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윤동주의 생애
윤동주의 출생
출생지의 배경
항일 운동의 고장
학창 시절
항일 정신이 싹트다
연희전문학교 시절
교우 관계
정병욱씨의 회고
윤동주 시인에게 많은 영향을 준 분들
일본 유학
패전을 앞둔 일본
체포되는 시인 윤동주
죽음으로 몰고가는 잔악한 고문
후쿠오카 형무소에서의 옥사
악랄한 생체실험의 모르모트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나오기까지
윤동주의 출생
출생지의 배경
항일 운동의 고장
학창 시절
항일 정신이 싹트다
연희전문학교 시절
교우 관계
정병욱씨의 회고
윤동주 시인에게 많은 영향을 준 분들
일본 유학
패전을 앞둔 일본
체포되는 시인 윤동주
죽음으로 몰고가는 잔악한 고문
후쿠오카 형무소에서의 옥사
악랄한 생체실험의 모르모트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나오기까지
본문내용
우러러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잎새에 이는 바람에도나는 괴로워했다.
이 결백, 이 순수, 이 열정의 기도가 허무하게 무너지던 날…… 시인의 눈은 차마 감기지가 않았을 것이다.
윤동주의 무덤은 북간도 뒷동산에 있다. (용정 동산) 세월이 흘러도 말이 없는 고독한 비목(碑木)―이제는 갈래야 갈 수조차 없는 금단의 지역이 된 그곳, 시인의 별은 북녘 하늘에 홀로 빛나고 있다.
그의 뜨거웠던 나라 사랑, 겨레 사랑의 참뜻을 모르는 이에게까지도 그 무덤은 살아서 속삭이고 그의 시는 영원히 향수처럼 나부낄 것이다.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나오기까지
해방 후 동주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햇빛을 볼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그의 단짝 친구였던 정병욱 덕분이었다.
1947년 2월 16일, 그의 유족과 친지들이 모여 첫 추도회를 했었다. 1948년 정음사 최영해 사장의 호의로 첫 시집이 상재되었다. 1955년 그의 10주기를 맞아 시집의 증보판을 간행했었다. 1967년 제3판 시집이 햇빛을 보게 되자 세상은 그에 대한 시각과 평가를 완전히 달리했었다.
'무시무시한 고독에서 죽었고나! 29세가 되도록 시도 발표하여 본 적이 없이!' ― 이것은 시집 초판(1948년)의 서문에서 정지용이 내뱉은 경탄이었다.
'아직 무릎을 꿇을 만한 기력이 남았기에 나는 이 붓을 들어 시인 윤동주의 유고에 분향하노라.'
'내가 한국 신문학사를 서술하는데 있어서 일제 말기의 한 대목 즉 1941년 이후 5년간을 <암흑기>라고 부른 데 대하여, 어느 젊은 작가가 불만을 표시한 일이 있었다.
시인 윤동주가 있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붙일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차라리 레지스탕스의 시기라도 말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하는 내용을 대화한 일이 있었다.
그때 나는 그의 충고를 솔직하게 받아들였고 다음번엔 개정판을 낼 때에는 기어이 그런 의사를 반영시켜서 제목을 바꾸리라고 마음먹었다. ……<중략> 그 뒤 이 시인의 가치가 날로 밝혀져 가는데 따라서 기성의 문학사의 내용을 새로 써야 하게 될 만큼 그 존재는 뚜렷해지고 있다.'
이것은 윤동주의 시집 증보판(1967년) 부록에 실린 평론가 백철 박사의 글이다.
여기에서 빠뜨릴 수 없는 사항은 윤동주의 시집이 엮어져 나오기까지의 과정이다.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원고는 3부로 정리되었는데 그 하나는 윤동주 자신이 가졌고 다른 한 부는 이양하 선생이, 남은 한 부는 정병욱씨가 보관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선 시집에 실린 19편 중에서 제일 마지막에 쓴 시가 <별 헤는 밤>이었다. 1941년 11월 5일자, 그리고 <서시>는 11월 20일자로 되어 있다.
