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창고인돌 답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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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고창고인돌 답사기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서론

2. 본론I -<고인돌 공원 답사를 통해 생겨난 궁금증들>
(1) 고인돌이란 무엇인가
(2) 고인돌 분포
(3) 고창 고인돌 군
--북방식 (고창의 사례를 들어가며 특징도)
--남방식
--지석묘(개석식 고인돌)
(3) 고인돌의 기원설
--북방 기원설
--남방 기원설
--독자 발생설(자생 기원설)
(4) 고인돌에 관한 궁금증
1)별다른 도구가 없는 당시 거대한 고인돌을 어떻게 만들 수 있었을까?
2) 고인돌은 언제 만들어 졌는가 ?
3) 고창 고인돌군의 특징과 가치
4)고인돌의 용도는 무엇이었는가?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 무덤양식
--거석문화의 대표적 산물
본론II -<선사시대를 체험하고 나서>
(1) 움집체험
(2) 거석끌기체험
(3) 돌칼 돌호미를 이용한 고구마수확
(4) 남방식 고인돌 지하 무덤

3. 나오며

본문내용

어 있는 고인돌군을 살펴보면 거대한 공동 모역이나 단독 묘역으로써 특정한 범위를 차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금동 유적의 경우 해발 50m 전후의 등고선을 따라 거대한 공동 묘역이 형성되어 있으며, 창원 덕천리 고인돌의 경우 단독이지만 거대한 묘역이 만들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위에서 언급했다시피 농경민들이 가지는 시간과 공간 그리고 경관에 대한 관념은 채집인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농경사회의 물질문화 가운데 기념물과 같은 것은 의례를 통해 축조되고 존속함으로써 의미를 지니게 된다. 이러한 기념물들은 취락 및 경작지와 함께 일정한 공간적인 단위를 점유하면서 존속했다. 그 공간을 공유하고 그 공간에 의존하는 구성원들은 농경의 공동작업과 상호교환에 의해 사회집단화 되고 기념물의 공유를 통해 그 정체성이 재정의 되었을 것이다. 하나의 취락이 소멸하여도 기념물은 그 장소에 남아서 오래도록 후손으로 이어지면서 그러한 역할을 수행하였을 것이다. 그 대표적인 기념물이 바로 고인돌인 것이다.
본론II -<고인돌 축제>
고인돌공원을 다녀온 뒤 10월8일부터 시작된 고인돌축제에 함께 참여했다. 행사 첫날이어서 그런지 축제는 썰렁한 분위기 였는데 세계문화유산인 고인돌에 관한 행사 치고는 약간 조철해 보였으나 체험하는 코스가 대부분이여서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 행사였던 것 같다.
향토음식점을 비롯하여 움집 체험 ,거석끌기 체험, 반달돌칼과 돌도끼 사용하기 , 볍씨채집, 남방식 고인돌 지하의 무덤구조등 볼 것 해볼것 들이많았다. 고인돌 축제에서 아쉬웠던 점은 영국의 스톤헤지나 아랜드 더블린의 뉴그랜지 거석 문화 유적지처럼 발전하기 위해서는 아직 많은 수정과 지원이 이루어 져야 겠다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고 다른나라의 고인돌문화보다 우리나라내의 고인돌 공원이 더욱 가치가 있고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다는 것을 정작 우리나라사람들은 인식하고 있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이러한 점을 널리 알리기 위해 고인돌 축제가 열리고 있는 것이고 그 취지를 살릴 수 있도록 국가의 지원과 자치 당국의 홍보 그리고 국민들의 관심이 필요하겠다는 것을 느꼈다. 축제에서 체험한것들을 아래에서 살펴보도록 하겠다.
(1) 움집 체험
고인돌 문화행사를 체험한 첫 번째 코스는 움집 체험이었다. 청동기 시대에 만들어진 고인돌에 관련된 행사임에도 불구하고 움집의 형태나 스탭의 복장은 선사시대를 연상하게 했다. 청동기시대의 집터가 대부분 사각형을 띄고 있는 반면 행사장의 움집은 원형이었고 화덕 또한 한쪽 벽이 아닌 중앙에 위치하고 있었다. 어설픈 면이 보이기는 했지만 직접 움집 안에도 들어 가보고 안에서 불을 피우는 장면이나 생활하는 모습을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어 흥미로웠던 경험이었다. 책이나 사진으로만 보던 것을 눈앞에서 직접 볼 수 있고 체험까지 할 수 있었던 좋은 기회였다.
