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고구려 동천왕 18년(224) 위나라 장수 관구검이 고구려 수도 환도성을 침공하여 많은 문 헌들을 소각하였다.
2.백제 의자왕 20년(660)나당 연합군의 침공으로 사자성이 함락되면서 사고가 소실되었다.
3.고구려 보장왕 27년(668) 당나라 장수 이적이 평양성을 공격하여 전적을 모두 탈취하였음.
4.신라 경순왕 원년(927) 후백제의 견훤이 경애왕을 치고 신라책을 전주(완주, 후백제 수도)로 옮겼다가 왕건에게 토벌당할 때 방화 소각됨.
5.고려인종 4년(1126) 금나라에 서표를 바친 후 주체 서적은 철수해 감.
6.고려 고종 20년(1233) 몽고난으로 흘필렬에 의해 소각됨. 삼한고기, 해동고기가 이때 없어짐.
7.조선 태종 11년(1411) 오부학당을 송나라 제도에 의하여 설치하면서 유교를 장려하고, 비교유학 서적 일체를 소각함.
8.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으로 무수한 전적(典籍)이 방화에 의하여 소실됨.
9.병자호란(1636)때 아까운 사서들이 수없이 잿더미가 되어 버림.
10.일본강점(1910) 이후 일본이 식민지 교육정책(조선사편수회)으로, 군경을 동원하여 탈거, 개조 혹은 소각해 버림.
2.백제 의자왕 20년(660)나당 연합군의 침공으로 사자성이 함락되면서 사고가 소실되었다.
3.고구려 보장왕 27년(668) 당나라 장수 이적이 평양성을 공격하여 전적을 모두 탈취하였음.
4.신라 경순왕 원년(927) 후백제의 견훤이 경애왕을 치고 신라책을 전주(완주, 후백제 수도)로 옮겼다가 왕건에게 토벌당할 때 방화 소각됨.
5.고려인종 4년(1126) 금나라에 서표를 바친 후 주체 서적은 철수해 감.
6.고려 고종 20년(1233) 몽고난으로 흘필렬에 의해 소각됨. 삼한고기, 해동고기가 이때 없어짐.
7.조선 태종 11년(1411) 오부학당을 송나라 제도에 의하여 설치하면서 유교를 장려하고, 비교유학 서적 일체를 소각함.
8.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으로 무수한 전적(典籍)이 방화에 의하여 소실됨.
9.병자호란(1636)때 아까운 사서들이 수없이 잿더미가 되어 버림.
10.일본강점(1910) 이후 일본이 식민지 교육정책(조선사편수회)으로, 군경을 동원하여 탈거, 개조 혹은 소각해 버림.
본문내용
를 끊고 청나라에 복속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관계는 1895년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일본에 패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전후에는 많은 고아들의 수양문제와, 수만에 이르는(어느 기록에는 50만) 납치당한 이들의 속환문제가 대두되었다. 특히 청나라 군은 납치한 양민을 전리품으로 보고, 속가를 많이 받을 수 있는 종실·양반의 부녀를 되도록 많이 잡아가려 하였으나, 대부분 잡혀간 이들은 속가를 마련할 수 없는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10.일본강점(1910) 이후 일본이 식민지 교육정책(조선사편수회)으로, 군경을 동원하여 탈거, 개조 혹은 소각해 버림.
일제의 조선사료 강탈기간 중이던 1916년 1월 중추원 산하 조선반도사편찬위원회로 발족하여 1922년 12월 조선총독부 산하 조선사편찬위원회로 바뀌었다.
조선사편찬위원회는 일본민족의 우위성을 고취하고 역사교육을 통해 한국민의 민족의식을 배제하고자 설립되었다. 그러다 학문적으로 더욱 권위 있는 기구로 만들기 위하여 1925년 6월 일황칙령에 의해 조선사편수회로 명칭을 바꾸고 독립된 관청으로 격상되면서 조직이 확대 개편되었다.
