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경시대의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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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이념적(理念的) 배경

2. 고유색(固有色) 발현(發顯)

3. 명․청문화(明‧淸文化)의 영향과 화려한 종말

본문내용

던 것이다. 그래서 미호 문하에서 만포(晩圃) 심환지(沈煥之, 1730-1802), 즉지헌(則止軒) 유언호(兪彦鎬, 1730-1796), 근재(近齋) 박윤원(朴胤源, 1734-1799), 노주(老洲) 오희상(吳熙常, 1763-1833) 같은 인물들이 배출되어 학계와 정계를 주도하게 되니 자연 시대분위기가 그와 같은 양상으로 바뀌게 되었던 것이다. 이에 회화분야에서는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 1745-1806)와 고송유수관(古松流水館) 이인문(李寅文, 1745-1824), 긍재(兢齋) 김득신(金得臣, 1764-1822), 초원(蕉園) 김석신(金碩臣, 1768-?) 등이 출현하여 겸재세대를 계승하려는 강한 의지를 나타내게 되는데 공교롭게도 이들은 모두 화원화가들이었다. 이들이 화원화가라는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은 아니다. 진경시대 초기문화를 주도하면서 조선고유색 짙은 화풍을 창안해 내던 인물들이 한결같이 조선성리학 이념에 투철한 사대부 화가들이었다는 사실과 대조적인 현상이기 때문이다. 진경산수화풍을 창안해 낸 겸재와 풍속화풍의 시조인 관아재가 그런 대표적인 인물이다. 새로운 양식의 창안이라는 것은 그 뿌리가 되는 바탕이념에 대한 선구적 이해를 전제로 해야 하기 때문에 이념집단 중에서도 선두주자만이 그 일을 감당해 낼 수 있다. 그러나 화원화가들은 왕실 전속 전문화가이니 왕실이나 궁척들의 주문에 따라 기존의 화풍을 활용하여 보다 훌륭한 그림을 그려내는 것이 그들의 몫이었으므로 항상 그들은 회화사에서 대미(大尾)를 장식하는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이들이 현재화풍을 계승하지 않은 것은 현재세대의 겸재세대에 대한 도전이 실패한 사실을 비교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인데 그렇다고 현재세대의 업적을 도외시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 이를 참고하여 제일세대의 화풍에서 미진했던 부분을 보완해 나가려는 자세를 보이고 있다. 단원 그림에서 보이는 다양한 구도감각이 음양대비와 음양조화로 일관하던 겸재의 단조로운 구도감각을 깨뜨리고 있는 것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뿐만 아니라 풍속화에서도 그 인물묘사를 초상화처럼 정확히 해내서 어진도사(御眞圖寫)가 본업이었음을 과시하게 되는데 조선 고유색을 드러내는 진경풍속 양대 화풍 중 특히 풍속화가 이들의 손에서 최고의 발전을 보이면서 대미를 장식하게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화재(和齋) 변상벽(卞相璧, 1730-?)같은 화원화가는 초상화 그리는 기법을 영모화(翎毛畵)에 적용하여 짐승의 모습을 극사실적으로 핍진(逼眞)하게 그려내기도 하였다. 한편 이들이 이처럼 진경풍속화풍의 계승 발전에 매진할 수 있었던 것은 이들의 절대적인 후원자이던 영조와 정조가 진경문화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이들의 양성에 앞장섰던 같은 세대의 정조대왕(1752-1800)은 비록 국왕이지만 당대를 대표할 만한 최고의 학자이자 예술가로 『홍재전서(弘齋全書)』184권 100책이라는 방대한 문집을 남기고 <파초>나 <국화> 같은 그림을 남긴 분이었다. 그래서 정조는 진경문화의 바탕 사상인 조선성리학이 이미 백여년 동안 그 절정을 구가하며 사회를 주도해 왔으므로 이제는 노쇠하여 그 기능에 더이상 기대하기 어렵다는 사실도 간파하게 된다. 이에 정조는 연경사행(燕京使行)의 자제군관(子弟軍官) 출신인 담헌(湛軒) 홍대용(洪大容, 1731-1786), 연암(燕岩) 박지원(朴趾源, 1737-1805) 등 당시 최고집권층 연소자제들을 중심으로 청조고증학(淸朝考證學)을 받아들이려는 북학(北學)운동이 일어나자 규장각(奎章閣)의 제도를 개편하여 이들의 학문활동의 터전을 마련해 주는 등 적극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그 결과 연암의 제자들인 청장관(靑莊館) 이덕무(李德懋, 1741-1793), 냉재(冷齋) 유득공(柳得恭, 1749-1807), 초정(楚亭) 박제가(朴齊家, 1750-1805) 등이 규장각 검서(檢書)가 되어 규장각을 실제 운영하며 청조문화(淸朝文化)를 수용해 들이니 이제부터는 진경문화에 서서히 청조문화의 영향이 배어들기 시작한다. 이는 곧 북학을 이념기반으로 하는 새로운 사회건설을 예고하는 변화의 조짐이었는데 이런 개혁의 움직임이 온건하게 진행되어 갈 수 있었던 것은 신구이념에 정통하였던 문예군주인 정조가 개혁의 속도를 적절하게 조정해 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조선의 고유색 짙은 진경문화는 정조의 치세 하에서 대미(大尾)를 찬란하게 장식하면서 북학문화로 연결되어 갈 수 있었던 것이니, 단원이나 혜원의 풍속화나 화성행궁, 수원성곽 등에서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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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0.01.20
  • 저작시기2008.11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576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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