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과 마을에서의 전쟁 경험 사례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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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들어가며 : 문제의식과 방법론

2. 전쟁 전의 마을

3. 두 마을의 전쟁 경험

4. 전후 새로운 질서의 모색

5. 나오며 : 함의와 전망

본문내용

전후 새롭게 만들어지던 마을질서는 근대적 교육·군대를 첫 세대로 경험한 사람들의 지도력과 그것을 받쳐주는 '국민형성'이 맞물리면서 만들어진 것이다.
제대동지회에서 상징적으로 보인 '민중의 역동성'과 '근대국민국가의 제도화'라는 두 가지 계기는 다양한 방식으로 맞물리거나 어긋날 수 있을 텐데, 박정권의 국가주의적 동원에 농민층이 '자발적'으로 동원되었던 새마을운동의 핵심 추진력이 바로 이 '30년 전후생'이었다는 사실은 많은 고민거리를 던져준다.
5. 나오며 : 함의와 전망
맺음말을 대신하여, 앞으로의 연구방향과 관련해서 몇 가지 점을 짚어보겠다.
첫째, 한국전쟁은 단순한 계급투쟁 혹은 민족해방전쟁이 아니라 복잡한 요소로 구성된 기성 질서를 타면서 전개되었다. 특히 지금까지 연구에서는 전세의 역전(인민군 점령)이 가져다준 효과를 과장해왔다고 본다.
) 필자는 한국전쟁이 신분제 유제의 해체에 결정타를 가한 것으로 보는 견해 역시 재고해볼 여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오두리와 반포리는 이미 일제말기에 청년단이 결성되어 그 동안 '중인'에게 맡겼던 '상여메기'를 했다. 비교적 신분의식이 강했던 반포리에서는, 어린 장씨가 늙은 '중인'에게 하대하는 것이 50년대 말까지 지속되었지만, 오히려 그 자식에 대해서는 하대를 잘 안했는데, 이는 어린애들끼리는 학교에서는 선후배 관계이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이 시기 기성 마을질서는 전면적으로 역전되지 않은 경우도 많으며(반포리, 삼성리), 계급투쟁이 활발했던 곳이라도 기존의 마을권력에서 소외되었던 세력에 의해 주도되기보다는 마을질서의 중심부에 있던 세력에 의해 주도됨으로써 '역전'이 가능했다(오두리, 일성리, 이성리). 따라서 '계급투쟁으로서의 한국전쟁'은 제한적으로 봐야하며, 오히려 한국전쟁은―예를 들어 군대 경험과 같은―다양한 요인들과 더불어서 그 의미와 영향을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둘째, 일제말기에서 한국전쟁(과 그 직후)에 이르는 '사회사적 시간대'를 근대국민(국가) 형성이라는 맥락에서 검토할 필요성을 느낀다. 김동춘은 한국전쟁을 국민국가형성 과정의 전쟁이라고 파악했는데, 국민국가형성 문제를 한국전쟁기에 제한할 것이 아니라 일제말기 전시체제 무렵까지 끌어올리는 것이 어떨까 싶다. '마을'을 보았을 때, 일제 식민권력은 1930년대 농촌진흥운동에서부터 마을단위까지 장악하려 했지만, 특히 전시총동원체제 아래서는 그것을 대폭 강화했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은 총동원체제의 최말단 단위인 마을을 매개로 국가에 편입될 뿐만 아니라, 황국신민 혹은 2등국민으로 다루어졌다. 이 시기는 폭력과 착취가 강화되는 시기임에 틀림없지만, 식민권력은, '국민학교'가 상징하듯이, 조선인을 '2등'이나마 '국민'으로 편제/형성시키고자 했다고 보인다. 일제말기 전시체제와 한국전쟁기의 전시체제는 일관된 맥락에서 파악할 때 그 의미가 보다 분명해지지 않을까?
