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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당 최남선][기미독립선언서][계몽운동][선구자적 관점][친일론적 관점]육당 최남선의 생애, 육당 최남선의 기미독립선언서, 육당 최남선의 계몽운동, 육당 최남선의 선구자적 관점, 육당 최남선의 친일론적 관점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육당 최남선의 생애

Ⅱ. 육당 최남선의 기미독립선언서

Ⅲ. 육당 최남선의 계몽운동

Ⅳ. 육당 최남선의 선구자적 관점
1. 현실과 역사
2. 사실과 진실
3. 선구자와 지도자
4. 국민적 오해와 친일 시비

Ⅴ. 육당 최남선의 친일론적 관점
1. 자열서의 허실
2. 지조를 버리고 택한 학문연구의 길

참고문헌

본문내용

년 이후)가 있었다. 실무진 가운데에는 편사관(編史官)으로 홍희(洪憙:1925~1935), 신석호(申奭鎬:1938년 이후),
편사관보로 이병도(李丙燾:1925~1927), 신석호(1930~1937), 촉탁으로 홍희(1925년), 이병도(1927년 이후), 최남선(1928~1936), 신석호(1929~1930) 등이 있었다. 따라서 최남선은 위원으로서 위원회에 관여했을 뿐 아니라 실무자로서도 직접 편찬업무에 참여하였던 것이다.
일제는 {조선사} 35권 편찬작업을 통하여 {삼국사기}를 한국고대사의 기본사료로 못박고 {삼국유사}의 기록은 \'사설\'(史說)로 제껴버림으로써, 한국사를 2천 년 역사로 축소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최남선은 {조선사}에 국조 단군에 관한 기록이 수록되지 않은 점에 대해 항의했으나, 책은 이미 인쇄되어 배본중이었으므로 그의 의사는 전혀 관철되지 않았으며 그도 당초 그렇게 되리라는 것을 예측하고 있었다. 요컨대 최남선은 일제의 역사왜곡 작업에 들러리 역할을 했던 것이다.
편수위원직 수락 이후 공공연해진 변절의 길뿐만 아니라 육당은 조선사편수위원직을 수락한 이후 총독부가 위촉하는 여러가지 위원직을 맡으며 공공연하게 변절의 길을 걷게 된다. 1936년에는 경성제대에서 \'심전(心田) 개발에 관한 강연\'을 하였으며 만주국 건국대학 교수로 임명되기 1년 전인 1938년에는 만몽일보사 고문직에 취임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1937년에는 조선사편수위원으로서의 그의 공로에 대한 일제의 포상으로 조선총독부 최고의 영예직인 중추원 참의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최남선의 일생에서 치명적인 오점은 건국대학 교수직을 그만두고 돌아온 뒤 조선인 대학생들을 일제 침략전쟁에 몰아넣는 학병 권유 사업에 참여한 일이다. 육당은 1943년 11월 14일과 20일 이틀 동안 이광수와 함께 일본 동경 메이지대학 대강당에서 열린 학도궐기 대강연회 연사로 참가하였다.
건국대학 교수직을 수락했을 때만 하더라도 위당 정인보 등 지우들이 \'최남선이 죽었다\'고 개탄할 정도였으니 그의 학병 권유 강연 사건은 변명의 여지가 없는 변절 재확인 행위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최남선은 자신의 학병 권유 행위에 대하여 마치 훗날의 광복을 위해 민족의 기간요원을 양성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자열서에서 강변하고 있다. 그의 논리에 따르면 \"이 기회를 이용하여 젊은 청년들이 조직과 전투에 능한 사회 중핵층을 형성하게 하여, 다가오는 신운명에 대비하려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1945년 3월 7일 일제 패망 직전에 {매일신보}에 쓴 [전력증강 총후 수호의 진로]라는 그의 친일 논설은 아무리 변명한다고 하더라도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내용이다. 최남선은 속으로는 일제 패망을 확신하였는지 모르나 겉으로는 일제의 필승을 장담하였고, 속으로는 학병이 무사히 돌아와서 광복된 조국의 간성으로 활약해 주기를 바랐는지 모르나 공인으로서는 대일본제국을 위해 조선 청년들이 죽어 주어야 한다고 공언했던 것이다. 한편 그는 건국대학 교수로 있으면서 1940년 10월 30일에 조직된 \'동남지구 특별공작후원회본부\'의 고문도 맡고 있었다. 그런데 이 단체는 일본 관동군의 반공선무공작 등을 지원한 간첩단체로서 독립군과 항일 빨치산을 상대로 한 \'귀순공작\'을 주임무로 하고 있었다. 그가 이 단체의 성격도 모른 채 단지 이름만 걸고 있었는지 매우 궁금할 뿐이다. 심산 김창숙 선생이 대구 감옥에서 14년 옥고를 치르고 있을 때였다. 일본인 간수가 심산에게 육당의 [일선동조론]을 읽어보라고 주었다. 마지 못해 이 책을 받아 본 심산은 \"도시 이런 흉서(凶書)가 있는가\"라 개탄하면서 책을 잡아 비틀어 단자(單子)처럼 만들어 마룻바닥에 동댕이쳐 버렸다. 그리고 나서 심산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기미 독립선언서가 최남선의 손에서 나오지 않았는가. 이런 자가 도리어 일본에 붙은 역적이 되다니 만번 죽어도 그 지은 죄는 남을 것이다.
참고문헌
김성준(1933) : 최남선-친일반역자의 길, 근대사강좌 제 3호
류시현(2005) : 최남선의 이중 부정, 내일을 여는 역사 제20호
류시현(2005) : 최남선, 친일로의 자기부정 해방 후 변명으로 이중 부정, 내일을 여는 역사 제 20호
박태순(2002) : 역사를 위한 변명과 해명-최남선의 반민족사학, 새미
이지원(2002) : 최남선, `민족`의 이름으로 황민화를 강조한 문화주의자
이영화(2003) : 최남선의 역사학
최남선의 문화주의에 내포된 근대성과 친일성(2003) : 국사관논총 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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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9.0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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