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서문
2. 본문
-1장. 진리를 찾는 길
-2장. 사람을 대하는 도리
-3장. 끊임없는 자기계발과 성찰
-4장. 민중에 대한 사랑
-5장. 예를 아는 사람
-6장. 성숙된 삶
-7장. 시와 음악을 즐길 줄 아는 마음
-8장. 덕으로 다스리는 정치
3. 맺음말
2. 본문
-1장. 진리를 찾는 길
-2장. 사람을 대하는 도리
-3장. 끊임없는 자기계발과 성찰
-4장. 민중에 대한 사랑
-5장. 예를 아는 사람
-6장. 성숙된 삶
-7장. 시와 음악을 즐길 줄 아는 마음
-8장. 덕으로 다스리는 정치
3. 맺음말
본문내용
. 공자의“어진 이는 자신을 희생해서 인을 이룬다.”는 말씀도 이 맥락에서 나온 것이었다.
제 5장은 ‘예를 아는 사람’이다. 총 3개의 주제로 되어있는데 예의정신, 이기심을 버리고 예로 돌아가기, 예의범절이 그것이다. 공동체가 원활히 유지되기 위해서는 예와 법이 필요하다. 공자가 살던 당시에도 자기의 이기심을 따라 행동하여 남의 기분을 거슬리거나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경우가 많았던 것 같다. 오죽하면 공자가 이기심을 극복해서 예로 돌아가는 것이 인(仁)이라고 했을까. 오늘날처럼 사람들 간에 지켜야 할 기본적인 예의마저 상실된 시대에는 다시 한번 공자가 얘기한 예의 근본정신과 그 윤리적의미를 되새겨 보아야 할 것 같다. 이런 의미에서 보았을 때 인상 깊은 말씀이 있었는데 공자가 말씀하시길“예는 사치하기보다는 차라리 검소한 것이고 상례는 형식적으로 잘 치르기보다는 차라리 슬퍼하는 것이 옳다.”하셨다. 상갓집엘 간 적이 있었는데 조문 온 사람들은 슬퍼하기 보다는 그저 자리에 참석해서 식사를 해결하고 가는 것처럼 보였다. 물론 슬픈 일이 있을 때 그 슬픔을 같이하러오는 것 자체가 중요한 일이지만 우리나라의 상가풍속이 나는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된다. 소중한 사람이 순리에 따라 곁을 떠났으면 둘러앉아서 그에 관한 얘기를 하거나 추억을 되새기는 게 맞지 않을까? 하지만 우리사회에서는 상주들은 조문객들에게 내줄 음식을 염려하고 조문객은 술을 마시고 얼큰한 얼굴로 시끄럽게 떠들고 간다. 고쳐야 할 법도라고 생각한다.
제 6장은 ‘성숙된 삶’이다. 이 장에는 의연하면서도 여유가 있고 어질고 지혜로우며 검박하면서도 예를 잃지 않는 성숙한 삶을 제시하는 말씀들이 담겨 있다. 사실 이것들은 공자의 시대에 선비들이 중요시하던 덕목이며 오늘날과는 조금 맞지 않는 부분이 많은 것 같다. 총 다섯 개의 주제를 살펴보면 안빈낙도의 여유, 꼿꼿하고 의로운 삶, 어질고 지혜로운 사람, 군자의 길과 소인의 길, 바람직한 처신 이다. 이 중에서 오늘날에 적용될 수 있는 말씀은 어질고 지혜로운 사람편의 말씀인데 공자께서 말씀하시길“덕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훌륭한 말을 하거니와 훌륭한 말을 하는 사람은 반드시 덕이 있는 것은 아니다. 어진 사람은 반드시 용기가 있거니와 용기가 있는 자가 반드시 인이 있는 것은 아니다.” 이 말씀은 들은 적이 있는 유명한 말씀이다. 여기서는 섣부른 말과 행동을 경계하라는 뜻도 포함된 것 같다. 즉 겉으로 봤을 때 훌륭해 보이는 것과 용기 있어 보이는 것은 진정한 지혜와 용기가 아니라는 말씀인 것 같다.
