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장로교회, 감리교회, 침례교회 고찰과 장로교회, 감리교회, 침례교회의 선교 및 장로교회, 감리교회, 침례교회의 활동 심층 분석(장로교회, 감리교회, 침례교회, 교회, 장로교, 감리교, 침례교, 선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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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교회]장로교회, 감리교회, 침례교회 고찰과 장로교회, 감리교회, 침례교회의 선교 및 장로교회, 감리교회, 침례교회의 활동 심층 분석(장로교회, 감리교회, 침례교회, 교회, 장로교, 감리교, 침례교, 선교)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론

Ⅱ. 장로교회

Ⅲ. 감리교회

Ⅳ. 침례교회

Ⅴ. 장로교회, 감리교회, 침례교회의 선교
1. 장로교회의 선교
2. 감리교회의 선교
3. 침례교회의 선교

Ⅵ. 장로교회, 감리교회, 침례교회의 활동
1. 장로교회의 활동
2. 감리교회의 활동
3. 침례교회의 활동

Ⅶ. 결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는 국가적 위기를 당할때에 자기 민족을 저버리지 않는 애국 애족의 집단임을 행동으로 보여주었으므로 불신사회의 존경을 받아왔고 교회의 권위가 크게 신장되어 교세도 상승일로에 있었다. 이러한 감리교회의 민족운동은 이교회의 심오한 영적체험신앙 및 감리교회의 독특한 심령 부흥 운동과 평행 하면서 진행된 사실은 주목 할만 하다. 이러한 감리 교회의 성격은 3.1운동과 6.25사변을 겪는 우리 민족 가운데 같은 공감대를 형성 하였으나, 감리교회에서도 3.1운동 이후 사회주의사상이 침투되면서 당시의 세속적인 유물론적 풍토와 합세하여 교회의 큰 위험세력으로 나타나게 되는 갈등을 안겨 주었다. 더욱이 일제의 교회에 대한 가중된 압박은 위에 언급한 사상들과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교회의 성장과 민족운동을 질식시키기에는 충분하였다.
이런 그리스도교의 공동 적을 앞에 두고 더 효과적인 민족복음화가 이루어져야만 했는데 같은 웨슬레의 후예인 남북감리교회가 한국 에서 언제 까지나 갈라져서 선교할 타당성을 채울 수가 없었던 것이다. 비록 두 감리교회가 갈라져서 처음부터 활동하였다 하더라도 한국 이라는 특수한 상황속에서는 합해서 일해야 하는 것이 지상명령을 받아 들여 졌다. 더욱기 1907년 부터 두 감리 교회가 합동 하여 신학교를 세우고 경영한 이후부터 협력의 기운이 더욱 촉진 되었다. 계속하여 두 교회는 합동 계획을 연구하며 일하다가 미국의 두 교회가 한국에서의 합동을 서로 승인하고 합동 전권 위원 까지 5명씩 선출 하였다. 1930년 12월2일 에 서대문의 냉천동의 협성신학교 강당에서 1백명의 두교회 대표 들이 모여 역사적인 기독교 조선 감리 교회의 창립총회를 열고 최초로 한국인감독을 선출하게 되었다. 처음에 총리사로 불리우는 이감독의 자리에는 양주삼 목사가 선출되었다. 이제부터 명실공히 한국인을 위한 한국인에 의한 한국인의 하나의 감리 교회가 탄생 되었고 이렇게 단결된 후에는 국내선교는 물론이고 만주선교 연회까지 조직하여 만주에 흩어져 있는 교포들을 위한 선교에도 많은 힘을 기울이게 되는 감리교회의 새로운 선교의 사역이 시작되었다.
3. 침례교회의 활동
침례교회는 펜휙이 조직한 대한기독교회는 1890년 기존의 장.감의 교단의 선교지역이 아닌 만주, 간도 시베리아, 몽고 지역에서의 개척 선교사업은 한국교회사에 있어서 실로 불멸의 큰 업적 이었다. 이 당시 개척순회선교사들은 모두 자비량으로 이 선교사업에 헌신했다. 그들은 펜윅으로부터 한짐의 복음 책자를 공급 받아서 이것을 판매한 돈으로 선교비에 충당하면서 개척선교의 고난을 이겨 나갔다. 1940년에 이르러서는 선교활동의 결과로 국내에 약100여개의 교회, 만주. 간도 지역에 100여개 교회 시베리아에 40여개 교회 그리고 몽고에 수개의 개척전도소를 설립하는 교세확장을 이루었다. 그러나 일제 말기 교회에 대한 박해가 강화되었는데 신사참배와 황궁 요배를 강력히 반대하였던 대한기독교회는 보안법위반이라는 죄목으로 32명의 교단의 지도자가 투옥당했다.
