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서론
2. 본론 - <목민심서>의 내용
1) 부임육조
2) 율기육조
3) 봉공육조
4) 애민육조
5) 이전육조
6) 호전육조
7) 예전육조
8) 병전육조
9) 형전육조
10) 공전육조
11) 진황육조
12) 해관육조
3. 결론 및 후기
2. 본론 - <목민심서>의 내용
1) 부임육조
2) 율기육조
3) 봉공육조
4) 애민육조
5) 이전육조
6) 호전육조
7) 예전육조
8) 병전육조
9) 형전육조
10) 공전육조
11) 진황육조
12) 해관육조
3. 결론 및 후기
본문내용
수 없는 일이라 한다. 마지막으로
“입소에 있으면서 몸이 죽어서 맑은 향기가 더욱 강렬하며 아전과 백성이 슬퍼하며
상여를 붙잡고 호곡하여 오래되어도 능히 잊지 못하는 것은 어진 목민관의 마침이다.”
에 나타나듯 백성을 위해 목민관이 직무수행을 너무 열심히 하다가 병으로 숨졌다면 백성들의 슬픔은 호곡으로 이어질 것이고 길이 그 고장에 이름을 기억되게 할 것이라 말한다. 또한 수령이 떠난 뒤 업적을 기리려고 공훈을 잊을 수 없어 사당을 세우고 선정비를 세우며 사또의 성을 따서 많은 백성이 자식들의 이름을 짓는다면 명예스럽고 이름이 오래 고을과 나라사적에 기록될 것이라고 정약용은 말하고 있다.
Ⅲ. 결론 및 후기
목민관이라 함은 예전에 백성과 함께 고락을 같이 하던 어버이와 같은 존재였다. 임금과 백성의 중간의 위치에서 임금을 대신해 백성을 보살피던 관리자로서 그 책임은 막중하고도 중요한 것이었다. 다산 정약용 선생은 일찍이 목민관을 지낸 아버지를 따라 여러 지방을 다니면서 백성들의 삶을 주의 깊게 살펴볼 기회를 가졌다. 뿐만 아니라 자신이 목민관과 암행어사로 지내면서 겪은 경험들과 약 20년간의 유배생활을 지내며 백성들의 고통과 부패한 관리들의 모습을 직접 느끼게 되었고 <목민심서>를 통해 이러한 문제를 해결해 보고자 하였을 것이다.
조선 후기에 써진, 1978년에 번역된 낡은 책을 읽으며 이 시대의 생활이나 지금 현실의 생활이나 크게 다를 바가 없는 것은 아닌지 느꼈다. 다산 선생은 첫 부임 행장이 최대한 검소해야 함을 강조한다. 그 당시 관직에 오른 사람들이 휘황찬란하게 부임하는 데에 대한 비판인 것이다. 지금 현실 또한 마찬가지이다. 얼마 전에 끝난 대통령 선거에서 큰 표 차이로 당선된 이명박 당선자에게 방탄 기능이 갖추어진 벤츠가 제공되었다. 대통령으로서의 업무가 시작되기도 전에 벌써 호사스러운 물질의 유혹이 시작되는 것이다. 다행인지 이명박 당선자는 벤츠를 거절하고 국내 카니발 리무진을 타고 당선자로서의 첫 행사를 치렀다.
또한 공직자의 자세에 대하여 백성을 정중하게 대하고 술과 여색을 끊고 유흥에 빠지지 말며, 뇌물은 결국 다 드러나게 되니 금하라고 말하고 있다. 지금의 공직자들에게도 강력히 요구되는 내용이 아닌가 생각된다. 국회의원의 여기자 성추행 사건이나 몇 달 전만 해도 전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신정아-변양균 사건만 해도 그러하다. 국회의원, 대학 교수, 청와대 비서실장이라는 지위를 이용해 여러 비리를 저지르고 국민을 속이는 이러한 행위는 다산 선생이 가장 우려했던 일들이 아닌가 생각한다.
한편 다산 선생은 사회 복지에 대해서도 깊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흉년이 닥쳐서 허덕이는 것 보다 그에 미리 대비해야 함을 강조하며, 재해로 인한 백성들을 구호하는 데에도 만전을 기울여야 함을 말한다. 이러한 기근구제 정치는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 우리는 어떠한가. 태안 앞 바다, 나아가 서해 대부분이 기름 유출로 인해 피해를 호소하고 있다. 물론 자연 생태계의 피해가 가장 극심하고 중요한 문제이기는 하지만 그곳의 어민들과 주민들 대부분이 생계적인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 또한 커다란 문제이다. 그곳 주민들에게는 당장 먹고 살아가는 일이 시급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국가에서는 누가 보상을 해야 하는가의 문제에 급급하며, 보상에 있어서 절차적인, 방법적인 문제들을 제기한다. 국민의 대표로 이루어진 국회에서는 이러한 국민들의 절실한 문제들을 뒤로한 채 대통령 선거에서 이기기 위한 치열한 몸싸움만을 해대고 있는 것이었다. 재민구호는 시기에 적절해야하고 규모도 적정해야 한다는 다산 선생의 말이 절실히 느껴지는 시점이다.
