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배경
2. 동맹회활동
3. 혁명정세의 발전
4. 신해혁명의 전개
2. 동맹회활동
3. 혁명정세의 발전
4. 신해혁명의 전개
본문내용
중운동에 혁명파는 민중과 함께 하지 못했다. 즉 혁명파는 대중적 지배요인이 없었다. 따라서 신해혁명으로 청조는 무너졌지만, 그 이후 돌아가는 국내정세는 예전과 다르지 않았다. 전혀 공화국 같지 않는 모습이 발견된다.
혁명을 성공했다고 하기 위해서 혁명파가 모든 정권을 지고 있어야하는데, 신해혁명 이후 그렇지 못했다는 점에서 신해혁명을 실패한 혁명이라고 한다.
농민투쟁
- 원인; 열강의 경제침략에 따른 농촌경제의 붕괴와 농민의 빈궁화,
신정 추진에 따른 세액 부담의 증가,
물가앙등과 경제공황, 계속된 자연재해.
* 물가앙등 - sharp rise in price
- 유형;
항세투쟁
(공격대상-신정을 이용해 이익을 추구하는 관료, 열신(劣紳), 학교 등 신정의 상징적 기구),
* 열신 - 졸렬한 신사
창미폭동
(공격대상- 미곡상점, 외국영사관, 교회, 양행, 순무아문 등)
* 창미폭동 - 쌀을 약탈하는 폭동
* 양행 - 주로 외국과의 무역 거래를 전문으로 하는 서양식 상점.
* 순무아문 - 관료기구
===> 반제, 반신정(반봉건) 투쟁의 성격.
무창봉기의 가장 결정적인 원인은 국내에 반청이라는 분위기가 무르익었다는 가장 중요하다.
4. 신해혁명의 전개
청조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혁명파에 의한 꾸준한 선전과 조직 공작이 사병과 하급사관에게 수용되어 혁명적인 정세를 틈탄 신군의 무창봉기를 가능하게 했다.
무창봉기의 성공과 각성의 독립
- 1911년 10월 10일 무창신군의 봉기, 11일과 12일 한구와 한양 점령
-->무한 3진이 혁명군의 통제 하에(호북 신군의 1/3이상이 혁명에 참가)
- 11일 혁명군은 신군협통 여원홍을 도독으로 추대하여 혁명군정부를 수립.
혁명 주도 세력은 낮은 계급의 병사였으므로 정치적 영향을 발휘할 수 없었던 데다 손문 등 혁명지도자와 연락이 닿지 않았다. 그래서 이들은 혁명에 피동적으로 참여한 자의국의원들과 협의해 남아있던 청조의 최고위 장교인 여원홍을 군정도 도독으로 추대했다.
- 무창봉기 후 1개월 사이에 남방 각성과 상해, 북방의 섬서, 산서성이 청조로부터 독립을 선포하고 혁명군에 가담. ==> 성별 독립(부·주·현별 독립의 사태도 다수)의 성격.
- 지역별 양상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공통된 특징은, 혁명파보다는 입헌파나 구세력에게 정권이 낙착된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것. ==>혁명파의 한계.
남북의화와 남경임시정부
- 호북도독 여원홍의 주재하에 각성도독부대표연합회에서 임시정부 수립을 논의. 12월 3일 남경이 점령되면서 남경을 정부 소재지로 결정.
- 그러나 청군의 공격으로 이미 한구(11월 2일)와 한양(11월 27일)이 청조측으로 넘어간 상태에서 혁명군측의 기세는 크게 위축되어 있던 상태.
- 한양의 함락 직후 한구 주재 영국영사의 중개로 남북화의가 제안
==> 정전停戰과 의화議和로. 이 시기부터 신해혁명이 무장투쟁에서 정치적 타협으로 전환.
- 12월 20일 상해에서 남북의화 개시. 이 시기 혁명군측은 이미 남북의 평화적 타협과 청제의 퇴위, 원세개의 대총통으로의 선출이라는 구도를 결정한 상태.
- 하지만 12월 25일 손문이 상해에 도착하면서 혁명군측의 기세가 만회. 12월 29일 각 성 대표들에 의해 손문이 임시대총통에 선출되고 1912년 1월 1일 중화민국의 성립을 정식으로 선포(남경임시정부)
- 임시정부 수립 후의 남북의화; 북방 대표로서 원세개가 직접 담판에 나섬. 협상대상도 공화제를 전제로 한 상태에서의 청제淸帝의 퇴위조건을 둘러싼 것으로 변화.
- 열강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던 원세개측에 대해 혁명군측의 입지가 계속 제한되던 상태에서, 2월 12일 청제의 퇴위조서가 발표되고 손문은 사직원을 제출, 원세개를 새로운 대총통으로 선출. 원세개는 3월 10일 북경에서 제2대 임시대총통으로 취임.
원세개정권의 성립
- 동맹회 중심의 혁명파에게 남은 길은 국회와 정당을 통해 원세개를 견제하는 것 뿐.
- 동맹회의 국민당으로의 개조(송교인의 역할); 1913년 1,2월에 걸쳐 시행된 국회선거에서
국민당이 과반수를 넘는 의석을 차지하는 승리를 거둠.
- 원세개의 견제;
3월 22일 상해에서 송교인을 암살하도록 사주.
* 송교인 암살 사주
아울러 국회의 동의 없이 거액의 차관을 도입. 이어 남방 과격파의 움직임을 견제하기 위해 강서·안휘·광동의 도독을 면직처분.
