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우회의 활동과 이념에 관한 고찰(아나키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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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머리말
2. 흑우회의 결성과 활동
3. 흑우회의 재건과 대외 연대활동
4. 흑우회의 이념
5. 맺음말

본문내용

이루었다. 또 민족의 공동이익에 관한 문제에는 꾸준히 연대활동을 펴온 게 사실이다. 1925년부터 1930년대 초반까지 전개된 친일융화단체 상애회와의 투쟁 역시 한인들의 인권옹호 차원에서 공동 대처하였다.
) 『한국아나키즘운동사』, 278-281쪽.
신간회를 둘러싼 마찰 또한 주로 1928년과 이듬해 동경지역에서 회원쟁탈의 건으로 발생했을 뿐이다. 大阪 등 타 지역에서는 거의 쟁투 없이 논쟁만 펼친 것으로 조사되었다.
) 大阪지역에서는 1927년 12월 신간회 발회식에서 '신간회 타도' 삐라가 뿌려졌을 뿐 공산진영과의 충돌양상은 거의 찾아 볼 수 없었다고 한다(정혜경, 『일제하 在日한국인 민족운동의 연구-大阪지방을 중심으로』,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박사학위 논문, 1999, 175쪽).
또 본국의 마산과 원산에서도 양 진영은 마찰을 빚은 바 있다. 하지만 이 역시 노선과 활동에 대한 갈등관계 때문은 아니었다.
) 개인 자격이나마 일부는 신간회 활동에 참여하였는데, 박열사건에 연루되었던 김중한은 고향인 진남포로 돌아와 신간회 간부로 활동하였고, 《自我聲》편입인이었던 윤혁제나 재중 아나키스트 김종진의 친형 김연진도 간부로 참여하였다(이균영, 『신간회연구』,역사비평사, 1993, 197-198쪽).
1927년 신간회와의 갈등을 계기로 한인 아나키스트들은 다른 세력과의 연합전선을 구축하지 못한 채 점차 고립되었다. 이는 지나친 반공산주의 경향과 경직된 전술의 채택 때문으로 평가된다. 하지만 이후 이들이 펼친 反상애회 투쟁과 노동운동, 반일 비밀결사운동 등은 다른 세력과 달리 독자적인 체계를 갖고 꾸준히 전개되었다. 이같은 抗日·反共的 독립이념은 민족의 해방과 무지배·무권력의 신사회 건설을 지향한 한인아나키즘운동의 특성을 잘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5. 맺음말
1920년대 일본지역에서 열악한 노동환경과 민족차별에 시달렸던 한인 유학생과 노동자들은 일본 노동운동 고조와 신사상을 유입을 통해 사상운동에 눈을 떴다. 1921년 11월 결성된 흑도회는 신사상을 수용한 한인들의 첫 사상단체이나, 이념대립으로 곧 분화하고 말았다. 흑우회는 공산진영과 결별한 이후, 순수 아나키스트들에 의해 조직되어 1920년대 재일한인 아나키즘운동을 주도한 사상단체이다.
1922년 10월 해산에 이어 12월 조직을 갖춘 흑우회는 박열 등 고학생들의 주도로 결성되었다. 결성 후 이들은 주로 출판사업과 일본단체와의 연대활동, 그리고 비밀결사 활동에 주력하였다. 박열과 金子文子는 不逞鮮人社에서 《太い鮮人》1·2호와 《現社會》3·4호를 발간하였고, 서상일 등이 흑우회 기관지로《民衆運動》을 발행하였다. 이 출판활동으로 주의선전과 동지규합에 나선 흑우회원들은 일본의 급진단체와도 친교를 맺어나갔다. 또 박열은 젊고 활동적인 한인과 일본인 등 20명으로 1923년 4월 불령사를 조직하였다. 불령사는 매월 한 차례씩 정기모임을 갖고 초청연설회와 친일파 테러 등 반일적 직접행동에 주력하였다. 하지만 불령사는 1923년 9월 동경 조선인학살을 합리화하려는 일본관헌에 의해 '대역사건'으로 대부분의 구속되어 괴멸되었다. 흑우회 역시 회원내부의 사상적·감정적 갈등으로 해산을 결의한 후, 활동을 중지하고 말았다.
