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추전국시대의 사회변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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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춘추전국시대의 사회변동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머리말
2. 春秋時代 사회변동원인
3. 春秋時代 전개양상
4, 國人의 범주에 대한 논의
5. 戰國時代 사회
6. 統一帝國형성의 노력
7. 맺음말

본문내용

제의 강화라는 목적이 더욱 전면으로 부상할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서울大學校東洋史學硏究室 編, 『講座中國史Ⅰ』 이성국 「春秋戰國時代의 國家와 社會」 지식산업사 2003 pp.144~145
2차 변법은 1차변법에서 확립된 군사체제를 장기적으로 유지하기 위한 정책이었다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특히 군공에 의한 작위수여제는 기본적으로 사회질서를 흔들 수 있는 제도였음에도 불구하고 높은 비중으로 시행됨에 있어 이러한 견해는 더욱 설득력이 있다. 2차변법의 구체적 내용은 아래와 같다.
첫째 수도를 위수 부군의 천연적인 요새인 성양으로 천도하였다.
둘째 전국의 성읍과 촌락을 합쳐 31현을 설치하고 각 현에는 현령을 두었다.
셋째는 아직 개간되지 않았던 토지는 백성에 지급하여 개간경작케 하여 농업생산을 높였으며, 이에 대한 전세를 국가가 직접 징수하였고,
넷째로 도량형을 통일하였다. 이춘식, 중국 고대사의 전개, 새론서원, 1997, pp.146~ 147
이러한 변법들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제민기반질서체제의 확립에서 나오는 권력의 중앙집권화와 그에 따른 부국강병이 그 목표였다. 제민지배체제는 종래의 씨족제에 의한 읍제국가체제가 해체된 후 국가가 직접 인민을 효과적으로 지배하기 위한 새로운 지배체제이다. 다시 말하면 씨족공동체와 읍제국가가 해체된 후의 사회적 변혁을 해결하기 위하여 소농민에게 균등한 토지점유와 안정된 농업생산체제를 보장하면서 이들을 새로운 호적제로 편성하여 국가가 직접 제민으로 지배하려 한 것이다. 신채식, 동양사개론, 삼영사, 2002, p. 74
제민기반체제는 중앙집권의 근본적인 핵심요소이며, 변법의 성공여부 또한 얼마나 제민지배체제를 효과적으로 구축하느냐에 달렸던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제민을 군주가 직접 다스리게 된다는 것은 귀족세력의 기반을 와해시키는 것을 의미하므로 그들의 반발은 당연했던 것이다.
대체적으로 전국시대 열국의 변법은 이와 비슷한 형태로 이루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진(秦)만이 변법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전국을 통일할 수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진의 특수성에서 찾는다. 진은 타국에 비해 우월한 군권의 전통이 존재하였는데 아마도 이 전통이 전사를 중요시 하는 유목민족의 특수성에 기인한 왕권신수신앙 내지 천명응수관에 의한 것이 입국 이래의 전통이었을 걸로 추측된다. 서울大學校東洋史學硏究室 編, 『講座中國史Ⅰ』 이성국 「春秋戰國時代의 國家와 社會」 지식산업사 2003 p.147 참조.
이러한 전통을 배경으로 하여 진의 군주권의 일찍이 족적 규제를 뿌리치고 전국 이후 보다 용이하게 군권강화를 진행시킬 수 있었다. 따라서 변법역시 보다 철저하게 추진 할 수 있었다. 이와 관련하여 지적될 수 있는 것은 진의 낙후성이다. 당시 진을 중원국가들이 이적(夷狄)시 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러한 시각은 진의 문화적 낙후성에 대한 경멸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더불어 진을 방문한 순자는 진민(秦民)의 소박단순성을 지적한바 있으며, 이 소박성이 변법을 좀 더 수월하게 했다는 것은 일면 타당성이 있어 보인다. 서울大學校東洋史學硏究室 編, 『講座中國史Ⅰ』 이성국 「春秋戰國時代의 國家와 社會」 지식산업사 2003 p.147~148 참조.
또한 위수분지에 도읍을 정하였고 그 지세가 서쪽으로 치우쳐져 서아시아의 발달된 기마술과 철제기술을 유입하고 우수한 품종의 말의 생산 및 유목민족적 기질 또한 진이 전국통일을 한 배경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진의 전국통일은 변법을 통하여 완성도 높은 제민지배체제의 형성에 있다. 변법과 제민지배체제로 인하여 진은 부국강병하게 되었고, 통일제국의 위업을 달성하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6. 맺음말
춘추시대에는 정치적으로 오랫동안 지속되었던 종법질서가 흔들리면서 지배층의 분화를 낳았다. 더불어 행해진 생산기술의 발달과 인구증가는 새로운 경작지를 발생시켰고, 이를 지배하기 위한 지배층의 갈등을 더욱 촉구하였다. 그리하여 춘추시대는 영토를 원인으로 잦은 전쟁을 벌이게 되었다. 그런데 이 전쟁과정에서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었던 읍제국가적 성격의 춘추국가들은 영토국가로 변모하였고, 그 과정에서 국가 내부의 지배층간의 충돌이 일어났다. 국가 내부의 갈등과 국가 외부의 전쟁은 춘추국가의 총체적인 개혁을 야기하였고 이에 성공한 국가들은 전국시대를 주도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그리고 더욱 격렬해진 전국시대의 전쟁은 열국간의 경쟁에서 생존하기 위해 변법을 야기하였다. 그리고 종국에는 변법을 통해 황제가 제민을 지배하는 방식의 통일제국 기틀을 마련하게 되었다.
이상과 같이 춘추전국시대의 사회변동의 모습을 다루어보았다. 춘추시대에 비하여 전국시대를 서술함에 있어서는 다각적 접근의 측면이 부실하였다. 하지만 역사란 칼로 자르듯이 구분하여 파악할 수 없으며, 문화적 측면의 변동은 완만한 상태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춘추시대에서 다루었던 것들과 연계하여 전국시대를 이해한다면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특히 철제도구의 사용과 농경의 발달요소는 불확실한 면이 많으므로 그 흐름을 융통성 있게 이해하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기본적인 사회구조의 형상을 인식하는 것은 정치, 문화, 경제적 측면 모두를 이해하는 주춧돌이 된다. 따라서 역사의 흐름을 파악하는데 있어서 구체적인 사회구조를 이해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하다. 춘추전국시대는 분명 고대사회라는 물질적 한계성을 가지고 있지만 중국역사의 기본적인 골격을 형성하는 시기로써의 그 의의는 자못 크다고 할 수 있겠다. 다만 춘추전국시대를 연구함에 있어서 사료의 한계와 고고학적 증거의 부족으로 인하여 아직 밝혀지지 않은 많은 부분들이 존재하므로 앞으로의 연구가 진일보하여 보다 선명하게 춘추전국시대를 그려볼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바이다.
키워드
영토국가, 회맹적국제질서, 멸국치현, 세경가, 국인, 변법, 제민지배체제, 우경, 철기
참고문헌
신채식, 동양사개론, 삼영사, 2002
서울大學校東洋史學硏究室 編, 『講座中國史Ⅰ』 이성국 「春秋戰國時代의 國家와 社會」 지식산업사 2003
이춘식, 중국 고대사의 전개, 새론서원, 1997
조관희, 『한권으로 정리한 이야기 중국사』, 청아출판사,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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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9.09.17
  • 저작시기200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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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552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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