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어노문학] 바흐친 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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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노어노문학] 바흐친 전기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없음

본문내용

해 칸트를 필요로 했다. 바흐친은 시간과 공간에 대한 칸트의 사상을 받아들이지만 "이것들을 '선험적' 형식이 아니라 가장 직접적인 실재의 형식들로서 간주하는" 면에서 칸트와 다르다.
자신이 여전히 마르부르크 철학에 열렬했던 초기시절에도 바흐친은 통일성에 대한 코헨의 강조에는 의견을 달리했다.『예술과 책임』에서 볼 수 있듯이 바흐친은 그가 정신과 세계 사이의 칸트의 구별을 받아들였다는 점에 한해서 신칸트주의자들보다는 칸트에 가까웠다. 만일 칸트의 정신과 세계의 종합을 하나의 저울대로 본다면 코헨은 저울대에서 정신 쪽으로 기운다는 점에서 "우파"이며 바흐친은 반면에 세계의 직접성의 역할을 보다 주장한다는 점에서 칸트의 "좌파"라고 할 수 있다. 합리주의와 함께 통일성에 대한 코헨의 열망이 바흐친을 마르부르크의 현인인 그에게로 이끈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과정 즉 경험의 "주어져 있지 않음", 또 이러한 태도가 약속해 주는 열려 있음과 활력―출구loophole―을 코헨이 강조했다는 것이 바로 바흐친을 매혹한 부분이었다.
바흐친은 그 위대한 칸트해석자가 그 자신만의 독특한 공격적인 지적 방식으로 신을 찾는 자가 되었던 코헨의 후기 저작들에 대해 특히 공감을 느끼게 된다. 윤리적 관심사에 대한 하나의 줄기가 칸트에서 코헨을 거쳐 바흐친의 대화주의로 이어져 내려온다. "철학자나 학자의 신이 아닌―아브라함의 신, 이삭의 신, 야곱의 신"에게 했던 파스칼의 호소에서 극적으로 표현되어 있는 신앙과 지식 사이의 간격을 극복하는 문제는 이 세 사람의 머리에서 언제나 떠나지 않고 있었다. 파스칼은 철학자들의 신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의 문제에 대해 스스로 자신을 포기하고 완전히 신앙에 들어감으로써 답을 구했다. 칸트나 코헨에게는 "철학자들의 신"에 대한 관심을 아브라함에게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출애굽기 3장 15절)"라고 말한 신의 직접적인 현존으로 무조건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있을 수 없었다. 칸트는 신의 존재에 대한 근거를 철학에서 찾으려 했다. 또 그는 이것이 신학에서 제공한 논의보다 훨씬 강력한 것임이 증명되기를 바랐다.
칸트와 마찬가지로 코헨도 이성과 신앙, 형이상학과 신학, 철학자들이 신과 아브라함의 시니 사이의 간격을 극복하려 애썼다. 그의 생애 마지막 몇 년간을 자신의 저작과 이름이 같은 마르부르크에 있는 대학을 떠나 베를린으로 가서 유태교 연구학회에서 활동했다. 이것은 그의 삶의 두 가지 주요 관심사, 즉 체계적인 철학과 독일에서의 유태인 문제에 대한 활동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그 자신의 신념을 반영하고 있다. 그는 1912년부터 1918년 죽을 때까지 6년간을 독일인이자 유태인 사상가로서의 자신의 경력에 대한 총괄적 진술이 될『유태교에서 근원을 찾아 본 이성 종교』라는 책을 저술하는 것으로 보내는데 이 책은 고전형이상학을 해부르 전통에 조화시키려는 시도였다. 신을 하나의 지적인 개념으로서 옹호하는 것과 신을 직접 경험하려는 말로 표현되지 않은 열망 사이의 고통스러운 그의 분투가 바흐친에게 영향을 주었다. 코헨이 신은 구현되지 않은 하나의 사상이라고 주장할 때의 그 격렬함은 그에게 있어 아브라함의 신의 직접적인 호소를 거부하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보여 준다. 코헨은 칸트에서 절정을 이루는 서구 형이상학과 토라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유태교 사상의 줄기 사이에 하나의 통일체를 이루려고 했다. 그가 칸트의 이원론을 일원화하려 한 것은 유일신으로서의 신이 필요함을 역설한 것과 결합된다. 그는 이렇게 적고 있다. "칸트의 신학에서 특징적인 것은 비개성적인 것……진정으로 영적인 원칙―신이 하나의 사상으로 숭고화된 것이다. 그리고 이것에 못지 않은 것이 바로 신에 대한 유태적 사상이 갖는 저 깊은 토대이다."