==>원세개 토벌전쟁, 소위 ‘제2혁명’의 발발과 실패.
* 원세개 토벌전쟁, 소위 ‘제2혁명’의 발발과 실패.
==>신해혁명의 실패.
혁명을 성공했다고 하기 위해서 혁명파가 모든 정권을 지고 있어야하는데, 신해혁명 이후 그렇지 못했다는 점에서 신해혁명을 실패한 혁명이라고 한다.
농민투쟁
- 원인; 열강의 경제침략에 따른 농촌경제의 붕괴와 농민의 빈궁화,
신정 추진에 따른 세액 부담의 증가,
물가앙등과 경제공황, 계속된 자연재해.
* 물가앙등 - sharp rise in price
- 유형;
항세투쟁
(공격대상-신정을 이용해 이익을 추구하는 관료, 열신(劣紳), 학교 등 신정의 상징적 기구),
* 열신 - 졸렬한 신사
창미폭동
(공격대상- 미곡상점, 외국영사관, 교회, 양행, 순무아문 등)
* 창미폭동 - 쌀을 약탈하는 폭동
* 양행 - 주로 외국과의 무역 거래를 전문으로 하는 서양식 상점.
* 순무아문 - 관료기구
===> 반제, 반신정(반봉건) 투쟁의 성격.
무창봉기의 가장 결정적인 원인은 국내에 반청이라는 분위기가 무르익었다는 가장 중요하다.
4. 신해혁명의 전개
청조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혁명파에 의한 꾸준한 선전과 조직 공작이 사병과 하급사관에게 수용되어 혁명적인 정세를 틈탄 신군의 무창봉기를 가능하게 했다.
무창봉기의 성공과 각성의 독립
- 1911년 10월 10일 무창신군의 봉기, 11일과 12일 한구와 한양 점령
-->무한 3진이 혁명군의 통제 하에(호북 신군의 1/3이상이 혁명에 참가)
- 11일 혁명군은 신군협통 여원홍을 도독으로 추대하여 혁명군정부를 수립.
혁명 주도 세력은 낮은 계급의 병사였으므로 정치적 영향을 발휘할 수 없었던 데다 손문 등 혁명지도자와 연락이 닿지 않았다. 그래서 이들은 혁명에 피동적으로 참여한 자의국의원들과 협의해 남아있던 청조의 최고위 장교인 여원홍을 군정도 도독으로 추대했다.
- 무창봉기 후 1개월 사이에 남방 각성과 상해, 북방의 섬서, 산서성이 청조로부터 독립을 선포하고 혁명군에 가담. ==> 성별 독립(부·주·현별 독립의 사태도 다수)의 성격.
- 지역별 양상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공통된 특징은, 혁명파보다는 입헌파나 구세력에게 정권이 낙착된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것. ==>혁명파의 한계.
남북의화와 남경임시정부
- 호북도독 여원홍의 주재하에 각성도독부대표연합회에서 임시정부 수립을 논의. 12월 3일 남경이 점령되면서 남경을 정부 소재지로 결정.
- 그러나 청군의 공격으로 이미 한구(11월 2일)와 한양(11월 27일)이 청조측으로 넘어간 상태에서 혁명군측의 기세는 크게 위축되어 있던 상태.
- 한양의 함락 직후 한구 주재 영국영사의 중개로 남북화의가 제안
==> 정전停戰과 의화議和로. 이 시기부터 신해혁명이 무장투쟁에서 정치적 타협으로 전환.
- 12월 20일 상해에서 남북의화 개시. 이 시기 혁명군측은 이미 남북의 평화적 타협과 청제의 퇴위, 원세개의 대총통으로의 선출이라는 구도를 결정한 상태.
- 하지만 12월 25일 손문이 상해에 도착하면서 혁명군측의 기세가 만회. 12월 29일 각 성 대표들에 의해 손문이 임시대총통에 선출되고 1912년 1월 1일 중화민국의 성립을 정식으로 선포(남경임시정부)
- 임시정부 수립 후의 남북의화; 북방 대표로서 원세개가 직접 담판에 나섬. 협상대상도 공화제를 전제로 한 상태에서의 청제淸帝의 퇴위조건을 둘러싼 것으로 변화.
- 열강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던 원세개측에 대해 혁명군측의 입지가 계속 제한되던 상태에서, 2월 12일 청제의 퇴위조서가 발표되고 손문은 사직원을 제출, 원세개를 새로운 대총통으로 선출. 원세개는 3월 10일 북경에서 제2대 임시대총통으로 취임.
원세개정권의 성립
- 동맹회 중심의 혁명파에게 남은 길은 국회와 정당을 통해 원세개를 견제하는 것 뿐.
- 동맹회의 국민당으로의 개조(송교인의 역할); 1913년 1,2월에 걸쳐 시행된 국회선거에서
국민당이 과반수를 넘는 의석을 차지하는 승리를 거둠.
- 원세개의 견제;
3월 22일 상해에서 송교인을 암살하도록 사주.
* 송교인 암살 사주
아울러 국회의 동의 없이 거액의 차관을 도입. 이어 남방 과격파의 움직임을 견제하기 위해 강서·안휘·광동의 도독을 면직처분.
==>원세개 토벌전쟁, 소위 ‘제2혁명’의 발발과 실패.
* 원세개 토벌전쟁, 소위 ‘제2혁명’의 발발과 실패.
==>신해혁명의 실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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