(2) 거석 끌기 체험
움집 앞에서 사진을 찍고 있는데 곧이어 거석 끌기 체험이 이루어 지겠습니다. 라는 행사진행자의 목소리가 들렸고 관람객의 도움을 요청했다.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이기 시작했고 친구들과 함께 밧줄을 잡고 있는 힘껏 잡아당겼는데 밧줄로 묵인 돌 아래에는 통나무가 있었고 역사스페셜에서 본 장면이 그대로 연출되고 있었다. 50명 정도의 인원이 돌을 운반하기 위해 밧줄을 잡아 당겼으나 겨우 손바닥만큼 움직였을 뿐이었다. 다른 고인돌의 돌보다 작은 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운반하기가 힘들었는데 6구역에 있는 가장 큰 고인돌을 축조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인원과 그 인원을 통제 할 수 있는 국가체제와 강력한힘이 한반도 청동기 시대에 존재했다는 것에 뿌듯함을 느낄 수 있었다.
(3) 돌칼 돌호미를 이용한 고구마수확
거석끌기가 끝난후 행사장 한 켠에 마련된 반달돌칼과 돌도끼를 사용해 보기로 하였다. 반달돌칼은 어른 손바닥만한 크기로 모양이 반달 형태였고 자름 면이 칼날처럼 경사져 있어 직접 잔디를 잘라봤는데 의외로 쉽게 잘려 고대인들의 지혜를 엿볼 수 있었다. 돌칼을 이용해 벼를 따서 갈판에 갈아 보니 벼 껍질이 벗겨지기도 하고 그 안에 있는 쌀이 으깨지기도 하였다. 돌도끼를 이용해 고구마를 수확하기도 했는데 날카로운 호미에 비해 날이 뭉뚝한 돌호미는 오히려 고구마에 흠집이 나지 않게 잘 수확해낼 수 있는 훌륭한 도구임을 알 수 있었다.
4) 남방식 고인돌 지하 무덤
북방식 고인돌이 탁자형을 이루며 시신이 매장되는 매장부가 지하에 위치하지 않고 지상에 위치한 것으로 사면의 판석부분자체가 석관의 기능을 했던 것에 반해 남방식 고인돌은 자연석으로 쌓은 석실을 지하에 만들고 그 주위에 4~8개의 굄돌을 놓고 그 위에 커다란 덮개돌을 올려놓는다. 이러한 모양의 고인돌과 시체가 매장되어있는 단면을 잘라 유리로 덮어놓아 한눈에 볼 수 있었다.<사진첨부>
3. 나오며
레포트를 쓰기 위함이 고창고인돌 답사의 주된 목적이었지만 이번 답사를 통해 역사를 머릿속으로 배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직접 찾아가 가슴으로 느껴보는 것 또한 의미 있는 일이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실제로 시청각 교재를 통해 한번 보고 지나쳤을 뻔한 것들을 직접 찾아감으로써 평생의 추억이 될 수 있을 뿐더러 두 눈을 통해 전달된 영상을 다시 끄집어 냄으로서 고인돌에 관한 정보를 다시 상기시킬 수 있는 긍정적 효과가 있었고 떼무덤이라 비유된 고인돌군을 보면서 정말 살아있는 선사시대 박물관임을 실감할 수 있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고인돌군인 영국의 스톤헤지나 아일랜드의 고인돌 군은 그 규모와 특징에 비해 홍보가 잘되어 세계문화유산이라는 명성에 걸맞는 행사나 보존활동이 잘 이루어지고 있다. 반면 역사스페셜을 통해 처음 알게 되고 눈으로 확인한 전라남도 고창의 고인돌 공원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자랑스러운 선대의 문화임에도 불구하고 보존과 홍보가 부족하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 단순한 옛 무덤으로만 알았던 고인돌 이었으나 이번 방문을 통해 고인돌은 단순한 돌무덤이 아니라 선사인들의 종교와 문화 특징을 말해주는 가치있는 돌이었고 이러한 유산을 잘 보존하기 위해서는 국민들의 적극적인 관심과 국가의 지원 그리고 지역의 활발한 홍보활동이 필요함을 느끼며 전주 가는 차에 몸을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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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0.04.26
  • 저작시기20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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