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작가 세르반테스
2. 내용요약
3. 작품에 드러나는 당대의 정서와 그 시대사적 의의
4. ‘돈키호테’라는 인물의 형상화
5. <돈키호테>에 투영되어 있는 기독교적 색채
6. 작품에 나타나는 동양세계에 대한 인식
7. 현대소설의 새로운 전형
2. 내용요약
3. 작품에 드러나는 당대의 정서와 그 시대사적 의의
4. ‘돈키호테’라는 인물의 형상화
5. <돈키호테>에 투영되어 있는 기독교적 색채
6. 작품에 나타나는 동양세계에 대한 인식
7. 현대소설의 새로운 전형
본문내용
사랑이 두드러지는 작품의 대상이 되었던 안젤리까는 돈키호테에서는 둘씨네아로 표현된다. 세르반테스의 안젤리까에 대한 생각은 그가 가지고 있던 까따이에 대한 연상과 같다. 르네상스의 모험정신과 이국 취향이 낳은 까따이의 이미지가 바로 안젤리까이다. 돈키호테는 안젤리카나 까따이에 대한 긍정적인 시각을 버리지 않는다. 둘시네아가 산초의 말처럼 천하고 못생긴 시골처녀라고 해도 끝내 믿지 않듯 돈키호테는 안젤리까가 이해할 수 없고 다다르기 어려운 여인이나 이 또한 아름다움과 고운 마음의 고향임을 한번도 잊지 않는다. 돈키호테에서 멀고 이상한 나라의 이름으로 동양의 어느 고장을 일컫는 듯한 이름은 수없이 많다.‘인도의 환사제의 땅’,`동인도’, ‘뜨라뽀바나’등이 그것이다. 모두가 해가 떠오르는 곳을 향해 있는 명칭들이다. 깐따야는 인공적인 이름이다. 세르반테스는 이 이름을 상당히 구체적인 동방의 어느 나라를 표현한 것이다. 그는 이 나라를 현실과 꿈이, 동방과 서방이 하나인, 시가 있고 행복과 평화가 있는 인간의 고향에 대한 염원의 상징으로 삼았던 것이다.
돈키호테 2권의 서문에서 레모스 공작에게 바치는 글에서 세르반테스는 `중국 황제의 편지`에 대해 얘기한다. 그가 자기 소설의 세계성을 강조하기 위해 중국이나 중국 황제를 들먹인 이유로써 서반아 학계에서는 중국 황제의 편지를 들먹인다는 사실이 세르반테스가 늘 쓰던 환상의 일환이라고 일축해 버린다. 즉 레모스 공작에게 애교있게 원조를 끌어내기 위한 재미있는 이야기거리로 가장 황당무계한 사설을 늘여 놓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세르반테스는 그러한 농담이나 할 만한 상황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의 생명이 돈키호테의 죽음과 더불어 거의 시들어 가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돈키호테나 세르반테스의 마지막 인생의 꿈은 목가의 세계였다. 그의 마지막 소원은 목가소설 갈라떼아의 2권을 끝내는 것이었고, 귀향하는 돈키호테의 소망 또한 목가적 생활이었다. 그러나, 목가적 꿈은 사실상 현실에서 실현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안 것이 돈키호테의 마지막 사고요 세르반테스가 `갈라떼아`의 2권을 끝내지 않았다는 것이다. 심지어는 깐따야나 목가 생활 같은 이상까지도 체념한 시기였다. 그런 시기에 하필 중국을 이야기한 것은 세르반테스의 중년이후의 소망이 중남미나 동양에 자리하나 얻어 나가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세르반테스가 2권에서 몇 번 중국을 언급한 것은 오히려 그의 문학적 명성을 감안한 허장성세다. 돈키호테에서 까따이나 깐따야, 기타 유사 동양 지명은 마르코 폴로의 여행기의 영향권에 속한다. 이러한 지명의 사용이 단순한 환상적인 측면만을 보여준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산이다. 