1924년 9월 이후 흑우회는 민족운동의 재개와 박열의 법정투쟁, 그리고 이홍근 등 새 회원의 노력으로 조직력을 회복하기 시작했다. 재건 흑우회는 1926년 2월 임시총회를 통해 동지의 규합과 기관지 발간 등 공식활동을 재개하였다. 이들은 진재피해 추모회나 국내 기근구제회, 가상군사훈련 반대시위 등 민족 및 공산주의단체와 연대활동을 펼쳤다. 또 일본의 아나키즘단체인 흑색청년연맹에 가입하여 순정아나키즘의 이론과 조직운영을 수용하였다.
이들은 또 노동운동으로의 진출을 꾀하여 조선자유노동자조합과 동흥노동동맹 등을 조직하였다. 노동운동과의 연대활동은 주로 직업소개소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이들의 활동은 노동자들의 의식함양과 총파업 지도에서부터 임금차별 철폐와 거주권 확립 등 일상투쟁까지 폭넓게 펼쳐졌다. 흑우회는 노동자들의 사상활동을 지원하면서 6개소의 우의협력 단체와 회원 1천여 명을 확보하였다. 특히 일부 회원은 본국에 귀국하여 흑기연맹과 진우연맹, 그리고 관서흑우회 등 국내 아나키즘단체의 결성과 활동에 큰 영향을 끼쳤다.
한편, 재일한인 아나키스트들의 독립이념은 그들의 법정진술과 출판물, 그리고 강령 등을 통해 잘 드러난다. 우선 돋보이는 이념으로 자아주의와 허무주의를 꼽을 수 있다. 스튀르너의 개인적 아나키즘을 수용한 아나키스트들은 개인의 자유와 해방을 억제하는 기구로 일제의 천황제와 식민통치를 규정하고, 모든 지배권력의 타도를 주장하는 허무주의로 테러와 총파업 등 직접행동을 옹호하였다. 또 크로포트킨의 상호부조론을 수용한 아나키스트들은 자본주의 및 제국주의의 사회진화론을 비판하는 한편, 조합주의운동을 통해 공동체적 사회조직의 결성을 꾀하였다. 러시아의 혁명과정을 공산권력의 횡포로 규정한 아나키스트들은 중앙집권화에 강력히 반발, 아래로부터의 자유연합주의를 주창하였다. 그들의 조직 역시 아래로부터의 의견수렴과 상호 협력기관으로 운영하려 하였다. 이러한 아나키스트들의 자유연합주의와 반공산주의는 1926년말부터 일기 시작한 공산주의자들의 정치투쟁 선언과 신간회 등 단일정당 운동과 노선상의 갈등을 빚게 되었다.
신간회를 둘러싼 공산진영과의 대립은 1927년 12월 동경 조선인단체협의회를 탈퇴함으로써 더욱 심화되었다. 공산진영과의 비타협적 투쟁을 표방한 강경파들은 흑우연맹으로 1928년 1월 조직을 개편하였다. 이들은 신간회 지부를 습격하고 재일노총과 충돌하는 등 점차 폭력화하여 다른 진영으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이러한 폭력화 양상은 친일단체인 상애회와의 쟁투로 더욱 가열되었고 더 이상의 연대활동을 펴지 못한 채 고립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하지만 이들은 이후 反상애회 투쟁과 노동운동, 그리고 반일 비밀결사운동 등 독자적인 민족운동을 꾸준히 전개하였다. 이같은 재일한인 아나키스트들의 비타협적 抗日·反共운동은 민족의 해방과 더불어 무지배·무권력의 신사회를 건설하려는 이들의 민족운동상의 특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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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0.05.21
  • 저작시기20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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