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치품과 일상용품
본 자료는 4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해당 자료는 4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4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소개글

사치품과 일상용품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 론
Ⅱ. 본 론
- 사치는 뒤늦게 나타났다
- 1550년부터 육류 소비가 감소하다
- 기상천외한 식탁
- 훌륭한 매너가 서서히 확립되다
- 일상의 양식 : 소금
- 일상적인 음식 : 해산물 - 육식을 하는 유럽
- 그래도 아직은 유럽이 우위를 차지했다
- 식탁 차리기
- 그리스도의 식탁에서
- 일상적인 음식 : 유제품, 지방, 계란
- 대구잡이
- 설탕이 세계를 정복하다


- 1650년 이후 후추가 인기를 잃다
Ⅲ. 결 론

본문내용

아가서 프랑스나 덴마크와의 경쟁에 대항했다. 그들은 또한 중국, 일본, 벵골, 페르시아 등지로부터의 공급을 수정에 장악하려고 노력했으며, 이렇게 하여 유럽에서 수익이 떨어진 것을 아시아 방향으로의 교역을 증가시킴으로써 만회하게 되었다.
매년 유럽에 도착한 후추의 양은 1680년경에는 포르투갈이 독점을 누리던 시대에 비해서 2배 이상이 되었다. 1715년부터 1732년까지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판매한 양에서 보듯이 이제 어느 정도 한계에 도달한 듯했다. 확실한 것은 후추가 더 이상 베네치아가 부동의 영광을 누리던 시대에 그러했던 것처럼 다른 향신료들까지 주도하는 지배적인 상품은 아니게 되었다는 점이다. 1648-1650년에만 해도 암스테르담에서 동인도회사의 무역 중 후추가 첫 번째 자리를 차지했지만(전체의 33%를 차지했다), 1778-1780년에는 직물(비단과 면화 32.66%), 섬세한 향취의 향신료(24.43%) 차와 커피(22.92%)에 뒤이어 겨우 네 번째 자리(11%)를 차지했을 뿐이다. 이것은 사치품 소비가 끝나고 대중적인 소비가 시작된 전형적인 경우일까? 아니면 과도했던 사용이 쇠퇴한 것일까?
이 쇠퇴의 원인으로서 커피, 초콜릿, 알콜, 당배 등과 같은 새로운 사치품의 확산, 또 나아가서 서구의 식탁을 조금씩 조금씩 다양화시킨 새로운 채소류의 보급을 드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들 수 있는 요인이 1600년 이후, 또는 그 이전부터라도, 오래된 음식 전통으로부터의 단절이라고 할 수 있는 것으로서 고기의 소비가 줄었다는 것이다.
단순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17세기에 프랑스 사람들은 이미 향신료를 버리는 대신 향수에 대한 열정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스튜, 과자류, 리쾨르 주, 소스 등에 호박, 붓꽃, 장미수, 오렌지꽃, 꽃박하, 사향 등의 향수를 썼던 것이다. 계란에다가도 “향수”를 뿌리는 것을 생각해보라.
설탕이 세계를 정복하다
사탕수수는 갠지스 델타와 아샘 지방 사이의 벵골 연안이 원산지이다. 오랫동안 사람들은 설탕물을 얻기 위해서, 또 당시 약으로 여기던 설탕을 얻기 위해서 이 야생식물을 정원에서 기르게 되었다. 10세기에 설탕은 살레르노 학파의 약전에 등장했다. 그렇지만 이 시대 이전부터 인도와 중국에서는 설탕을 음식으로서 사용하기 시작했다. 중국에는 8세기경에 사탕수수가 도입되었는데 광주 근처에 있는 광동성의 기복이 심한 지역에서 잘 적응했다. 광주는 이미 중국의 가장 큰 항구였다. 그리고 그 배후지는 숲으로 덮인 지역이었는데, 사실 설탕의 제조에는 많은 연료가 필요한 것이다. 수세기 동안 광동성은 중국의 설탕 생산의 핵심지역이었으며, 17세기에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이곳에서 중국과 대만의 설탕을 유럽에 수출하는 것을 어렵지 않게 조직했다.
