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들어가며
2. 문학 속에서의 낯설게 하기
3. 스토리와 플롯의 관계
4. 낯설게 하기의 문학작품 속에서의 예
5. 친숙하게 하기
6. 맺음말
2. 문학 속에서의 낯설게 하기
3. 스토리와 플롯의 관계
4. 낯설게 하기의 문학작품 속에서의 예
5. 친숙하게 하기
6. 맺음말
본문내용
들고
양지바른 공장 담벼락 밑에 묻는다
노동자의 피땀 위에서
번영의 조국을 향락하는 누런 착취의 손들을
일 안하고 놀고먹는 하얀 손들을
묻는다
프레스로 싹둑싹둑 짓짤라
원한의 눈물로 묻는다
일하는 손들이
기쁨의 손짓으로 살아날 때까지
묻고 또 묻는다
이 시는 박노해의 시중 가장 유명한 시중의 하나이며 80년대 노동시중 가장 탁월한 문학성을 획득한 백미로 꼽힌다. 이 시가 80년대 노동자의 노보(노동조합 기관지)에 숱하게 실렸으며 진보적인 비평가 또는 그 외의 비평가들에게까지 찬사를 받은 이유가 있다. 지금도 그렇지만 한국은 한해에도 산재로 사망하는 사람이 자그만치 2천명에 달할 정도로 산재사고가 많다. 한참 산업화로 치닫던 지난 시대엔 더 그랬다. 그래서 공장에서 일하다가 손가락이 짤리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대체로 기계산업에서는 프레스나 절단 작업이 많기 때문에 손가락이 잘릴 확률이 높다. 지금은 3D업종에 외국인 노동자들로 대체되고 있지만 기계는 누군가의 손을 자르고 만다.
프레스에 정형의 손가락이 잘리는 것은 대단히 친숙한 표현이다. [손무덤]은 마지막 연을 제외하곤 공장에서 흔히 일어날 수 있는 사건이나 정황을 표현하고 있다. 단지 표현하고 있다는 것으론 부족할 정도로 전형화시킨 표현이 많다.
“기계 사이에 끼어 아직 팔딱거리는 손을/기름먹는 장갑 속에서 꺼내어/36년 한 많은 노동자의 손을 보며 말을 잊는다/비닐봉지에 싼 손을 품에 넣고”
박노해가 ‘친숙하게 만들기’를 어떻게 점층적으로 발전시키는지를 보자. 1연은 정형의 손목이 날아간 정황을 설명하고 2연에서는 긴급하게 병원으로 옮겨야 하는데 여기서 보인 사업주나 관리자들의 냉혹함을 표현하고 3연은 앞에서 보듯이 프레스에 짤린 팔딱팔딱 뛰는 손가락을 생생하게 표현하고 4연은 정형의 집에 가서 ‘차마 손만은 보여주지 못하고’ 5연은 정형이 부탁한 산재관계 책을 찾아보지만 어딜가나 보이지 않고 6연은 발전하는 선진조국과 자신들의 초라함이 대비된다. 열심히 일하면서 좀 더 나은 생활을 꿈꾸는 당시 노동자들의 정서와 상황을 아무런 기교없이 표현해 나가는 것은 박노해 시가 가지고 있는 진실성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박노해는 마지막 연에 가서 혁명적인 반전을 기도한다. 임진왜란 때 왜가 조선사람의 귀를 베어서 만든 귀무덤을 연상케 하는 손무덤을 만든다. ‘양지바른 공장 담벼락 밑에’ 자신들의 짤려나간 손가락을 묻는 무덤은 결국은 ‘일 안하고 놀고먹는 하얀 손들을’ 묻는 손무덤으로 변활 시킨다. 만약 이 시가 6연에서 그쳤다면 평범한 노동시에 그쳤을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 연에 가서 등장하는 손무덤은 노동자들의 잠재된 저항을 일깨우면서 상황이 달라진다. 그래서 [손무덤]역시 함민복의 [사과를 먹으며]와 마찬가지로 두 개의 전략을 적절하게 교합시키는 미학을 창출하게 된다.
6. 맺음말
앞에서 함민복과 박노해의 시를 통해 두 개의 전략이 어떻게 교합되는지를 살펴보았다. 그 교합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은 반전의 미학이며, 그 반전의 미학은 더 큰 효과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반전의 미학을 어떻게 적절하게 구사하는가에 따라 어떤 시에 있어서는 문학성과 사상의 깊이까지도 엄청나게 달라질 수 있다. 두 개의 전략을 어떻게 짤 것인가, 바로 이 점이 시에 있어선 가장 중요한 동력이라고 본다. 마치 소설에서 스토리와 플롯의 관계와 같다.
