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한국합방 전 청국 및 러시아의 제압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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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청일전쟁(淸日戰爭)

2.러일전쟁

본문내용

본의 안전과 이익을 보존해 가려고 한 점은 명치 전기시대 외교관계로의 복귀를 의미하는 것이다.
일본에서 워싱턴 체제는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구체적으로 어떠한 점이 새로웠는가.
첫째, 일본은 세계의 대세와 보조를 맞추어 배타적·침략적인 정책을 버리고 평화와 정의의 정신에 입각해 국제간의 친선과 일치를 기저로 한 외교 방침을 관철시키려고 한 점이다.
둘째, 경제중점주의적인 외교사상을 들 수 있다. 국토의 안전은 군축 협정과 세계각국의 평화주의 등에 의해 보장되고 있다고 본 이상 국력을 경제발전정책에 기울이려는 것은 당연했다.
5.일본의 외교
제2차 세계대전 후의 일본 외교는 대미의존(對美依存) ·반공산권(反共産圈) ·경제중심주의 외교로 특징지을 수 있다. 패전 후 1952년 4월까지의 점령기간 중에는 일본은 외교자주권을 가지지 못하고, 그 대외정책은 미국의 점령정책을 구현하는 선에서 실시되었다. 1951년의 샌프란시스코 강화회의에서 소련 등 공산권 제국이 조인을 거부한 가운데 강화조약과 더불어 미일 안보조약이 체결되었으며, 다시 강화조약 발효일에 중일(中日)조약이 조인되었다.
그와 같은 일련의 과정에서 일본 외교의 반공·대미의존의 노선이 확정되었고, 한편 미일 안보조약의 체결은 군사비 지출을 적극 줄이면서 경제입국의 길을 추구하려는 일본의 의도에도 부합되는 것이었다. 전후의 세계경제를 자유무역의 원칙으로 운영하고 있던 미국에 협력하는 것은 경제를 발전시켜서 국가가 살 길을 열고자 한 일본에게는 대단히 중요한 일이었고, 또 자유무역의 원칙에 크게 지배된 전후의 세계경제 속에서 일본의 경제 중심주의는 크게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일본은 1955년에 GATT(General Agreement on Tariffs and Trade: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에 가맹한 것을 시작으로 하여 자유주의 경제정책을 취하는 선진 공업제국들 중에서도 점차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였다. 1956년의 일·소 국교회복과 국제연합 가입에 의해 일본은 국제사회에 복귀하게 되고, 다음해에 기시[岸] 정부는 UN(United Nations:국제연합) 중심주의, 자유주의제국 국가와의 협조, 아시아의 일원으로서의 입장의 견지라는 외교 3원칙을 발표하였다. 기시 정부에 의한 1960년의 미일 안보조약의 개정은 양국간의 군사동맹의 성격을 띠었고, 1965년에는 역시 반공·대미의존의 기본노선에 따라 한일(韓日) 기본조약을 체결하였다. 경제의 고도성장에 따른 세계 각지에 대한 경제진출은 일본의 국제적 지위를 높였다.
6.미 ·일 동맹관계
동서 냉전 체제 아래에서 성장지상주의 채택
전후 세계경제질서는 미국주도로 자유무역체제가 구축되었다. 미국은 IMF창설로 금·달러화 본위제를 도입하였고 GATT를 통해 자유무역질서의 회복에 주력하였다. 미국의 목적은 2차 세계대전 이전에 형성된 세계경제의 지역블록을 해체하여 세계경제의 통일성 회복에 주력하는 것이었다. 대공황으로 대량실업을 겪은 미국은 2차대전 돌입으로 광공업생산이 회복되었으나 종전에 따른 군수 감소로 과잉생산이 표면화될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선진국에서 유일하게 아무 손상없이 생산시설을 보존시킬 수 있었던 미국은 자유로운 시장과 기업의 국경을 넘는 경제활동의 자유화를 추구하게 되었다.
그 최대 목표는 파운드 블록 (Pound Block)의 실질적 해체였고 미국은 영국 식민지의 독립을 유도하는 한편 중동 등에서 이권을 확대시켜 나갔다. 2차 세계대전 이후 경제적·군사적으로 쇠퇴의 길에 들어간 영국은 인도, 캐나다, 中東, 아프리카 등 도처에 산재한 대식민지제국을 유지할 능력이 없었고 미국의 원조에 의존하는 형편이어서 식민지경제권은 쉽게 와해되었다. 미국의 탁월한 경제력을 배경으로 자유진영은 통일성을 회복하게 되었지만 동서냉전으로 세계경제는 동서로 양분되었다.
식민지를 잃은 일본은 자원과 자유로운 시장을 갈망해 왔는데 미국에 의한 전후 세계경제의 재편성은 일본의 경제발전을 보장하는 외부여건을 조성했다. 그리고 중국혁명, 한국전쟁 등 동서냉전 격화도 일본경제의 부흥에 긍정적으로 작용하였다.
당초 미국은 재벌해체 등으로 일본을 2류 공업국으로 전락시켜 다시는 미국패권에 도전하지 못하게 하고 중국을 아시아지역의 미국 방위국으로 육성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소련공산주의의 급팽창과 중국의 공산화 등으로 군사동맹국으로 육성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미국의 군사전략상 반공기지로 지정된 일본 오키나와기지는 한국전쟁, 월남전, 걸프전쟁 등 미국의 아시아지역 군사개입시에 중요한 지원업무를 수행해 왔다. 미국은 일본의 재무장(자위대창설)을 지도하였고, 미·일 안전보장조약의 체결을 통해 일본과의 군사동맹관계를 확고히 강화해 나갔다. 이를 계기로 일본은 미국시장, 미국기술 및 미국이 통제하고 있던 주유원자재에 손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 일본의 재무장이 결정되었으나 일본자위대는 미국의 통제하에 놓여져 본격적인 군비확장에는 국내외로부터 많은 제약을 받게 되었다. 미·일 안보조약 체결로 미군의 핵유산하에 보호된 일본은 군비지출을 억제하여 모든 자원을 경제성장에 집중적으로 충당했다. 명치유신 이후의 근대화의 이념인 부국강병정책 대신에 부국강기업정책이 추진되어 온 셈이다.
2차대전전 일본은 아시아의 맹주로서 구미 열강과 더불어 국제연맹(UN의 전신) 상임이사국으로서 국제정치적 발언권도 확보하고 있었으나 전후에는 패전국으로서 정치적 영향력 행사에 소극적 자세를 취하게 되었다.
일본의 외교정책에서는 미·일 관계를 축으로 거의 미국정책을 추종하는 노선이 선택되어 왔으며, 경제·금융·기술분야에서 대국이 된 현재에도 이 노선에는 기본적인 변화가 없는 실정이다. 국제정치무대에서 저자세를 감수하면서도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려는 총상정책의 일환으로 정부차원에서도 일본상품 판매노력이 전개되어 왔다. 이러한 일본의 대외정책은 「일본의 수상은 일제 트랜지스터라디오 세일즈맨이다」라든지 일본인은「경제적 동물(Economic Animal)이다」등 전 세계 국가들로부터 비웃음을 사기도 했다. 현재 일본은 아시아지역을 중심으로 국제정치무대에서 발언권을 강화해 나가기 위해 부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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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0.04.24
  • 저작시기200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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