다산 선생의 <목민심서>는 공직자가 백성들을 다스리는 방법에 대한 내용이기는 하지만 일반 사람들에게도 중요한 내용들을 많이 담고 있다. 양로와 효도와 같은 도덕적인 내용은 물론 형편이 어려워져서 아이를 버리는 문제에 대해서도 말한다. 이러한 내용들은 마치 다산 선생이 미래를 내다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할 정도로 지금 현실과 흡사해서 깜짝 놀랐다. 물론 형편 때문에 아이를 내다 버리는 일은 거의 없다 하겠지만 미혼모의 아이문제나 부부의 불화로 인해 아이를 버리는 문제는 지금도 심각한 문제임이 틀림없다. 양로나 효도의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예전 동화에서나 들어본 고려장이 현재에는 업그레이드되어 행해지고 있다. 말도 통하지 않는 필리핀 같은 곳에 부모를 데리고 가서 그 곳에 방치해 두는 일들이 발생하기도 하며, 늙은 노인을 노예 부리듯이 부리면서 국가에서 나오는 연금마저 빼앗아 쓰는 파렴치한 사건은 이제 아주 유명한 사건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다산 선생은 그 당시 과거에 얽매여서 글을 읽는 데에만 주력하는 학교의 교육을 비판했다. 이 문제 또한 요즘과 똑같은 문제이다. 학교에서 행해지는 교육은 언제부터인가 수능을 위한 교육이 되어가기 시작했다. 학교에서 교과서는 뒤로한 채 시중에서 파는 문제집으로 수업하는 일이 비일비재하고, 내신 성적을 위해 문제를 다 알려주고 시험을 치는 등의 일들이 발생하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특수목적고나 자립형 사립고 등도 그 본래의 목적을 잃고 좋은 대학에 가기위한 수단으로 전락해 가고 있다. 이러한 공교육에 대한 불신으로 인해 점점 사교육에 기대게 되는 학생들이 늘게 되고, 그로인해 얼마 전에 발생한 경기지역 외고 문제 유출 사건과 같은 일들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현대의 공무원상은 국민의 심부름꾼이라는 명목에서 벗어나 국민 위에 존재하며 조그마한 권력도 어떻게든 크게 보여 자신의 명성을 높이고 남 앞에 자랑하려 드는 쪽으로 기울어 가고 있다. 또한 강한 자에게는 비비며 약한 자를 대할 때는 인정사정없이 함부로 행한다. 그리하여 모든 부정부패는 공무원에서부터 시작된다는 말을 실감케 해준다. 권력 있는 자에게는 너그럽고 가진 것 없는 자에게는 한없이 위엄을 떠는 공무원상. 이것은 단지 어제 오늘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몇 백 년을 이렇게 이어져 온 것이다. 물론 모든 공무원이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몇 안 되는 공무원이 전체 공무원의 이미지를 이렇게 만들어 버린 것이기는 할 것이다.
“입소에 있으면서 몸이 죽어서 맑은 향기가 더욱 강렬하며 아전과 백성이 슬퍼하며
상여를 붙잡고 호곡하여 오래되어도 능히 잊지 못하는 것은 어진 목민관의 마침이다.”
에 나타나듯 백성을 위해 목민관이 직무수행을 너무 열심히 하다가 병으로 숨졌다면 백성들의 슬픔은 호곡으로 이어질 것이고 길이 그 고장에 이름을 기억되게 할 것이라 말한다. 또한 수령이 떠난 뒤 업적을 기리려고 공훈을 잊을 수 없어 사당을 세우고 선정비를 세우며 사또의 성을 따서 많은 백성이 자식들의 이름을 짓는다면 명예스럽고 이름이 오래 고을과 나라사적에 기록될 것이라고 정약용은 말하고 있다.
Ⅲ. 결론 및 후기
목민관이라 함은 예전에 백성과 함께 고락을 같이 하던 어버이와 같은 존재였다. 임금과 백성의 중간의 위치에서 임금을 대신해 백성을 보살피던 관리자로서 그 책임은 막중하고도 중요한 것이었다. 다산 정약용 선생은 일찍이 목민관을 지낸 아버지를 따라 여러 지방을 다니면서 백성들의 삶을 주의 깊게 살펴볼 기회를 가졌다. 뿐만 아니라 자신이 목민관과 암행어사로 지내면서 겪은 경험들과 약 20년간의 유배생활을 지내며 백성들의 고통과 부패한 관리들의 모습을 직접 느끼게 되었고 <목민심서>를 통해 이러한 문제를 해결해 보고자 하였을 것이다.
조선 후기에 써진, 1978년에 번역된 낡은 책을 읽으며 이 시대의 생활이나 지금 현실의 생활이나 크게 다를 바가 없는 것은 아닌지 느꼈다. 다산 선생은 첫 부임 행장이 최대한 검소해야 함을 강조한다. 그 당시 관직에 오른 사람들이 휘황찬란하게 부임하는 데에 대한 비판인 것이다. 지금 현실 또한 마찬가지이다. 얼마 전에 끝난 대통령 선거에서 큰 표 차이로 당선된 이명박 당선자에게 방탄 기능이 갖추어진 벤츠가 제공되었다. 대통령으로서의 업무가 시작되기도 전에 벌써 호사스러운 물질의 유혹이 시작되는 것이다. 다행인지 이명박 당선자는 벤츠를 거절하고 국내 카니발 리무진을 타고 당선자로서의 첫 행사를 치렀다.