짐작건대 <별 헤는 밤>을 쓰고 난 동주는 자선 시집을 만들어 졸업 기념으로 출판하려 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친필로 쓴 원고를 손수 제본을 하고 그 가운데서 한 부를 정병욱씨에게 건네면서 시집의 제목이 길어진 이유를 설명하기도 했었다.
처음엔 시집 제목을 '병원'으로 하려 했던 모양이다.
이유는 간단했다. 세상이 온통 환자 투성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환자들은 병원을 찾아가야 병을 고친다. 병원은 환자의 병을 고치기 위해서 있는 곳이다. 그래서 '병원'을 선택하려 했었다는 그의 설명은 꽤 명분과 설득력이 있는 것으로 여겨졌었다.
처음에 이양하 선생은 출판을 만류했었다.
작품 가운데 <십자가><슬픈 족속><또 다른 고향> 등이 일제 관헌의 검열에 걸릴 것을 염려했을 뿐 아니라 동주의 신변에 위험이 닥칠 것을 미리 염려한 때문이었다.
그것은 지극한 사제간의 정리(情理)와 사랑이 빚은 충고였다. 동주는 그것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실망의 빛을 보이지도 않았다. 그에게도 세상을 내다보는 눈은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스스로 위안을 자신의 안에서 찾았다. <간>도 그 무렵에 쓴 작품이었다.
시인의 치열한 정신의 내공은 언어 이전의 분노와 달관을 수반하는 것이었다. <참회록>을 쓴 것이 1942년 1월 24일자. 어쩌면 이 작품이 그가 도일하기 전, 고국에서 마지막 쓴 작품인지도 모른다.
그 뒤 모든 사태는 뒤바뀌고 사물의 원형은 산산조각이 났다.
동주가 맡긴 시고 가운데서 정병욱씨에게 건넨 작품만이 살아남아 1948년 정음사에서 펴내게 되었던 것이다.
정병욱씨는 동주가 검거된 지 반 년 후에 학병으로 끌려 나갔다. 그는 동주의 시고를 그의 어머니에게 맡기고 동주가 살아 올 때까지 소중히 지켜 주기를 당부했었다.
만약에 동주나 자기가 죽어서 돌아올 수 없게 되거나 조국이 광복을 맞이했을 때는 그 시고를 연희전문학교에 보내서 세상에 알리도록 해 달라고 유언을 남기듯 하며 떠났던 것이었다. 해방이 되고 다행히 그는 살아서 무사히 귀가하였다. 그때 어미니는 명주 보자기로 겹겹이 싸서 간직한 동주의 시고를 자랑스럽게 내놓으셨다.
이것이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세상에 널리 알려지고 밝은 햇빛을 보게 되기까지의 경위이다.
동주의 시들이 일본에서 정병욱 등 친구와 가족에게 발송되고 또 아슬아슬하게 보관되어 마침내 햇빛을 보게 된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해방 후 <플라워> 다방(?)에서 윤동주의 추도회가 열린 적이 있었다. 정병욱은 그의 필적을 고스란히 복사하여 참석자들에게 나눠주었고 김삼불은 윤동주의 시를 세밀히 분석 비판했다. 심지어 품사별로 풍계를 내고 김소월 시보다 한결 우수하다는 쪽으로 이론을 폈다. 이때 당시 경향신문 편집국장이었던 시인 정지용이 각도를 달리한 비평을 해서 이채를 띄었다. 즉 민족의 얼을 시에 담고 순교로 겨레 앞에 쓰러진 시인의 아름답고 귀한 시를 자로 재고 칼로 썰고 잘라내어 이리저리 까발리고 난도질하는 것은 더 가혹한 일이 아니냐고 반론을 펴면서 그 나름의 총괄적인 찬사를 보냈었다.