이는 당시의 현실을 반영하는 사실주의적 요소임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세르반테스는 돈키호테에서 꿈과 환상의 기틀로 까따이를 사용한다. 이들 이미지는 다른 어떤 상상적 지명과도 다를 것이 없는 마술적 차원이다. 그러나, 그런 마술적 세계는 치나라는 사실적 바탕위에서 더욱 선명해진다. 즉 세르반테스는 동양을 꿈만으로도 현실만으로도 보고 있는 게 아니다. 그는 오히려 꿈속에서 보다 선명한 현실을 직시하고 현실 속에서 꿈의 무늬가 엄숙해지는 정경을 꿰뚫어보고 있다. 세르반테스는 동양을 꿈과 현실이 교차하는, 광기와 사실, 삶과 죽음이 한데 어우러져 이루어가는 깊은 인간 실존의 상황이며 소설이라는 픽션속에 참과 영원의 목소리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7. 현대소설의 새로운 전형
19세기 낭만주의 시대로부터 불붙기 시작한 돈키호테에 대한 새로운 해석은 지금까지도 계속되어 철학자, 역사가, 사상가, 비평가, 그리고 정치가 등이 돈키호테의 복합적인 메시지를 탐구하기 위한 다양한 시도를 거듭하고 있다. 그 결과, 기사 돈키호테와 종자 산초 판사는 인간의 내면에 공존하는 이상주의와 현실주의의 화신으로 묘사되었고, 두 인물이 하나로 합쳐져야만 총체적인 인간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대식가이며 촌뜨기인 산초가 자신의 주인과 상반된 모습으로 주인의 엉뚱한 행위를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점차 시종으로서 훌륭한 충성심을 보이며 주인을 따르게 된다는 점에서 산초의 점진적인 돈키호테화가 달성되었다고 보는 해석도 나오고 있다. 이상주의자인 돈키호테에 비해 산초는 현실주의를 대표한다. 그러나 주인 돈키호테와 지내면서 그의 개성은 변화하여, 차츰 주인의 이상주의에 공감하게 된다. 그리고 때때로 주인처럼 이상세계에서 행동하기도 한다. 이상주의자 돈키호테와 현실주의자 산초에 의해 상징되는 평행선은 바로 우리 인간의 삶 속에서 겪는 끊임없는 갈등과 화합을 상징하는 것이다. 돈키호테와의 대립은 우리가 인생에서 부딪치게 되는 현실과 이상의 대립을 의미하고 있다.
돈키호테가 오늘날까지도 최고의 소설로 손꼽히는 이유는 우리 인간에게 꿈을 심어주는 모습이 그 안에서 발견되기 때문이다. 비록 우리가 꾸는 꿈이 물거품으로 끝날지언정 한 순간이라도 꿈과 희망이 없다면 사람들은 삶의 의미를 상실할 것이다. 돈키호테의 위대함은 바로 여기에 있다. 꿈과 이상을 위하여 모험을 하지만 끊임없이 좌절하고 실패하는 모습에서 우리는 실존하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결코 꿈을 포기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현실이기에 우리 인간의 내면에는 산초 판사와 같은 현실주의적 사고도 존재한다. 꿈과 실제, 이상과 현실을 상징하는 돈키호테와 산초 판사는 바로 우리의 양면적 모습이자 실존인 것이다.
작가 세르반테스의 위대한 가치는 그의 작품을 유머라는 가장 인간적인 감각으로 가득 채웠다는 점에서도 발견된다. 세르반테스의 위대함은 심각하거나 직설적인 방법으로 사회를 비판하지 않고, 당시 부조리한 사회구조와 귀족들의 행태를 유머러스하게 묘사하여 그들을 풍자하고 조소를 보냄으로써 문학적 진가를 발휘한 데 있다. 여러 가지 특징에서 돈키호테는 당시의 어떤 문학작품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탁월한 기교로 쓰였다고 말할 수 있다. 세르반테스는 그 시대까지 독립적으로 존재했던 소설의 다양한 형식을 집결하여 문체뿐만 아니라 작품의 전개방식에서도 참신함이 돋보이는 훌륭한 작품을 만들어 냄으로써 유럽의 현대소설에 새로운 장을 열었다.