10세기에 사탕수수는 이집트에 도달했고 이곳에서는 발전된 방식으로 설탕을 제조했다. 십자군 원정 군인들이 시리아를 상실한뒤(1291) 설탕은 키프로스로 옮겨져 이곳에서 빠른 성공을 거두었다.
아랍 상인들이 유통시키던 설탕은 키프로스에서의 성공을 거두기 전부터 이미 시칠리아에서, 그리고 나서 발렌시아에서 번성했다. 15세기 말에는 모로코의 수스 평야에 도달했고, 곧이어 마데이라 섬, 아조레스 제도, 카나리아 제도, 그리고 기니 만의 상 투메 섬과 프린시페섬에 도착했다. 1520년경에 설탕은 드디어 브라질에 이르렀으며 이곳에서 16세기 후반부터 확고하게 번성을 구가했다.
17세기에 이르러서는 마르티니크 섬, 과달루페 섬, 네덜란드령 쿠라사오 섬, 자메이카 섬, 그리고 산토 도밍고에 도달하게 되었고, 이곳에서 1680년경부터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제부터 설탕 생산은 끊임없이 증가했다. 15세기에 키프로스의 설탕은 기껏해야 수천을 헤아렸으나 전성기때인 18세기에는 산토 도밍고에서만 7만톤이 생산된 것이다. 1800년에 영국에서는 1년에 15만 톤의 설탕을 소비했는데 이것은 1700년에 비해 약 15배로 늘어난 것이다.
이렇게 보듯이 대중의 선호에도 불구하고, 또 가격이 많이 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설탕은 여전히 사치품이었다. 사탕무우가 도입된 것도 사탕수수를 이용한 설탕 생산을 낮은 수준에 붙들어두게 만든 한 이유가 되었다.
사탕수수의 보급은 열대기후 지역에만 한정되었다. 중국에서 사탕수수는 양자강을 넘지 못했다. 또 이것은 상업적, 공업적 요구사항을 만족시켜야 했다. 많은 노동력과 값비싼 기구의 설치를 필요로 했다.
사탕수수는 축력, 수력, 풍력을 이요해서, 아니면 중국에서처럼 사람의 팔힘으로 롤러를 움직여서 으깨야 했다. 이렇게 해서 얻어낸 즙은 적당한 처리, 준비, 주의를 요하며 오랫동안 구리통 속에서 끓인다. 그것을 흙으로 된 주형 속에서 결정화하면 조당을 얻는다. 이 조당은 유럽에서 다시 정제과정을 거치며 원재료의 재배만큼이나 수익성이 좋았다. 이 때문에 정제업자와 설탕업자 사이에 갈등이 있었다. 설탕업자들은 현지에서 모든 과정을 다 하려고 했다. 그리고 또 다른 장애물이 있었다. 사탕수수를 재배하는 식민지에서는 식량재배로 거의 한조각의 땅도 남지 않았기 때문에 식량을 자급자족하지 못했다. 소금 친 쇠고기와 밀가루를 사탕수수 재배 식민지에 공급하는 영국식민지는 그 대신에 설탕과 럼주를 받았지만 그들 자신이 곧 럼주를 생산하게 되었다. 요약하여 말하면 설탕 혁명이란 사실 극도로 느리게 진행되었다. 19세기 초에도 설탕은 아직 깊이있게 널리 보급되지는 못했다. 설탕에 관해서 보자면 모든 사람들이 식탁에서 먹을 수 있었다고 결론을 내려서는 안 된다. 프랑스 혁명중 최고가격제를 시행하던 시기에 파리에서 설탕부족이 야기한 소요가 떠오른다.
Ⅲ. 결론
인간 삶에 있어서 절대적인 것은 없다. 인간이란 유기체가 그러하듯 결국 역사속에 흐르는 수에 대한 여러 가지 현상들도 흥망성쇠를 거듭하는 것이다. 본고에서 살펴보았던 다양한 음식과 기호품, 그와 함께 펼쳐졌던 기상천외한 식탁풍경, 이러한 것들도 결국 수와 함께 사치 혹은 대중의 영역에서 변화하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다음에 펼쳐질 보다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생필품(예를 들면 물)에 관한 이야기는 어떨까? 수와 관련해서 또 다른 그림이 그려질 것이다. 궁금하다.
  • 가격1,000
  • 페이지수14페이지
  • 등록일2009.11.03
  • 저작시기2015.8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559468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