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군 전쟁의 발생원인과 진행과정 및 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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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십자군 전쟁의 발생원인과 진행과정 및 의의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지 쫓아가 살육하여 성전은 피바다를 이루었다. 여자와 어린아이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교도에 대한 증오로 똘똘 뭉친 십자군들의 야만적인 살육에 2주일 동안 유대교와 이슬람교도 주민의 과반수가 학살당했다. 1195년에 출범한 제4차 십자군 원정에는 베네치아의 상인들이 개입하여 농간을 부렸다. 그들은 항해 비용을 자신들의 경쟁 도시인 아드리아 해의 달마치아 쪽에 있는 자리를 공격하고 약탈함으로써 갚으라고 부추겼고, 비잔틴 제국이 형제 사이에 황제의 자리를 놓고 다툼이 벌어진 것을 이용하여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했다. 그들은 서방의 역사가 빌라르두엥이 경탄했던 것처럼 "세계가 창
조된 이래 이와 같이 거대한 일이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진 일이 없었다." 고 극찬한 도시 콘스탄티노플을 유린하고 약탈했다. 1212년에는 신의 계시를 받았다는 소년이 나타나 "소년 십자군"을 제창하자 수천명의 소년들이 모여들었다. 이는 지난날의 십자군이 성공하지 못한 것은 마음이 때묻은 어른들이 출전했기 때문으로서, 마음이 순수한 어린이들이 출전하면 반드시 승리한다는 주장에서 이루어진 일이었다. 그러나 지중해 항구에 도착하기도 전에 난파했고, 가까스로 알렉산드리아에 흘러간 서너 척의 배에 타고 있던 어린 전사들은 마르세유의 악덕 선주에 의해 노예로 팔려버리고 말았다. 이때 독일의 어린이 십자군은 항해 도중 일부 어른들의 설득에 따라 귀국하여 무사할 수 있었다.
이처럼 자인한 만행으로 인해 십자군은 실패로 돌아갔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십자군들이 저질은 광신적이고도 잔인한 살육, 그리고 이교도에 대한 적대적인 태도는 이슬람교도들의 분노를 샀다. 이슬람교도들은 "지하드"의 개념을 새로이 떠올리며 "이교도" 인 카톨릭 세력에 맞서 싸울 것을 결의하며 단결하기 시작했다. "성전"을 부르짖고 출병한 유럽세계의 십자군이, 잠자고 있던 이슬람의 "지하드" 의 의식을 일깨운 꼴이었다. 결국 십자군은 성지를 회복하지 못했다. 서방에 군사적인 원조를 요청했던 비잔틴 제국은 십자군에 의해 도리어 짓밟히고 몰락했다. 십자군을 주창한 교황권도 단기적으로는 상승 효과를 가져왔으나 장기적으로 본다면 원정의 실패로 기독교 교도들의 마음 속 신앙의 열정을 식혀놓았고, 황제 위에 군림하여 "신성 불기침" 으로 여겨졌던 교황에 대한 불신을 초래했다. 기사계급이었던 봉건 영주들은 장기간의 십자군 원정을 통해 전사하거나 몰락하였다. 이러한 결과는 그들이 잘못 시작한 제1차 원정에서부터 들어난 결과였는지도 모른다.
4. 십자군 전쟁의 의의와 영향
성지 회복이라는 명목에서 출발한 십자군은 약200년 동안 수많은 제후, 기사, 농민들의 원정으로 이어졌으나, 본래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채 막을 내려야 했다. 그러나 십자군 전쟁은 여러 측면에서 유럽 사회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다.
첫째, 십자군을 주도한 교황권은, 전쟁 초기에는 더욱 강화되어 특히 4회 십자군 전쟁을 주도한 인노켄티우스 3세 때 절정에 달하였다. 그러나 십자군 전쟁이 계속 실패하면서 교황권은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14세기 초 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가 프랑스 국왕 필리프 4세와의 갈등에서 굴복하고 교황청을 아비뇽으로 옮긴 사건 이후 교황과 로마교회의 권위는 크게 실추되었다.