제 7장은 ‘시와 음악을 즐길 줄 아는 마음’이다. 흔히 공자를 근엄한 도덕적 엄숙주의자로 생각하지만 사실‘논어’에서 그의 풍모는 매우 인간적이며 여유 있는 인물로 등장한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장의 주 내용은 일과 놀이, 긴장과 여유, 삶과 예술이 조화를 이룬 공자의 생활담이 담겨있다. 아들에게도 시를 모르면 담벼락을 마주한 것처럼 답답하니 시 공부를 게을리 하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하니 말 다했지 싶다.
제 8장은 ‘덕으로 다스리는 정치’이다. 국민을 편케 하는 정치는 세상의 고통을 덜 수 있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지배자들은 늘 질서와 법을 강조하면서 명령과 지시로 통치하려 한다. 공자는 그런 일방적인 통치의 문제점을 바로잡기 위해서 덕치주의를 내세운다. 문치, 예치, 덕치의 실현과 대동사회의 건설을 꿈꾸던 공자의 정치관이 이 장에 나타나 있다. 그것은 각 주제에서도 알 수 있는데 덕으로 인도하는 정치, 솔선수범하는 지도자, 합리적인 통치, 유능한 인재등용이 그것이다. 이 중 특히 마음에 와 닿은 구절은 공자께서 말씀하시길“덕으로 정치하는 것은 비유하자면, 북극성이 제자리에 머물러 있을 때 뭇별들이 그를 향하는 것과 같다고 할 것이다.”이다. 이 말씀이야말로 정답인 것 같다. 바른 정치를 펴는 사람은 마치 빛과 같아서 모두 우러러 볼 테니 말이다. 이와 비슷한 맥락의 다른 말씀도 있는데 솔선수범하는 지도자 편의 말씀이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길“자기 자신이 바르면 명령하지 않아도 행해지고, 자신이 바르지 못하면 비록 명령한다 하더라도 따르지 않는다.”
이렇게 ‘논어’라는 엄청난 책을 어설프게나마 탐독하고 나자 서문에서 읽었던 필자의 말이 떠오른다. 이 책을 편집한 필자는 논어를 재해석 하게 된 동기를 이렇게 밝히고 있다.
“우리사회는 산업화를 거치면서 정보통신과 과학의 발전으로 인해 물질적 풍요를 누리고 있지만 학자들은 인간의 탐욕으로 인한 지구의 생태학적 위기를 경고하고 있고 치열한 경쟁사회 속에서 벌어지는 인간의 정체성 상실과 도구화 같은 비인간화 문제를 심각하게 우려하고 있다. 이러한 시대에는 무엇보다 인간을 따뜻하게 바라볼 수 있는 인문정신의 회복이 급선무라고 생각한다. 이제 과학기술이 생명을 복제할 수 있는 단계까지 이르고 있는 상황에서 이를 통제하는 인간 이성의 회복과 인간의 생존마저 위협할 정도로 파괴된 자연환경과 만성화 되어가는 전 지구적 경제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윤리와 도덕의 회복이 절실히 요청된다. 필자는 이러한 시각에서 논어를 다시 살펴보고 싶었다. 신 휴머니즘의 관점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인간을 인간으로 바라보고 가난하더라도 다함께 더불어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 수는 없을까 하는 바람을 가지고.”
사실 필자의 말처럼 고도로 과학화되고 급변하는 사회인 지금에 이르러서 논어를 다시 읽고 재평가하는 것은 부질없는 짓 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약용도 “만민을 윤택하게 하고 만물을 번육케 하는”, 자연과 인간이 공존하는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에 의해 ‘논어’는 끊임없이 새로운 시각에서 조명될 필요가 있다고 하였다. 이 분들의 말처럼만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란 생각을 하며 ‘논어’의 시간에서 이만 빠져나오고자 한다.
