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도와 진경산수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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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김홍도와 진경산수화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김홍도와 진경산수화

진경산수화의 전개

정선의 진경산수화

김홍도의 회화활동개관

진경산수

사경산수

본문내용

며 화풍으로도 남종화법의 소화가 눈에 띄게 진전되어 있다. 그리고 초가 옆의 연못과 괴명,파초,오곽과 바위,담장,수목 표현은 인왕산곡이나 사울 근교에 있던 자기집 주변 풍경의 충실한 묘사를 보여준다. 특히 이런 양식의 그림은 마당의 학,담장밖의 버드나무와 마부의 모습을 통해서 당시 서원아집도류에서` 번안해 온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보다 더욱 완숙해진 필치와 사경산수의 바탕 은 역시 40대 후반 50대에 나타난다. 그 예로 1791년, 천수경의 속석원시 사회를 그린 「송석원시사야연도」, 1801년에 그린 「삼공불 환도」, 1804년에 그린 「세련계도, 앞의 것들 과 비슷한 시기로 추정되는 「서성우렵도」, 「간정품국도」등 기엽화들이 유존한다.
지금까지 우리 회화사에서 우리 양식을 명쾌 히 정립한 조선시대 후기의 회화 동향속에서 <선인야적도> 김홍도의 진경산수를 조명해 보았다.
김홍도의 진경산수화는 선배인 김응환이 그려 준 금강산도의 예를 통해서 보더라도 도화서의 생활중 정선화풍을 만나면서 출발하였다. 그리 고 정조의 어명으로 김응환과 함께 금강산을 탐 승하고 사군첩을 제작하게 된 것이 결정적인 계 기였다. 그때 받은 감명과 습득한 필치를 바탕 으로 「을묘년화첩」의 「총석정도」를 비롯한 「금강산도권첩」과「병진년화첩」의 단양 「오 순봉도」「사인암도」등 50대에 들어서서 자기 만의 뚜렷한 진경산수화풍을 결정하게 된다. <조어산수도>朝鮮 1796 그것은 그리고자 하는 현장을 충실히 사진하려는 태도, 자신감 넘치는 대상해석과 화면구성, 탁월한 묘사력, 시원하고 활달한 수묵과 담채의 구사등 김홍도의 분명한 조형의지에 따른 것이지만 진경산수에서 김홍도의 더욱 빛나는 진가는 실경선정에 있어 소재주의의 극복에 있다. 즉 표현대상을 명승고적에 한정하지 않고 논두렁, 개울, 언덕, 나무 등 우리 산천에서 흔히 만나는 평이한 풍경에까지 확산하여 시정이 물씬한 화면을 우려내었다. 이는 그의 현실 감각이 집약되는 만년의 사경산수나 인물 풍속 외모 화조에 등장하는 배경산수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거기 표현된 경관은 우리 정서와 밀착하여 우리 자연의 분위기에서 누구나 느낄 수 있는 풍토적 공감대를 구현해 낸 것이다. 이로써 김홍도는 정선 이후 진경산수의 형식을 새롭게 변환시킨 셈이며 김홍도의 진경산수가 정선 못지 않게 평가할 수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 진경표현의 변신은 영조년간의 정선 일파와 선비화가로 지칭되는 후기의 전반 양식이 후반기 정조 순조년간에 절정기 양식의 고전으로 성장하는 면모를 입증할 수 있게 해준다. 또 그의 진경산수화는 풍속화와 함께 영조연간과는 다른 정조 시대의 미적 조형 감각을 대변하며 이렇게 새로이 향상된 김홍도의 진경산수화 등은 인물 풍속과 마찬가지로 자기 양식에 엄격하였던 정선보다 동료 및 후배 화가들에게 크게 파급되었다.
또한 그의 화풍을 따른 화가들을 보면 동료인 이인문, 이병기를 비롯해서 신윤복, 김득신, 김석신, 이유신 , 임득명, 이의양, 이재과 이수민 유준홍 등 18세기 후반 19세기의 개성화 출신들이 대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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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7페이지
  • 등록일2004.06.19
  • 저작시기2004.06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56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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