돈키호테 2권의 서문에서 레모스 공작에게 바치는 글에서 세르반테스는 `중국 황제의 편지`에 대해 얘기한다. 그가 자기 소설의 세계성을 강조하기 위해 중국이나 중국 황제를 들먹인 이유로써 서반아 학계에서는 중국 황제의 편지를 들먹인다는 사실이 세르반테스가 늘 쓰던 환상의 일환이라고 일축해 버린다. 즉 레모스 공작에게 애교있게 원조를 끌어내기 위한 재미있는 이야기거리로 가장 황당무계한 사설을 늘여 놓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세르반테스는 그러한 농담이나 할 만한 상황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의 생명이 돈키호테의 죽음과 더불어 거의 시들어 가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돈키호테나 세르반테스의 마지막 인생의 꿈은 목가의 세계였다. 그의 마지막 소원은 목가소설 갈라떼아의 2권을 끝내는 것이었고, 귀향하는 돈키호테의 소망 또한 목가적 생활이었다. 그러나, 목가적 꿈은 사실상 현실에서 실현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안 것이 돈키호테의 마지막 사고요 세르반테스가 `갈라떼아`의 2권을 끝내지 않았다는 것이다. 심지어는 깐따야나 목가 생활 같은 이상까지도 체념한 시기였다. 그런 시기에 하필 중국을 이야기한 것은 세르반테스의 중년이후의 소망이 중남미나 동양에 자리하나 얻어 나가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세르반테스가 2권에서 몇 번 중국을 언급한 것은 오히려 그의 문학적 명성을 감안한 허장성세다. 돈키호테에서 까따이나 깐따야, 기타 유사 동양 지명은 마르코 폴로의 여행기의 영향권에 속한다. 이러한 지명의 사용이 단순한 환상적인 측면만을 보여준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산이다. 이는 당시의 현실을 반영하는 사실주의적 요소임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세르반테스는 돈키호테에서 꿈과 환상의 기틀로 까따이를 사용한다. 이들 이미지는 다른 어떤 상상적 지명과도 다를 것이 없는 마술적 차원이다. 그러나, 그런 마술적 세계는 치나라는 사실적 바탕위에서 더욱 선명해진다. 즉 세르반테스는 동양을 꿈만으로도 현실만으로도 보고 있는 게 아니다. 그는 오히려 꿈속에서 보다 선명한 현실을 직시하고 현실 속에서 꿈의 무늬가 엄숙해지는 정경을 꿰뚫어보고 있다. 세르반테스는 동양을 꿈과 현실이 교차하는, 광기와 사실, 삶과 죽음이 한데 어우러져 이루어가는 깊은 인간 실존의 상황이며 소설이라는 픽션속에 참과 영원의 목소리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7. 현대소설의 새로운 전형
19세기 낭만주의 시대로부터 불붙기 시작한 돈키호테에 대한 새로운 해석은 지금까지도 계속되어 철학자, 역사가, 사상가, 비평가, 그리고 정치가 등이 돈키호테의 복합적인 메시지를 탐구하기 위한 다양한 시도를 거듭하고 있다. 그 결과, 기사 돈키호테와 종자 산초 판사는 인간의 내면에 공존하는 이상주의와 현실주의의 화신으로 묘사되었고, 두 인물이 하나로 합쳐져야만 총체적인 인간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대식가이며 촌뜨기인 산초가 자신의 주인과 상반된 모습으로 주인의 엉뚱한 행위를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점차 시종으로서 훌륭한 충성심을 보이며 주인을 따르게 된다는 점에서 산초의 점진적인 돈키호테화가 달성되었다고 보는 해석도 나오고 있다. 이상주의자인 돈키호테에 비해 산초는 현실주의를 대표한다. 그러나 주인 돈키호테와 지내면서 그의 개성은 변화하여, 차츰 주인의 이상주의에 공감하게 된다. 그리고 때때로 주인처럼 이상세계에서 행동하기도 한다. 이상주의자 돈키호테와 현실주의자 산초에 의해 상징되는 평행선은 바로 우리 인간의 삶 속에서 겪는 끊임없는 갈등과 화합을 상징하는 것이다. 돈키호테와의 대립은 우리가 인생에서 부딪치게 되는 현실과 이상의 대립을 의미하고 있다.
돈키호테가 오늘날까지도 최고의 소설로 손꼽히는 이유는 우리 인간에게 꿈을 심어주는 모습이 그 안에서 발견되기 때문이다. 비록 우리가 꾸는 꿈이 물거품으로 끝날지언정 한 순간이라도 꿈과 희망이 없다면 사람들은 삶의 의미를 상실할 것이다. 돈키호테의 위대함은 바로 여기에 있다. 꿈과 이상을 위하여 모험을 하지만 끊임없이 좌절하고 실패하는 모습에서 우리는 실존하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결코 꿈을 포기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현실이기에 우리 인간의 내면에는 산초 판사와 같은 현실주의적 사고도 존재한다. 꿈과 실제, 이상과 현실을 상징하는 돈키호테와 산초 판사는 바로 우리의 양면적 모습이자 실존인 것이다.
작가 세르반테스의 위대한 가치는 그의 작품을 유머라는 가장 인간적인 감각으로 가득 채웠다는 점에서도 발견된다. 세르반테스의 위대함은 심각하거나 직설적인 방법으로 사회를 비판하지 않고, 당시 부조리한 사회구조와 귀족들의 행태를 유머러스하게 묘사하여 그들을 풍자하고 조소를 보냄으로써 문학적 진가를 발휘한 데 있다. 여러 가지 특징에서 돈키호테는 당시의 어떤 문학작품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탁월한 기교로 쓰였다고 말할 수 있다. 세르반테스는 그 시대까지 독립적으로 존재했던 소설의 다양한 형식을 집결하여 문체뿐만 아니라 작품의 전개방식에서도 참신함이 돋보이는 훌륭한 작품을 만들어 냄으로써 유럽의 현대소설에 새로운 장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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