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벤션기획안 환갑잔치 환갑잔치 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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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환갑의 의의 ················· 2p

2. 행사의 목적 ··············· 2p

3. 행사의 개요 ················ 3p

4. 회갑 일정 ·············· 3p
1) 일정
2) 회갑 식순

5. 운영체제 ·················· 4p
1) 웨딩&연회 서소문점 메뉴
2) 연회장

6. 행사계획 및 세부계획 ············ 5p
1) 행사
2) 예산 세부 계획

7. 지하철 · 버스 대중교통 이용 시 ··········· 6p
1) 지하철 이용 시
2) 버스 이용 시
3) 자가용 이용 시

8. 효과 ················· 7p

9. SWOT 분석 ··················· 7p

10. 기타 ·················· 8p~10p
1) 주변 관광 시설

본문내용

리잡았던 것이다. 10월에 한양으로 도읍을 일단 옮긴 태조는 수도 건설에 박차를 가하여, 12월 3일에 궁궐과 종묘를 짓겠다고 산천신(山川神)에게 고사하고, 이튿날 개기(開基)하여 주야로 작업을 진행, 1395년 9월에 낙성을 보게 되었다. 명칭은 《시경》의 ‘군자만년 개이경복(君子萬年 介爾景福)’이란 글귀에서 따서 경복궁이라 하였다. 궁내에 준성된 전각은 총 390여 칸이었다.
· 창경궁
서울 종로구 와룡동(臥龍洞)에 있는 조선시대의 궁궐이다.
1963년 1월 18일 사적 제123호로 지정되었다. 1484년(성종 15) 당시 생존하였던 세 왕후(세조·덕종\·예종)의 거처를 위해 옛 수강궁 터에 지은 것으로, 이 때 지은 집이 명정전·문정전\·수녕전·환경전\·경춘전·인양전\·통명전과 양화당·여휘당 및 사성각 등이다. 전각의 이름은 서거정(徐居正)이, 정전(正殿)인 명정전의 상량문은 김종직(金宗直)이 지었다. 그러나 창건 당시의 전각은 임진왜란 때 모두 소실되고, 1616년(광해군 8)에 재건된 뒤에도 몇 차례의 화재가 있어, 그때마다 내전이 불탔기 때문에 지금 남아 있는 것은 대체로 임진왜란 후에 재건한 명정전을 비롯한 그 회랑과 그 앞문인 명정문, 창경궁의 정문인 홍화문 등 외전과, 1834년(순조 34) 다시 지은 숭문당·함인전\·환경전·경춘전\·통명전·양화당\·집복헌·영춘헌 등의 내전으로 나눌 수 있다.
궁의 배치를 보면, 동쪽 한가운데에 ‘凸’자 모양으로 불룩하게 나온 중심부분에 있는 중층삼간누문(重層三間樓門)인 홍화문을 들어서면,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금천(禁川) 위에 놓인 옥천교가 있고, 이를 건너면 명정문과 좌우 행랑채가 있다. 이 문을 지나면 널찍한 뜰이 나오고, 그 일직선상의 중층으로 된 기단 위에 명정전이 있다. 홍화문 좌우의 행랑이 이 명정전까지 계속되면서 울타리를 이루어, 창경궁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명정문은 홍화문보다 높은 지대에 있고, 명정전은 명정문보다 한층 더 높은 곳에 있는데, 이러한 예는 창덕궁과 개성(開城)의 만월대에서 볼 수 있다.
그 후 1907년 순종이 덕수궁에서 창덕궁으로 옮기자 이 곳에 동물원과 식물원을 꾸며 오락장으로 삼았는데, 1910년(융희 4) 이름을 창경원(昌慶苑)으로 고치고, 벚꽃나무를 잔뜩 옮겨 심어 일반에게 휴식처로 공개하여 오다가 1986년 8월 창경궁으로 복귀하였다.
· 명동
· 남산
높이 262m이다. 본이름은 목멱산(木覓山)인데, 목멱산이란 옛말의 '마뫼'로 곧 남산이란 뜻이다. 북악산(北岳山)·낙산(駱山)·인왕산(仁王山) 등과 함께 서울분지를 둘러싸고 있는 산의 하나이다. 조선 전기 서울에 왕도(王都)를 정할 때는 여러 산과 더불어 왕도의 위곽(圍郭)을 이루어 그 능선을 따라 성벽이 쌓여졌으나, 오늘날은 서울 중앙에 있으면서 102만 9300㎡ 산지가 남산공원으로 지정되어 서울에서 가장 넓은 공원이 되었다.
· 남산타워
· 동대문 (흥인지문)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1호로 지정되었다, 정면 5칸, 측면 2칸, 중층(重層)의 우진각 지붕이다. 통칭 동대문이라고 한다. 서울 도성에 딸린 8문 중의 하나로서 정동(正東)에 있으며 원래의 이름은 흥인지문(興仁之門)이다.
1396년(태조 5)에 건립되고 1453년(단종 1)에 중수되었으며, 1869년(고종 6)에 이르러 이를 전적으로 개축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화강암의 무사석(武砂石)으로 홍예문(虹門)을 축조하고 그 위에 중층의 문루를 세웠으며 문 밖으로는 반달 모양의 옹성(壅城)을 둘리고 있으나 이것도 1869년(고종 6)에 다시 개축한 것이다. 문루의 아래층은 주위 4면을 모두 개방하였으나 위층은 기둥 사이를 모두 창문과 같이 네모나게 구획하여 각각 한 짝 열개의 판문(板門)을 달았다.
내부는 중앙에 고주(高柱)를 일렬로 배치하였으며 위·아래층의 대량(大樑)들은 모두 이 고주에서 양분되어 여기에 맞끼워져 연결되는 맞보로 되었다. 위층에는 마루를 깔았고 아래층에는 가운데 칸에만 마루를 깔았는데 이는 그 아래에 위치한 홍예문의 윗 부분을 가리는 구실을 한다.
위층 천장은 이 문루가 다포집 계통에 속하는 건축이면서도 성문이라는 특수한 건물이기 때문에 지붕 가구재(架構材)를 전부 노출한 연등천장으로 되어 있다. 공포(包)는 아래층이 내삼출목(內三出目) 외이출목(外二出目)이고 위층은 내외삼출목(內外三出目)인데 쇠서[牛舌]의 형태는 매우 섬약하고 번잡하게 장식화된 부분이 많으며 조선 후기의 쇠퇴된 수법이 곳곳에 엿보인다.
· 동대문운동장 등
  • 가격2,000
  • 페이지수9페이지
  • 등록일2010.01.26
  • 저작시기2009.6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5780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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