또한 공직자의 자세에 대하여 백성을 정중하게 대하고 술과 여색을 끊고 유흥에 빠지지 말며, 뇌물은 결국 다 드러나게 되니 금하라고 말하고 있다. 지금의 공직자들에게도 강력히 요구되는 내용이 아닌가 생각된다. 국회의원의 여기자 성추행 사건이나 몇 달 전만 해도 전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신정아-변양균 사건만 해도 그러하다. 국회의원, 대학 교수, 청와대 비서실장이라는 지위를 이용해 여러 비리를 저지르고 국민을 속이는 이러한 행위는 다산 선생이 가장 우려했던 일들이 아닌가 생각한다.
한편 다산 선생은 사회 복지에 대해서도 깊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흉년이 닥쳐서 허덕이는 것 보다 그에 미리 대비해야 함을 강조하며, 재해로 인한 백성들을 구호하는 데에도 만전을 기울여야 함을 말한다. 이러한 기근구제 정치는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 우리는 어떠한가. 태안 앞 바다, 나아가 서해 대부분이 기름 유출로 인해 피해를 호소하고 있다. 물론 자연 생태계의 피해가 가장 극심하고 중요한 문제이기는 하지만 그곳의 어민들과 주민들 대부분이 생계적인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 또한 커다란 문제이다. 그곳 주민들에게는 당장 먹고 살아가는 일이 시급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국가에서는 누가 보상을 해야 하는가의 문제에 급급하며, 보상에 있어서 절차적인, 방법적인 문제들을 제기한다. 국민의 대표로 이루어진 국회에서는 이러한 국민들의 절실한 문제들을 뒤로한 채 대통령 선거에서 이기기 위한 치열한 몸싸움만을 해대고 있는 것이었다. 재민구호는 시기에 적절해야하고 규모도 적정해야 한다는 다산 선생의 말이 절실히 느껴지는 시점이다.
다산 선생의 <목민심서>는 공직자가 백성들을 다스리는 방법에 대한 내용이기는 하지만 일반 사람들에게도 중요한 내용들을 많이 담고 있다. 양로와 효도와 같은 도덕적인 내용은 물론 형편이 어려워져서 아이를 버리는 문제에 대해서도 말한다. 이러한 내용들은 마치 다산 선생이 미래를 내다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할 정도로 지금 현실과 흡사해서 깜짝 놀랐다. 물론 형편 때문에 아이를 내다 버리는 일은 거의 없다 하겠지만 미혼모의 아이문제나 부부의 불화로 인해 아이를 버리는 문제는 지금도 심각한 문제임이 틀림없다. 양로나 효도의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예전 동화에서나 들어본 고려장이 현재에는 업그레이드되어 행해지고 있다. 말도 통하지 않는 필리핀 같은 곳에 부모를 데리고 가서 그 곳에 방치해 두는 일들이 발생하기도 하며, 늙은 노인을 노예 부리듯이 부리면서 국가에서 나오는 연금마저 빼앗아 쓰는 파렴치한 사건은 이제 아주 유명한 사건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다산 선생은 그 당시 과거에 얽매여서 글을 읽는 데에만 주력하는 학교의 교육을 비판했다. 이 문제 또한 요즘과 똑같은 문제이다. 학교에서 행해지는 교육은 언제부터인가 수능을 위한 교육이 되어가기 시작했다. 학교에서 교과서는 뒤로한 채 시중에서 파는 문제집으로 수업하는 일이 비일비재하고, 내신 성적을 위해 문제를 다 알려주고 시험을 치는 등의 일들이 발생하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특수목적고나 자립형 사립고 등도 그 본래의 목적을 잃고 좋은 대학에 가기위한 수단으로 전락해 가고 있다. 이러한 공교육에 대한 불신으로 인해 점점 사교육에 기대게 되는 학생들이 늘게 되고, 그로인해 얼마 전에 발생한 경기지역 외고 문제 유출 사건과 같은 일들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현대의 공무원상은 국민의 심부름꾼이라는 명목에서 벗어나 국민 위에 존재하며 조그마한 권력도 어떻게든 크게 보여 자신의 명성을 높이고 남 앞에 자랑하려 드는 쪽으로 기울어 가고 있다. 또한 강한 자에게는 비비며 약한 자를 대할 때는 인정사정없이 함부로 행한다. 그리하여 모든 부정부패는 공무원에서부터 시작된다는 말을 실감케 해준다. 권력 있는 자에게는 너그럽고 가진 것 없는 자에게는 한없이 위엄을 떠는 공무원상. 이것은 단지 어제 오늘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몇 백 년을 이렇게 이어져 온 것이다. 물론 모든 공무원이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몇 안 되는 공무원이 전체 공무원의 이미지를 이렇게 만들어 버린 것이기는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