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근현대사- 구미세력의 침투 요약 정리.
본 자료는 2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해당 자료는 2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2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목차

없음

본문내용

았기에 거절하는 것이 일본에 이롭지 못하다고 판단했다. 다만, 막부의 권위를 유지하기 위해 되도록 개항을 지연시키자는 계산이었으나, 결국은 1854년 3월 31일 미일 화친조약(和親條約)에 서명하였다. 통칭 도쿠가와조약이라 불리는 이 조약은 전문 12조로 동경만 입구에 있는 시모다 항을 즉시 개방하고 일년 후 북해도 남단의 하코다대항을 개방하여 미국 선박의 기항(寄港)을 허용, 식량과 연료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또한 최혜국대우조항을 획득했다. 영국도 일본과 10월 14일 영일화친약정을 하였다. 그리고 1855년 1월초, 러시아와 수호조약을 체결했으며 약 1년 후인 1856년 1월 30일에 화란과 화친조약을 체결했다. 이때 새 조약으로 나가사키항 출입이 완전히 자유롭게 되었다. 이상 단순 화친조약으로 일본이 문호를 완전히 개방한 것이 아니라 서양함대와 대전하여 승리할 수 없었기 때문에 한 것이었다. 그래서 막부 당국자들은 이 조약을 조종의 유법을 포기하거나 변경한 것이 아니라는 새로운 개국론을 들고 나섰는데, 이는 단순이 교역만을 허용하자는 것이었다. 이와는 달리 일본도 해외무역에 종사, 서양문물도 도입해야한다는 적극론, 서방국가와 모든 관계를 정리하고 쇄국체제를 고수해야 한다는 양이론(攘夷論)까지 나왔다. 그러나 이들 모두 근대식 함대에 놀라 근대식 해군을 건설해야한다는 것을 통감하여 나가사키에 해군 전습소(傳習所) 창설, 화란으로부터 함선 도입, 조선기술과 함선조련 훈련을 시작했다. 또한 에도에 어학관을 개설하였다. 미영 당국은 일본에게 정상적인 통상조약체결을 요구, 화란사절이 자유무역허용과 외국인들의 동반거주를 허용하도록 권유, 미국영사의 꾸준한 교섭으로 인하여 1857년 6월에 미일 시모다 조약을 체결하였다. 그러나 이는 화친조약의 불비점만을 보완하는데 그쳤으며, 이후 화란과 러시아도 비슷한 추가조약을 맺었다. 그러나 해리스는 더 광범위하고 포괄적인 통상권을 획득하려고 회담을 시작, 1858년 7월 29일 미일수호통상조약을 하였다. 8월에는 영국, 프랑스, 화란, 러시아가 통상조약을 맺기 위해 일본에 왔으며 모두 미일통상조약과 그 내용이 대동소이 한 것이었다. 이상 5개 조약에서 일본은 상대국에 대하여 영사재판권을 허용하고, 수출입품에 대한 협정관세 원칙을 수락하였으며, 최혜국대우를 부여하였다.
중국과 일본의 개방을 계기로 동아시아세계에서는 중국중심의 전통적 세계질서가 무너지고 서방국가들이 주도하는 새 국제질서가 형성되었다. 1860년대 초까지 중일 양국이 조약체제에 편입된 것은 사실이나 양국이 모두 완전히 개방된 것은 아니었다. 이를 상징하는 존재가 동방의 은자(隱者) 조선이었다. 이리하여 새 조약체제와는 관계없이 이 지역 국가들 간의 상호관계에는 종래의 제도와 관습이 존속되어 동아시아 국제관계는 이중구조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 그러나 1860년대부터는 조약제도가 결정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이중구조는 1880년대 후반에 가서야 소명되었고 장구한 역사를 가졌던 동아시아세계질서는 드디어 막을 내렸다.
  • 가격1,500
  • 페이지수7페이지
  • 등록일2010.03.11
  • 저작시기2007.3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589573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