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안동학교의 설립
2. 정숙학교의 설립
3. 광림학교로의 통합과 그 이후의 발전
4. 시원여학교의 설립과 폐교
5. 진주지역 기독교 교육에 기여한 인물들
6. 진주지방의 기독교계 학교의 독립운동
2. 정숙학교의 설립
3. 광림학교로의 통합과 그 이후의 발전
4. 시원여학교의 설립과 폐교
5. 진주지역 기독교 교육에 기여한 인물들
6. 진주지방의 기독교계 학교의 독립운동
본문내용
에 배부하면서 인근 각면의 유지와 대중을 규합해 갔다. 전국의 독립운동이 치열해 가자 진주에서도 의거가 일어날 것을 예상한 이곳 군경은 더욱 삼엄한 경계를 펴 갔다. 드디어 의거의 기미를 알아차린 이들은 선수를 쳐 각 학교에 임시 휴교를 명하고 일인 교사들로 하여금 학생들을 엄중 정탐토록 하였다. 그리고 타지방 학생들에게 여비를 주어 강제로 귀향시키는 비상조치까지 취하였다.
이러한 삼엄한 정세 변화 가운데 이강우를 비롯한 주동 애국청년들은 거사일을 3월 18일(음력 2월 17일)로 정하고 일 군경의 눈을 피해 가면서 거사의 공작과 조직을 확대시켜 갔다.
그들은 사립 광림 학교의 악대원으로 있다가 졸업한 천명옥박성오김영조이영규 등 4인을 청하여 거사시 시위행렬의 선두에서 주악토록 부탁하고, 한편 교섭위원을 선정하여 기독교회 측에는 김영조가 담당하기로 하고, 각 사회단체는 김재화강달영박진환 등이 담당하여 교섭키로 하였다.
그리고 거사의 방법으로는 진주읍을 3개구로 나누어 거사 당일 오전 11시경의 교회의 종소리를 신호로 3개구에서 일제히 봉기하여 만세시위하기로 약정하였다. 제1구는 옥봉동 부근에 집합하고, 제2구는 재판소 부근, 그리고 제3구는 시장통 부근에 집합하기로 하였다.
3월 18일 약정한 진주읍의 장날 각 면 각 동으로부터 수많은 군중이 진주읍으로 운집해 들어왔다. 11시경 타종책임을 맡은 김 영조는 진주 교회로 달려갔다. 그러나 뜻밖에도 교회의 종은 철거되고 없었다. 당황한 김 영조는 이 사실을 대기하고 있는 3개구에 고하고 비봉 산정에서 나팔소리가 나면 거사하라고 약속을 변경하였다. 이날 오후 1시 이 영규는 비봉산 위에서 힘차게 나팔을 불었다.
3개구에 모인 군증은 일제히 봉기하였다. 학생들은 감추어 둔 태극기를 군중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제2구 즉 재판소 부근에는 수천의 군중과 학생이 모였다. 이에 이 강우가 등단하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군중이 일제히 여기에 호응하니 독립만세의 함성은 천지를 진동케 하였다. 이어서 군중은 악대를 선두로 애국가를 제창하면서 시위를 들어가 성중을 일주하였다. 군중의 위보는 당당하고 기세는 충천하였다. 일군 헌병과 경찰이 출동하여 시위행렬을 저지 해산시키려 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드디어 이들은 소방대까지 동원하여 소방차로 더러운 물을 퍼붓고 곤봉으로 군중을 난타하였으나 군중은 시위를 계속 강행하였다.
오후 4시경 시위군중의 대열이 경상도청 앞에 이르렀을 때 군중은 약 3만 명으로 늘어났다. 일군 헌병과 경찰은 시위 군중 주동 인물 의복에 잉크를 뿌려 두었다. 이들은 석양에 이르러 검거하기 시작하여 관련자 약 3백 명을 검거하였다. 그러나 시위는 그대로 계속되어 야간에도 그치지 않았다. 시위 군중들은 각대로 나누어 요소 요소에 웅거하여 봉화를 올리고 독립만세의 함성은 그치지 않았다. 오후 7시에는 돌연히 ‘노동 독립단’의 군중대열이 나타나 시위를 전개하고 2시간 뒤에는 다시 ‘걸인 독립단’이 나타나 시위를 전개하였다. 그 다음날에는 기생 독립단이 시위를 하였다.
이러한 삼엄한 정세 변화 가운데 이강우를 비롯한 주동 애국청년들은 거사일을 3월 18일(음력 2월 17일)로 정하고 일 군경의 눈을 피해 가면서 거사의 공작과 조직을 확대시켜 갔다.
그들은 사립 광림 학교의 악대원으로 있다가 졸업한 천명옥박성오김영조이영규 등 4인을 청하여 거사시 시위행렬의 선두에서 주악토록 부탁하고, 한편 교섭위원을 선정하여 기독교회 측에는 김영조가 담당하기로 하고, 각 사회단체는 김재화강달영박진환 등이 담당하여 교섭키로 하였다.
그리고 거사의 방법으로는 진주읍을 3개구로 나누어 거사 당일 오전 11시경의 교회의 종소리를 신호로 3개구에서 일제히 봉기하여 만세시위하기로 약정하였다. 제1구는 옥봉동 부근에 집합하고, 제2구는 재판소 부근, 그리고 제3구는 시장통 부근에 집합하기로 하였다.
3월 18일 약정한 진주읍의 장날 각 면 각 동으로부터 수많은 군중이 진주읍으로 운집해 들어왔다. 11시경 타종책임을 맡은 김 영조는 진주 교회로 달려갔다. 그러나 뜻밖에도 교회의 종은 철거되고 없었다. 당황한 김 영조는 이 사실을 대기하고 있는 3개구에 고하고 비봉 산정에서 나팔소리가 나면 거사하라고 약속을 변경하였다. 이날 오후 1시 이 영규는 비봉산 위에서 힘차게 나팔을 불었다.
3개구에 모인 군증은 일제히 봉기하였다. 학생들은 감추어 둔 태극기를 군중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제2구 즉 재판소 부근에는 수천의 군중과 학생이 모였다. 이에 이 강우가 등단하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군중이 일제히 여기에 호응하니 독립만세의 함성은 천지를 진동케 하였다. 이어서 군중은 악대를 선두로 애국가를 제창하면서 시위를 들어가 성중을 일주하였다. 군중의 위보는 당당하고 기세는 충천하였다. 일군 헌병과 경찰이 출동하여 시위행렬을 저지 해산시키려 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드디어 이들은 소방대까지 동원하여 소방차로 더러운 물을 퍼붓고 곤봉으로 군중을 난타하였으나 군중은 시위를 계속 강행하였다.
오후 4시경 시위군중의 대열이 경상도청 앞에 이르렀을 때 군중은 약 3만 명으로 늘어났다. 일군 헌병과 경찰은 시위 군중 주동 인물 의복에 잉크를 뿌려 두었다. 이들은 석양에 이르러 검거하기 시작하여 관련자 약 3백 명을 검거하였다. 그러나 시위는 그대로 계속되어 야간에도 그치지 않았다. 시위 군중들은 각대로 나누어 요소 요소에 웅거하여 봉화를 올리고 독립만세의 함성은 그치지 않았다. 오후 7시에는 돌연히 ‘노동 독립단’의 군중대열이 나타나 시위를 전개하고 2시간 뒤에는 다시 ‘걸인 독립단’이 나타나 시위를 전개하였다. 그 다음날에는 기생 독립단이 시위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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