분명 한 구절구절마다 곱씹고 되새겨 보며 생각해야 할 뜻이 담겨 있겠지만 솔직히 도저히 내 수준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비유적 표현과 옛 표현들이 나를 힘들게 했다. 이해의 한계를 느끼며 스스로가 한심하기도 했지만 시간이 흐른 뒤에 다시 ‘논어’를 읽을 때는 적어도 이해가 안가는 구절이 없도록 스스로를 단련해보자 라는 결심이 선다.
제 5장은 ‘예를 아는 사람’이다. 총 3개의 주제로 되어있는데 예의정신, 이기심을 버리고 예로 돌아가기, 예의범절이 그것이다. 공동체가 원활히 유지되기 위해서는 예와 법이 필요하다. 공자가 살던 당시에도 자기의 이기심을 따라 행동하여 남의 기분을 거슬리거나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경우가 많았던 것 같다. 오죽하면 공자가 이기심을 극복해서 예로 돌아가는 것이 인(仁)이라고 했을까. 오늘날처럼 사람들 간에 지켜야 할 기본적인 예의마저 상실된 시대에는 다시 한번 공자가 얘기한 예의 근본정신과 그 윤리적의미를 되새겨 보아야 할 것 같다. 이런 의미에서 보았을 때 인상 깊은 말씀이 있었는데 공자가 말씀하시길“예는 사치하기보다는 차라리 검소한 것이고 상례는 형식적으로 잘 치르기보다는 차라리 슬퍼하는 것이 옳다.”하셨다. 상갓집엘 간 적이 있었는데 조문 온 사람들은 슬퍼하기 보다는 그저 자리에 참석해서 식사를 해결하고 가는 것처럼 보였다. 물론 슬픈 일이 있을 때 그 슬픔을 같이하러오는 것 자체가 중요한 일이지만 우리나라의 상가풍속이 나는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된다. 소중한 사람이 순리에 따라 곁을 떠났으면 둘러앉아서 그에 관한 얘기를 하거나 추억을 되새기는 게 맞지 않을까? 하지만 우리사회에서는 상주들은 조문객들에게 내줄 음식을 염려하고 조문객은 술을 마시고 얼큰한 얼굴로 시끄럽게 떠들고 간다. 고쳐야 할 법도라고 생각한다.
제 6장은 ‘성숙된 삶’이다. 이 장에는 의연하면서도 여유가 있고 어질고 지혜로우며 검박하면서도 예를 잃지 않는 성숙한 삶을 제시하는 말씀들이 담겨 있다. 사실 이것들은 공자의 시대에 선비들이 중요시하던 덕목이며 오늘날과는 조금 맞지 않는 부분이 많은 것 같다. 총 다섯 개의 주제를 살펴보면 안빈낙도의 여유, 꼿꼿하고 의로운 삶, 어질고 지혜로운 사람, 군자의 길과 소인의 길, 바람직한 처신 이다. 이 중에서 오늘날에 적용될 수 있는 말씀은 어질고 지혜로운 사람편의 말씀인데 공자께서 말씀하시길“덕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훌륭한 말을 하거니와 훌륭한 말을 하는 사람은 반드시 덕이 있는 것은 아니다. 어진 사람은 반드시 용기가 있거니와 용기가 있는 자가 반드시 인이 있는 것은 아니다.” 이 말씀은 들은 적이 있는 유명한 말씀이다. 여기서는 섣부른 말과 행동을 경계하라는 뜻도 포함된 것 같다. 즉 겉으로 봤을 때 훌륭해 보이는 것과 용기 있어 보이는 것은 진정한 지혜와 용기가 아니라는 말씀인 것 같다.
제 7장은 ‘시와 음악을 즐길 줄 아는 마음’이다. 흔히 공자를 근엄한 도덕적 엄숙주의자로 생각하지만 사실‘논어’에서 그의 풍모는 매우 인간적이며 여유 있는 인물로 등장한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장의 주 내용은 일과 놀이, 긴장과 여유, 삶과 예술이 조화를 이룬 공자의 생활담이 담겨있다. 아들에게도 시를 모르면 담벼락을 마주한 것처럼 답답하니 시 공부를 게을리 하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하니 말 다했지 싶다.