둘째, 교황권의 쇠퇴와 함께 봉건영주들이 몰락하여 봉건 체제가 큰 타격을 받았다. 왜냐하면 십자군에 참가한 제후들과 기사들이 오랬동안 전쟁을 치르느라 자신의 영지를 돌볼 수가 없어 지대 수입이 줄어든데다, 전쟁 비용을 조달하기 위해 가산을 탕진한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또한 이슬람과의 전쟁 중 이슬람이 화약과 화포를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전술에 큰 변화가 일어나 더 이상 유럽의 군대에 기사 계급이 필요 없어진 것도 하나의 이유가 되었다.
셋째, 교황과 봉건 제후의 몰락과는 반대로 국왕의 권위는 눈에 띄게 강해졌다. 기존에교황과 봉건 영주들이 독자적으로 행사했던 과세권과 재판권을 회수하고, 몰락한 봉건 제후들을 궁중으로 불러들어 관료로 편성하였으며, 기사 계급 대신 상비군을 정비하여 중앙 집권 체제를 확립하여 나갔던 것이다.
넷째, 십자군 전쟁 중 지중해를 중신으로 한 동방 무역이 성행하면서 베네치아, 피렌체와 같은 이탈리아 도시들이 크게 발달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한 중세 도시 시민들의 권위도 신장되었다.
Ⅲ. 結 論
기독교와 이슬람교 사이의 200년에 걸친 길고도 지루한 공방전이 기독교권의 참패로 막을 내렸다. 하지만 유럽 어느 곳에서도 슬픔이나 분노의 느낌은 없다. 그 이유는 십자군은 이미 본래의 정신을 잃었기 때문이다. 1095년 클레르몽에서 교황 우르바누스 2세가 예루살렘 탈환을 호소했을 때 우럽인들은 우물 안 개구리였다. 십자군은 발걸음도 당당하게 동로마 콘스탄타노플에 들어서자마자 눈이 휘둥그레졌다. 휘황찬란한 건물과 깨끗한 주민들, 듣도 보도 못한 갖가지 진기한 물건들에 혼이 빠져나갈 정도였다. 결국 십자군 전쟁은 유럽인이 유럽 장원이라는 좁은 울타리를 벗어나 더 넓은 세계를 향해 눈이 뜨도록 해준 고마운 전쟁이라고 할 수 있다. 유럽 모습 자체가 십자군 전쟁으로 많이 변화했다. 한몫잡기 위해 장원을 떠나는 이들이 늘고, 또 돌아온 이들이 다시 장원으로 돌아가지 않음으로써 도시들이 속속 성장하고 있다. 이탈리아의 제노바, 피렌체 등이 다 이런 식으로 발전하고 있는 도시들이다. 하지만 십자군 전쟁은 어째든 실패한 전쟁이다. 애초에 교황의 목적은 동방정교회를 단일한 기독교권으로 흡수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결과는 오히려 갈등을 증폭시키는 것으로 드러나고 말았다. 이슬람권에도 "증오"와 "복수" 의 감정만 선물했다.
십자군 전쟁이 시작된 이래 약 900년 동안, 그 평가는 찬부양론으로 나뉘어 학설도 국한였으나, 이를 단순한 군사원정의 기록으로서가 아니라 서유럽 중세 후반기의 사회상황을 반영하는 종합적인 전체상으로서 관찰하고, 거기에서 문화적 고양기의 서유럽인의 본질을 발견하려는 시도가 바람직하다. 지중해 세계에서 수세기에 걸쳐 지속된 동서교류의 영향은 매우 현저하며, 연안 여러 민족이 장기적 교류를 통해 정신적ㆍ물질적 시야를 넓혀 마침내는 세계적 규모의 "대항해 시대"를 여는 밑바탕이 되었다.

키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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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18페이지
  • 등록일2009.12.14
  • 저작시기2009.11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567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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