1925년 10월 8일 제1회 위원회를 개최했는데, 이 회의에서 결정한 주요 사항은 관계 자료의 수집방안이었다. 초기에는 강제 수색과 압수를 통해 사료를 수집했으나 수장자들이 비장하는 바람에 수집이 어려워지자 대여 형식으로 방법을 완화했다.
1910년 11월부터 1937년까지 27년간 전국을 누벼 조선사료를 광범위하게 수집했고, 전국의 도·군·경찰서 등 관청에 협력할 것을 강력히 지시했다.
1932∼1938년 식민사관에 바탕한 조선사(37책), 조선사료총간(20종), 조선사료집진(3책) 등을 간행하였다. 특히 일제는 '단군조선'을 없애려고 편찬기구의 개편 때마다 한국사의 상한선을 아래로만 끌어내렸다. 조선사 편찬 초기부터 16년 2개월간 앞장서서 관여했던 일본인 이마니시는 단군조선을 신화로 왜곡하고 한국사를 왜곡·말살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또한 관제를 보면 일제가 얼마나 단군조선 등 한국사 왜곡편찬에 심혈을 기울였는지 알 수 있다. 조선사편수회 고문에 부일역적들인 이완용, 권중현을 앉히고 박영효·이윤용을 비롯해 일본인 거물들과 어용학자들을 위촉하였다. 조직구성에는, 위원장급인 회장은 현직 정무총감들이 맡아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일본인들을 참여시켰다. 고문·위원·간사와 편찬사무를 담당하는 수사관 3명, 수사관보 4명, 서기 2명을 두었다
10.일본강점(1910) 이후 일본이 식민지 교육정책(조선사편수회)으로, 군경을 동원하여 탈거, 개조 혹은 소각해 버림.
일제의 조선사료 강탈기간 중이던 1916년 1월 중추원 산하 조선반도사편찬위원회로 발족하여 1922년 12월 조선총독부 산하 조선사편찬위원회로 바뀌었다.
조선사편찬위원회는 일본민족의 우위성을 고취하고 역사교육을 통해 한국민의 민족의식을 배제하고자 설립되었다. 그러다 학문적으로 더욱 권위 있는 기구로 만들기 위하여 1925년 6월 일황칙령에 의해 조선사편수회로 명칭을 바꾸고 독립된 관청으로 격상되면서 조직이 확대 개편되었다.
1925년 10월 8일 제1회 위원회를 개최했는데, 이 회의에서 결정한 주요 사항은 관계 자료의 수집방안이었다. 초기에는 강제 수색과 압수를 통해 사료를 수집했으나 수장자들이 비장하는 바람에 수집이 어려워지자 대여 형식으로 방법을 완화했다.
1910년 11월부터 1937년까지 27년간 전국을 누벼 조선사료를 광범위하게 수집했고, 전국의 도·군·경찰서 등 관청에 협력할 것을 강력히 지시했다.
1932∼1938년 식민사관에 바탕한 조선사(37책), 조선사료총간(20종), 조선사료집진(3책) 등을 간행하였다. 특히 일제는 '단군조선'을 없애려고 편찬기구의 개편 때마다 한국사의 상한선을 아래로만 끌어내렸다. 조선사 편찬 초기부터 16년 2개월간 앞장서서 관여했던 일본인 이마니시는 단군조선을 신화로 왜곡하고 한국사를 왜곡·말살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또한 관제를 보면 일제가 얼마나 단군조선 등 한국사 왜곡편찬에 심혈을 기울였는지 알 수 있다. 조선사편수회 고문에 부일역적들인 이완용, 권중현을 앉히고 박영효·이윤용을 비롯해 일본인 거물들과 어용학자들을 위촉하였다. 조직구성에는, 위원장급인 회장은 현직 정무총감들이 맡아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일본인들을 참여시켰다. 고문·위원·간사와 편찬사무를 담당하는 수사관 3명, 수사관보 4명, 서기 2명을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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