윤동주의 시를 '민족시의 별'로 인식시키고 암흑기를 저항시로 승화시킨 데 있어서 정지용의 후견이 크게 이바지했음도 가볍게 지나칠 수 없는 일이다.
윤동주는 명동촌이 낳은, 우리 한국인의 마음에 빛을 보내는, 꺼지지 않는 별이었다.
그는 끊임없이 어둠을 거부하면서 설정된 어둠의 상황 속에서 살았다.
그는 '마음'으로 한 시대와 양심을 노래했다. 비록 짧은 생애요, 어둠으로 점철된 공간이긴 했어도…….
이 결백, 이 순수, 이 열정의 기도가 허무하게 무너지던 날…… 시인의 눈은 차마 감기지가 않았을 것이다.
윤동주의 무덤은 북간도 뒷동산에 있다. (용정 동산) 세월이 흘러도 말이 없는 고독한 비목(碑木)―이제는 갈래야 갈 수조차 없는 금단의 지역이 된 그곳, 시인의 별은 북녘 하늘에 홀로 빛나고 있다.
그의 뜨거웠던 나라 사랑, 겨레 사랑의 참뜻을 모르는 이에게까지도 그 무덤은 살아서 속삭이고 그의 시는 영원히 향수처럼 나부낄 것이다.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나오기까지
해방 후 동주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햇빛을 볼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그의 단짝 친구였던 정병욱 덕분이었다.
1947년 2월 16일, 그의 유족과 친지들이 모여 첫 추도회를 했었다. 1948년 정음사 최영해 사장의 호의로 첫 시집이 상재되었다. 1955년 그의 10주기를 맞아 시집의 증보판을 간행했었다. 1967년 제3판 시집이 햇빛을 보게 되자 세상은 그에 대한 시각과 평가를 완전히 달리했었다.
'무시무시한 고독에서 죽었고나! 29세가 되도록 시도 발표하여 본 적이 없이!' ― 이것은 시집 초판(1948년)의 서문에서 정지용이 내뱉은 경탄이었다.
'아직 무릎을 꿇을 만한 기력이 남았기에 나는 이 붓을 들어 시인 윤동주의 유고에 분향하노라.'
'내가 한국 신문학사를 서술하는데 있어서 일제 말기의 한 대목 즉 1941년 이후 5년간을 <암흑기>라고 부른 데 대하여, 어느 젊은 작가가 불만을 표시한 일이 있었다.
시인 윤동주가 있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붙일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차라리 레지스탕스의 시기라도 말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하는 내용을 대화한 일이 있었다.
그때 나는 그의 충고를 솔직하게 받아들였고 다음번엔 개정판을 낼 때에는 기어이 그런 의사를 반영시켜서 제목을 바꾸리라고 마음먹었다. ……<중략> 그 뒤 이 시인의 가치가 날로 밝혀져 가는데 따라서 기성의 문학사의 내용을 새로 써야 하게 될 만큼 그 존재는 뚜렷해지고 있다.'
이것은 윤동주의 시집 증보판(1967년) 부록에 실린 평론가 백철 박사의 글이다.
여기에서 빠뜨릴 수 없는 사항은 윤동주의 시집이 엮어져 나오기까지의 과정이다.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원고는 3부로 정리되었는데 그 하나는 윤동주 자신이 가졌고 다른 한 부는 이양하 선생이, 남은 한 부는 정병욱씨가 보관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선 시집에 실린 19편 중에서 제일 마지막에 쓴 시가 <별 헤는 밤>이었다. 1941년 11월 5일자, 그리고 <서시>는 11월 20일자로 되어 있다.
짐작건대 <별 헤는 밤>을 쓰고 난 동주는 자선 시집을 만들어 졸업 기념으로 출판하려 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친필로 쓴 원고를 손수 제본을 하고 그 가운데서 한 부를 정병욱씨에게 건네면서 시집의 제목이 길어진 이유를 설명하기도 했었다.
처음엔 시집 제목을 '병원'으로 하려 했던 모양이다.