그러나 이들이 압제에 굴복 하지 않자 1944년에는 강압적으로 교단 해제 명령을 내리고 교회건물을 철폐 시키며 재산을 압류하여 국방 헌금으로 강제 헌납 시키고 말았다. 1945년 조국광복은 한민족은 물론 한국의 기독교계에 새로운 삶의 소망과 빛을 주었다. 그러나 1948년 북한정권의 수립으로 본 교단의 근거지였던 이북 지역의 모든 교회를 일시에 상실 하고 말았다. 남한에 남은 교단 지도자들은 충남 칠산에서 모임을 갖고 충남 강경의 총회에서 교단 명칭을 \'대한 기독교침례회\'로 바꾸고 1950년 최초의 남침례회 선교사로 에버내티 박사 부처가 파송됨으로 한국 침례회 선교사업의 서막이 열었다. 그러나 6.25 사변은 침례교회를 큰 혼란을 빠뜨리게 하였고 6.25사변중 파송된 선교사들은 전화로 고통 받는 한국민의 구호사업에 치중하면서 선교의 막을 열었다. 아직도 남 침례교회의 신앙원리와 신앙 행습에 생소한 한국에 구호사업으로 시작된 선교사업은 그 이후에 배태하게 된 여러 가지 비 침례교적 신앙의 씨앗을 처음부터 뿌려가고 있었다.
구호물자로 교인을 모으며 선교 보조금으로 교회가 세워지고 목회자의 사례금이 지급되었을때 침례교인의 숫자와 교회는 놀랍도록 자라났다. 그러나 질적향상을 병행하지 못한 단순한 양적 발전은 신앙 행습과 원리면에 있어서 침례교정체를 위협하는 숫자 결과를 빚었을 뿐 아니라 이 시기에 타 교단에서 유입된 교역자들의 비 침례교적인 교회의 행습은 그 이후 침례교 신앙 정립에 많은 대가를 치르게 하였다.
Ⅶ. 결론
한국 교회는 부흥과 쇠퇴의 기로에 서 있다. 한국 교회는 유럽 교회와 미국 교회의 전철을 밟을 수밖에 없다는 비관적 견해를 가진 한국 교인들이 많이 있다. 한국 교회는 이제 더 이상 성장하지 못하고 유럽 교회가 걸었던 그 길을 가게 될 것이라고 하는 말이다. 그러나 한국 교회는 그 사회적 환경이나 종교적 심성이 유럽의 그것들과 같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될 것이라고 단정하는 일은 금물일 것이다.
이제 한국 교회는 미래 연구가 더 활발해져서 다가올 교회의 미래 현상을 미리 예견하고, 이에 따를 미래 교회의 목회 패러다임을 정립해 나가는 선견지명이 절실히 요구된다. 예수께서는 \"너희 중에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예산하지 않겠느냐\"고 하셨다. 작은 망대도 준공할 때까지 모든 기획을 통하여 목적 성취가 가능한데 하물며 불확실한 미래 사회에 적응하고 미래 현상을 극복하려는 미래 교회가 아무런 예비 없이 목적을 성취할 수는 없다.
참고문헌
◎ 김경환(1995), 한국 감리교 사회신경에 관한 연구, 서울: 감리교신학대학교
◎ 김인수(1998), 간추린 한국교회의 역사, 한국장로교출판사
◎ 김홍기(2003), 감리교회사, 도서출판 kmc
◎ 대한 예수교 장로회 총회(2002), 헌법, 서울 : 대한 예수교 장로회 출판국
◎ 이원규(2000), 한국 기독교의 사회변동적 기능, 한국사회발전과 기독교의 역할, 서울: 한울
◎ 안교성(2001), 한국장로교 선교전략, 신교와 신학 제 8집
◎ 오시영, 교회의 분열과 재산귀속관계에 대한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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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9.09.07
  • 저작시기2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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