마지막으로 '구술사'의 방법과 의의에 관한 문제이다. 이번 작업에서 뼈저리게 느낀 점은, 구술사는 단지 문헌사료를 대신할 '객관적' 구술사료를 얻기 위함이 아니라는 것이다. 어쩌면 구술을 통해서는 영원히 '객관적 사실'에 도달할 수 없을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역사가 '기억을 둘러싼 투쟁'이라면, 우리는 권력에 의해 억눌리고 굴절된 민중의 기억을 드러내는 작업을 소홀히 할 수 없다. 어쩌면 '주관적'일 수밖에 없는 기억을 '객관적'으로만 다루려는 우리의 관성이 그들과 우리의 대화를 가로막는 것은 아닐까? 지금도 오두리에는 정철희에 관한 '신화'가 많다. 그것의 '사실성'을 따지는 것도 필요하겠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그런 신화에 담긴, 과거 '모스크바' 시절에 품었던 오두리 노인들의 염원과 그것 때문에 겪었던 고통, 그리고 국가권력이 강요하는 망각에 맞서 온 그들의 역정을 이해하는 것이 아닐까?
【 표 1 : 조사대상 마을 기초사항 】
오두리
반포리
일성리
이성리
삼성리
호수
60
120
혈연
각성
1+α
1+α
2+α
3+α
공간
대(각)+소(각)
대(장)+대(장)+소(α)
대(1)+소(α)
대(2)+소(α)
대(2)+소(1)
지주
서울 대지주
서울 대지주
동네 소지주
O씨 대지주
서울 대지주
동네 중소지주
서울 대지주
동네 ?
경제력
빈촌
부촌
부촌
보통
보통
신분질서
중인 하대안함
중인 하대함
중인 하대?
?
반상차별 약함?
일제시기
구장 독권
다수파의 소수파 차별·배제
다수파의 소수파 차별·배제?
A씨 우위의 경쟁구조
a씨 중심 단결
해방공간
핵심부 좌경화 -> 마을 좌경화
미미
집안내 갈등
두 집안간 갈등
미미
인민위 구성
핵심부 주도
주변인 주도 -> 장씨 책임
O씨 주도 -> 주변인 지지
B씨 주도 -> A씨 타격
외부 주도? -> 주변인 책임
인민위활동력
왕성?
사보타지
왕성?
왕성?
미미
수복후 피해
심각
미미
심각
심각
미미
【 표 2 : 두 마을 인민위원회 책임자 및 주요 인물 인적사항 】
오 두 리
반 포 리
계급
학력
생년
비고
계급
학력
생년
비고
인민위원장
머슴
무학?
?
수복후 도피
중농
한학
11년
일제말기 구장
서기장
머슴
무학?
?
부농
중졸
18년
대청 중대장
민청위원장
빈농
국졸
28년
수복후 처형
부농
국졸?
의용군 강제입대
중농
고등과
29년
대청 훈련부장
자위대장
중농
간이
20년?
중농
간이
21년
대청 훈련부장
여맹위원장
머슴?
무학
보도연맹 피학살자 모친. 수복후 처형
농촌위원회
빈농
무학
21년
최연소 위원.
지주
장씨 최고 부자 아들



군인민위장
부농
한학
00년
정철희. 폭사. "사흘군수"
면자위대장
부농
국졸
20년
이준한 장남. 월북
면총무계장?
머슴
무학
?
면인위 물자징발 담당. 이준한집 머슴. 행불?
면자위대?
빈농?
무학?
?
강경파. 아들 의용군 자원입대(장교?). 조카 민청위원장. 행불
면인민위
중농?
무학
00년?
이장 처남. 도피후 검거 복역
보도연맹
부농
국졸
21년
이준한 차남
보도연맹
머슴?
국졸
28년
전쟁전 월북. 남파 유격대원. 전향후 정철희家 수발.
모친 리->면여맹장. 동생 의용군 자원.
보도연맹
중농?
한학
많음
"5호대장" 중 한 명.


읍인위 副長
빈농
한학
17년
김철환. 수복후 도피 중 체포 처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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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0.05.17
  • 저작시기20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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