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똘스또이는 어떻게 「부활」을 쓰게되었나
(2) 작품의 구성
(3) 작품속에서 담고 있는 의미들
(4) 부활의 의미
(2) 작품의 구성
(3) 작품속에서 담고 있는 의미들
(4) 부활의 의미
본문내용
뿐이다. 결국 시몬손과 까츄샤의 결혼을 인정함으로써 까츄샤와 관계가 정리되고 네흘류도프의 의무도 벗어난다.
(4) 부활의 의미
네흘류도프는 새로운 전과는 다른 인간관을 가진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난다. 그래서 부활이란 의미를 인간성의 새로운 탄생을 의미할 수 있겠다. 그러나 화자가 밝혔듯이 인간은 동물성과 정신성의 두 가지를 동시에 지닌 존재로 이미 가지고 있는 성질이므로 부활이라는 표현을 쓰기에는 적당치 않다. 그리고 네흘류도프의 변화에는 양심이라는 측면이 크게 작용하지 않았다. 오히려 동물적 본성사이에서 흔들렸을 뿐이었다.
그래서 마지막 부분에 끄르이리초프 노인과 만남을 끼워 넣고 그의 죽음을 통해서 네흘류도프는 새로운 진실을 기존의 성경을 통해서 깨닫는 장면이 나온다. 이것은 까츄샤가 유형지로 떠나기 전 예배 장면에서 기존의 교회 질서를 비판하는 장면에서 예정되었다. 러시아의 교회는 예수를 통해서 금했던 스승이나 요란한 예배의식을 행하면서 본래의 신앙에서 멀어져 간다고 비판했는데,
“여러 가지 신앙이 있는 것은 남을 믿고 자기를 믿지 않기 때문이오. 나도 남을 믿다가 그 때문에 숲속을 헤매듯이 길을 잃었던 것이오. 완전히 길을....(중략).... 신앙은 많지만 영혼은 단 하나 뿐이야. 당신에게나, 나에게나, 저 사람에게도. 그래서 모두 자기 영혼을 믿는다면 다 하나로 뭉쳐지는 거요. 모두가 자기를 믿는다면 다 하나도 될 수 있단 말이오.” 같은 책 p472
끄르이리초프가 말했던 데로 기존 교회의 형식과 해석이 아닌 자신을 믿는 성서를 통한 자기의 신앙을 통해서 그래서 죽이지 말라는 등의 5가지 계율을 통해서 구원받고 삶의 의미를 지닌다고 말한다. 이것이 부활의 모습이라고 화자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삶의 문제를 일상에서 의미를 찾아가지 못하고 결국은 종교지도자나 사상가로서 해결책을 내놓고 끝맺음으로 설득력을 잃고 있다. 작품의 중간과 마지막의 결론 부분을 연결해볼 때 과연 종교적 해결책이 사회 속의 존재인 인간을 네흘류도프처럼 다른 사람에게 적용할 수 없다. 그리고 네흘류도프의 행위도 양심과 동물적 인간과 사이에서 왕복만 할 뿐이다. 또 ‘부활’이란 말은 정신적인 부활로 의미를 고쳐보아도 종교적인 새 탄생으로 봐야지 그 의미에도 들어맞지 않는다. 아마도 이런 점이 똘스또이의 마지막 작품인 부활을 「안나 까레리나」와 「전쟁과 평화」에 비해 평가를 못 받는 이유가 될 수 있겠다.
(4) 부활의 의미
네흘류도프는 새로운 전과는 다른 인간관을 가진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난다. 그래서 부활이란 의미를 인간성의 새로운 탄생을 의미할 수 있겠다. 그러나 화자가 밝혔듯이 인간은 동물성과 정신성의 두 가지를 동시에 지닌 존재로 이미 가지고 있는 성질이므로 부활이라는 표현을 쓰기에는 적당치 않다. 그리고 네흘류도프의 변화에는 양심이라는 측면이 크게 작용하지 않았다. 오히려 동물적 본성사이에서 흔들렸을 뿐이었다.
그래서 마지막 부분에 끄르이리초프 노인과 만남을 끼워 넣고 그의 죽음을 통해서 네흘류도프는 새로운 진실을 기존의 성경을 통해서 깨닫는 장면이 나온다. 이것은 까츄샤가 유형지로 떠나기 전 예배 장면에서 기존의 교회 질서를 비판하는 장면에서 예정되었다. 러시아의 교회는 예수를 통해서 금했던 스승이나 요란한 예배의식을 행하면서 본래의 신앙에서 멀어져 간다고 비판했는데,
“여러 가지 신앙이 있는 것은 남을 믿고 자기를 믿지 않기 때문이오. 나도 남을 믿다가 그 때문에 숲속을 헤매듯이 길을 잃었던 것이오. 완전히 길을....(중략).... 신앙은 많지만 영혼은 단 하나 뿐이야. 당신에게나, 나에게나, 저 사람에게도. 그래서 모두 자기 영혼을 믿는다면 다 하나로 뭉쳐지는 거요. 모두가 자기를 믿는다면 다 하나도 될 수 있단 말이오.” 같은 책 p472
끄르이리초프가 말했던 데로 기존 교회의 형식과 해석이 아닌 자신을 믿는 성서를 통한 자기의 신앙을 통해서 그래서 죽이지 말라는 등의 5가지 계율을 통해서 구원받고 삶의 의미를 지닌다고 말한다. 이것이 부활의 모습이라고 화자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삶의 문제를 일상에서 의미를 찾아가지 못하고 결국은 종교지도자나 사상가로서 해결책을 내놓고 끝맺음으로 설득력을 잃고 있다. 작품의 중간과 마지막의 결론 부분을 연결해볼 때 과연 종교적 해결책이 사회 속의 존재인 인간을 네흘류도프처럼 다른 사람에게 적용할 수 없다. 그리고 네흘류도프의 행위도 양심과 동물적 인간과 사이에서 왕복만 할 뿐이다. 또 ‘부활’이란 말은 정신적인 부활로 의미를 고쳐보아도 종교적인 새 탄생으로 봐야지 그 의미에도 들어맞지 않는다. 아마도 이런 점이 똘스또이의 마지막 작품인 부활을 「안나 까레리나」와 「전쟁과 평화」에 비해 평가를 못 받는 이유가 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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