그러나 이러한 논점이 시의 전부를 규정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나는 시나 소설이나 무엇이든지 주제와 내용과 작가의 정서에 따라 형식이란 것은 선택되고 차용되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것은 밤하늘별처럼 다양하다. 단지 여기에서는 낯설게 하기 전략에 관한 이야기일 뿐이다.
양지바른 공장 담벼락 밑에 묻는다
노동자의 피땀 위에서
번영의 조국을 향락하는 누런 착취의 손들을
일 안하고 놀고먹는 하얀 손들을
묻는다
프레스로 싹둑싹둑 짓짤라
원한의 눈물로 묻는다
일하는 손들이
기쁨의 손짓으로 살아날 때까지
묻고 또 묻는다
이 시는 박노해의 시중 가장 유명한 시중의 하나이며 80년대 노동시중 가장 탁월한 문학성을 획득한 백미로 꼽힌다. 이 시가 80년대 노동자의 노보(노동조합 기관지)에 숱하게 실렸으며 진보적인 비평가 또는 그 외의 비평가들에게까지 찬사를 받은 이유가 있다. 지금도 그렇지만 한국은 한해에도 산재로 사망하는 사람이 자그만치 2천명에 달할 정도로 산재사고가 많다. 한참 산업화로 치닫던 지난 시대엔 더 그랬다. 그래서 공장에서 일하다가 손가락이 짤리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대체로 기계산업에서는 프레스나 절단 작업이 많기 때문에 손가락이 잘릴 확률이 높다. 지금은 3D업종에 외국인 노동자들로 대체되고 있지만 기계는 누군가의 손을 자르고 만다.
프레스에 정형의 손가락이 잘리는 것은 대단히 친숙한 표현이다. [손무덤]은 마지막 연을 제외하곤 공장에서 흔히 일어날 수 있는 사건이나 정황을 표현하고 있다. 단지 표현하고 있다는 것으론 부족할 정도로 전형화시킨 표현이 많다.
“기계 사이에 끼어 아직 팔딱거리는 손을/기름먹는 장갑 속에서 꺼내어/36년 한 많은 노동자의 손을 보며 말을 잊는다/비닐봉지에 싼 손을 품에 넣고”
박노해가 ‘친숙하게 만들기’를 어떻게 점층적으로 발전시키는지를 보자. 1연은 정형의 손목이 날아간 정황을 설명하고 2연에서는 긴급하게 병원으로 옮겨야 하는데 여기서 보인 사업주나 관리자들의 냉혹함을 표현하고 3연은 앞에서 보듯이 프레스에 짤린 팔딱팔딱 뛰는 손가락을 생생하게 표현하고 4연은 정형의 집에 가서 ‘차마 손만은 보여주지 못하고’ 5연은 정형이 부탁한 산재관계 책을 찾아보지만 어딜가나 보이지 않고 6연은 발전하는 선진조국과 자신들의 초라함이 대비된다. 열심히 일하면서 좀 더 나은 생활을 꿈꾸는 당시 노동자들의 정서와 상황을 아무런 기교없이 표현해 나가는 것은 박노해 시가 가지고 있는 진실성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박노해는 마지막 연에 가서 혁명적인 반전을 기도한다. 임진왜란 때 왜가 조선사람의 귀를 베어서 만든 귀무덤을 연상케 하는 손무덤을 만든다. ‘양지바른 공장 담벼락 밑에’ 자신들의 짤려나간 손가락을 묻는 무덤은 결국은 ‘일 안하고 놀고먹는 하얀 손들을’ 묻는 손무덤으로 변활 시킨다. 만약 이 시가 6연에서 그쳤다면 평범한 노동시에 그쳤을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 연에 가서 등장하는 손무덤은 노동자들의 잠재된 저항을 일깨우면서 상황이 달라진다. 그래서 [손무덤]역시 함민복의 [사과를 먹으며]와 마찬가지로 두 개의 전략을 적절하게 교합시키는 미학을 창출하게 된다.
6. 맺음말
앞에서 함민복과 박노해의 시를 통해 두 개의 전략이 어떻게 교합되는지를 살펴보았다. 그 교합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은 반전의 미학이며, 그 반전의 미학은 더 큰 효과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반전의 미학을 어떻게 적절하게 구사하는가에 따라 어떤 시에 있어서는 문학성과 사상의 깊이까지도 엄청나게 달라질 수 있다. 두 개의 전략을 어떻게 짤 것인가, 바로 이 점이 시에 있어선 가장 중요한 동력이라고 본다. 마치 소설에서 스토리와 플롯의 관계와 같다.
그러나 이러한 논점이 시의 전부를 규정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나는 시나 소설이나 무엇이든지 주제와 내용과 작가의 정서에 따라 형식이란 것은 선택되고 차용되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것은 밤하늘별처럼 다양하다. 단지 여기에서는 낯설게 하기 전략에 관한 이야기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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