칸트의 관심을 끌었던 정신과 세계 사이의 커다란 간격은 코헨에게는 신과 인간 사이의 간격으로 다루어진다. 코헨 역시 다급하게 그것을 극복하기를 바랐기 때문에 칸트와 마찬가지로 이러한 간격을 깊고 예리하게 느꼈다. 코헨은 통일성의 가능성 형태들에 많은 관심을 가졌고 마침내 그가 인간과 신 사이의 유대로서 제시한 용어는 "거룩함"이었다. 그는 레위기 19장 2절 "너희는 거룩하라.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를 "거룩함이란……인간에게는 하나의 의미를 의미하지만 신에게는 존재를 나타낸다."라고 해석한다. 코헨은 성령은 단순히 "관계를 맺어주는 연결부"이고 신은 "상호관계"라고 주장했다. 코헨은 실재의 두 가지 다른 층위 사이의 간격과 그것을 중재하려는 용어를 찾아내려는 필연적인 과업을 강조한 점에서 바흐친과 유사하다.
바흐친의 경력 초기에 칸트뿐 아니라 마르부르크 학파의 그의 추종자들도 사상으로서의 신가 경험으로서의 신 사이에 있는 긴장을 해결하는데는 성공하지 못했음이 명백해진다. 그들은 지나치게 관념화의 방향으로 치우쳤다. 바흐친은 철학을 신학과 일치시키려는 당시 진행중이던 시도를 계속한다. 만일 그를 칸트와 파스칼이 각기 극과 극에 위치하고 있는 스펙트럼에 놓아 본다면 바흐친은 보다 파스칼에 가까운 곳에 놓일 것이다. 그러나 그의 많은 초기 저작들, 특히 강연들은 그러한 신학보다는 종교철학, 즉 기도가 통할 수 있는 세계를 이해하고 또 그것을 묘사하려는 시도에 관련되어 있었다. 피가 통하지 않는 사상들에 대한 바흐친의 의심과 이것에 걸맞는 극도로 개별적인 것에 대한 편애는 아브라함의 신에 대한 신비적이고 내부지향적이고 개인적인 인식으로는 표현되지 않았다. 바흐친은 산 환델라 크루스(역주 : John of the Cross : 1542-91 스페인 신비주의자)가 "고립된 것으로부터 고립된 것으로의 도피"라고 부른 것에서가 아니라 이와 정반대되는, 언어, 다시 말해 발화에 의해서 연결될 수 있는 인간들 사이의 공간 속에서 신을 찾았다. 신의 위치를 정적인 상태와 침묵 속에서 찾는 대신 그는 활력과 의사소통에서 찾았다. 신과 인간 사이의 연관을 찾아내는 데 있어서 바흐친은 사회와 언어 속에 있는 인간들 사이의 관계를 가능케 하는 힘들에 관심을 집중했다.
*참고문헌
K. 클라크/M. 홀퀴스트 지음, 이득재/강수영 옮김, <<미하일 바흐친>>, 문학세계사, 1993.
  • 가격30,000
  • 페이지수36페이지
  • 등록일2009.10.17
  • 저작시기2008.10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557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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