이유는 간단했다. 세상이 온통 환자 투성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환자들은 병원을 찾아가야 병을 고친다. 병원은 환자의 병을 고치기 위해서 있는 곳이다. 그래서 '병원'을 선택하려 했었다는 그의 설명은 꽤 명분과 설득력이 있는 것으로 여겨졌었다.
처음에 이양하 선생은 출판을 만류했었다.
작품 가운데 <십자가><슬픈 족속><또 다른 고향> 등이 일제 관헌의 검열에 걸릴 것을 염려했을 뿐 아니라 동주의 신변에 위험이 닥칠 것을 미리 염려한 때문이었다.
그것은 지극한 사제간의 정리(情理)와 사랑이 빚은 충고였다. 동주는 그것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실망의 빛을 보이지도 않았다. 그에게도 세상을 내다보는 눈은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스스로 위안을 자신의 안에서 찾았다. <간>도 그 무렵에 쓴 작품이었다.
시인의 치열한 정신의 내공은 언어 이전의 분노와 달관을 수반하는 것이었다. <참회록>을 쓴 것이 1942년 1월 24일자. 어쩌면 이 작품이 그가 도일하기 전, 고국에서 마지막 쓴 작품인지도 모른다.
그 뒤 모든 사태는 뒤바뀌고 사물의 원형은 산산조각이 났다.
동주가 맡긴 시고 가운데서 정병욱씨에게 건넨 작품만이 살아남아 1948년 정음사에서 펴내게 되었던 것이다.
정병욱씨는 동주가 검거된 지 반 년 후에 학병으로 끌려 나갔다. 그는 동주의 시고를 그의 어머니에게 맡기고 동주가 살아 올 때까지 소중히 지켜 주기를 당부했었다.
만약에 동주나 자기가 죽어서 돌아올 수 없게 되거나 조국이 광복을 맞이했을 때는 그 시고를 연희전문학교에 보내서 세상에 알리도록 해 달라고 유언을 남기듯 하며 떠났던 것이었다. 해방이 되고 다행히 그는 살아서 무사히 귀가하였다. 그때 어미니는 명주 보자기로 겹겹이 싸서 간직한 동주의 시고를 자랑스럽게 내놓으셨다.
이것이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세상에 널리 알려지고 밝은 햇빛을 보게 되기까지의 경위이다.
동주의 시들이 일본에서 정병욱 등 친구와 가족에게 발송되고 또 아슬아슬하게 보관되어 마침내 햇빛을 보게 된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해방 후 <플라워> 다방(?)에서 윤동주의 추도회가 열린 적이 있었다. 정병욱은 그의 필적을 고스란히 복사하여 참석자들에게 나눠주었고 김삼불은 윤동주의 시를 세밀히 분석 비판했다. 심지어 품사별로 풍계를 내고 김소월 시보다 한결 우수하다는 쪽으로 이론을 폈다. 이때 당시 경향신문 편집국장이었던 시인 정지용이 각도를 달리한 비평을 해서 이채를 띄었다. 즉 민족의 얼을 시에 담고 순교로 겨레 앞에 쓰러진 시인의 아름답고 귀한 시를 자로 재고 칼로 썰고 잘라내어 이리저리 까발리고 난도질하는 것은 더 가혹한 일이 아니냐고 반론을 펴면서 그 나름의 총괄적인 찬사를 보냈었다.
윤동주의 시를 '민족시의 별'로 인식시키고 암흑기를 저항시로 승화시킨 데 있어서 정지용의 후견이 크게 이바지했음도 가볍게 지나칠 수 없는 일이다.
윤동주는 명동촌이 낳은, 우리 한국인의 마음에 빛을 보내는, 꺼지지 않는 별이었다.
그는 끊임없이 어둠을 거부하면서 설정된 어둠의 상황 속에서 살았다.
그는 '마음'으로 한 시대와 양심을 노래했다. 비록 짧은 생애요, 어둠으로 점철된 공간이긴 했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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