제 8장은 ‘덕으로 다스리는 정치’이다. 국민을 편케 하는 정치는 세상의 고통을 덜 수 있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지배자들은 늘 질서와 법을 강조하면서 명령과 지시로 통치하려 한다. 공자는 그런 일방적인 통치의 문제점을 바로잡기 위해서 덕치주의를 내세운다. 문치, 예치, 덕치의 실현과 대동사회의 건설을 꿈꾸던 공자의 정치관이 이 장에 나타나 있다. 그것은 각 주제에서도 알 수 있는데 덕으로 인도하는 정치, 솔선수범하는 지도자, 합리적인 통치, 유능한 인재등용이 그것이다. 이 중 특히 마음에 와 닿은 구절은 공자께서 말씀하시길“덕으로 정치하는 것은 비유하자면, 북극성이 제자리에 머물러 있을 때 뭇별들이 그를 향하는 것과 같다고 할 것이다.”이다. 이 말씀이야말로 정답인 것 같다. 바른 정치를 펴는 사람은 마치 빛과 같아서 모두 우러러 볼 테니 말이다. 이와 비슷한 맥락의 다른 말씀도 있는데 솔선수범하는 지도자 편의 말씀이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길“자기 자신이 바르면 명령하지 않아도 행해지고, 자신이 바르지 못하면 비록 명령한다 하더라도 따르지 않는다.”
이렇게 ‘논어’라는 엄청난 책을 어설프게나마 탐독하고 나자 서문에서 읽었던 필자의 말이 떠오른다. 이 책을 편집한 필자는 논어를 재해석 하게 된 동기를 이렇게 밝히고 있다.
“우리사회는 산업화를 거치면서 정보통신과 과학의 발전으로 인해 물질적 풍요를 누리고 있지만 학자들은 인간의 탐욕으로 인한 지구의 생태학적 위기를 경고하고 있고 치열한 경쟁사회 속에서 벌어지는 인간의 정체성 상실과 도구화 같은 비인간화 문제를 심각하게 우려하고 있다. 이러한 시대에는 무엇보다 인간을 따뜻하게 바라볼 수 있는 인문정신의 회복이 급선무라고 생각한다. 이제 과학기술이 생명을 복제할 수 있는 단계까지 이르고 있는 상황에서 이를 통제하는 인간 이성의 회복과 인간의 생존마저 위협할 정도로 파괴된 자연환경과 만성화 되어가는 전 지구적 경제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윤리와 도덕의 회복이 절실히 요청된다. 필자는 이러한 시각에서 논어를 다시 살펴보고 싶었다. 신 휴머니즘의 관점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인간을 인간으로 바라보고 가난하더라도 다함께 더불어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 수는 없을까 하는 바람을 가지고.”
사실 필자의 말처럼 고도로 과학화되고 급변하는 사회인 지금에 이르러서 논어를 다시 읽고 재평가하는 것은 부질없는 짓 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약용도 “만민을 윤택하게 하고 만물을 번육케 하는”, 자연과 인간이 공존하는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에 의해 ‘논어’는 끊임없이 새로운 시각에서 조명될 필요가 있다고 하였다. 이 분들의 말처럼만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란 생각을 하며 ‘논어’의 시간에서 이만 빠져나오고자 한다.
분명 한 구절구절마다 곱씹고 되새겨 보며 생각해야 할 뜻이 담겨 있겠지만 솔직히 도저히 내 수준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비유적 표현과 옛 표현들이 나를 힘들게 했다. 이해의 한계를 느끼며 스스로가 한심하기도 했지만 시간이 흐른 뒤에 다시 ‘논어’를 읽을 때는 적어도 이해가 안가는 구절이 없도록 스스로를 단련해보자 라는 결심이 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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