있도록 규정하되, 단 철저히 고백한다는 조건이 따르는 것이었다. 투투 대주교는 일종의 청문회라고 할 수 있는 이 공적 고백을 성공시켜 많은 사람들의 상처를 치유했다. 범죄의 행위자와 희생자들의 만남은, 범죄자들에게는 자신이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를 자각하는 기회를 제공했고, 희생자들 특히 수많은 사형수들의 부모들에게는 과거의 상처를 딛고 마침내 다시 살아갈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78세 생일을 맞은 넬슨 만델라는 무대 위의 조연에 불과한 듯 행동했다. 그는 임기가 끝나가자 부통령인 음베키로 하여금 국무회의를 주재하게 하고 여러 당면문제들과 방문객들을 떠넘겼다. 문제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넬슨 만델라가 감옥에서 꿈꾸었던 법치국가는 깊이 뿌리를 내려 이제 독재정치나 쿠데타는 상상하기조차 힘들게 되었다. 제도는 정상적으로 운용되고, 언론은 완전히 자유로워졌다. 모든 종교들은 조화를 이루며 공존했고 에이즈를 퇴치하기 위한 진지한 싸움이 드디어 시작되었다. 백인과 흑인 학생들에게 할애되는 공교육 자금도 10대 1에서 5대 1로 그 간극이 좁혀졌고, 문맹률도 절반이나 줄어들었다. 사형제도는 폐지되었으며, 동성애의 권리가 인정되었다. 900만 명의 시민들이 식수를 공급받게 되었고, 3, 4백만에 이르는 흑인 증산층은 세계 경제에 이 나라가 편입되었음을 입증시켰다.
퇴임이 가까워오면서 만델라는 회고록 제2권을 집필하기 시작했고, 직무와 위신 때문에 침묵해야 했던 문제에 대해 드디어 자유롭게 말하는 기쁨을 얻은 듯했다.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이라크 문제에 대해 중재의 노력을 계속했다. 미국이 유엔을 경시하는 태도를 드러내 보이는 것에 충격을 받은 그는 조지 부시에 대해 “올바르게 생각하는 것이 불가능한 사람”이라며 비난했다. 또한 독재 지배하의 나이지리아를 비판했고, 민주주의를 향한 진전을 거부하고 있는 스와질란드와 잠비아에 대한 제재를 제안하는 데 거침이 없었다. 백인에 대한 정책이 자신의 나라와는 정반대인 이웃 나라의 무가베 정권에 대해서는 어떠한 원조도 거부했다. 그리고 불행히도 실패했지만 콩고 강 하구에 내린 남아프리카 전함의 선상에서 모부투-카빌라 간의 회담을 주선해 자이레르의 파산을 최소화하려 하기도 했다.
1999년 대통령의 지위에서 물러난 이후에도 만델라는 에이즈, 아동 인권, 아프리카 기아 등 전 지구적인 사회문제 해결을 위해 열정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러한 만델라를 남아프리카공화국 국민들은 일종의 수호신처럼 여긴다. 그들은 일상생활에서 접할 수 있는 많은 것들, 즉 냉장고에 부착하는 자석, 컵받침, 시계 등에 만델라의 초상을 새겨놓고 그를 기린다. 그의 85세 생일날, 대기업들은 남아프리카 대로를 따라 늘어선 그들의 광고 게시판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그 다음 날에는 사람들이 시내의 두 곳을 연결하는 ‘넬슨 만델라 다리’ 준공식을 거행했다. 신이 그에게 90세까지의 삶을 허락하신다면, 사람들은 그의 생일을 기념하기 위해 또 무엇인가를 기획할 것이다. “내가 가야 할 머나먼 여정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감히 꾸물거릴 틈이 없다.”라고 만델라 스스로 고백한 바와 같이 89세의 생일을 지낸 지금도 그는 계속해서 세상을 뛰어다니고 있다. 강제노역으로 햇빛에 손상된 눈과 절름거리는 다리의 병도 잊은 채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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