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장 유교 이념에 지배된 조선초기건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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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장 유교 이념에 지배된 조선초기건축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7장 유교 이념에 지배된 조선초기건축

본문내용

었다고 추청된다.
또 집들은 어느 정도 신분이 높은 사람의 경우에도 중심 부분만 기와를 덮고 나머지 부속채는 초가로 이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 시기 상류층 주택 규모를 적은 기록 중 하나로 태조의 딸이었던 숙신옹주의 집에 대한 사례를 볼 수 있다. 숙신옹주가대라는 이름으로 전하는 기록에 적힌 옹주의 살림집은 전체 24칸이며 그 가운데 몸채 2칸 및 전후퇴 동부사 1칸 주사 1칸 누상고3칸이 기와를 덮은 집이고 나머지 주방3칸 고방3칸 전후퇴 누상고 2칸 내사랑4칸 서방2칸 전후퇴 남청3칸 전후퇴는 모두 초가지붕이라고 하였다. 이집은 도성 내 동부 변방동에 있었다고 하는데 몸채 주변의 7칸 만이 기와지붕이고 나머지 17칸은 초가였던 셈이다. 이 기록에는 앞의 가사제한에서 보았던 정침이나 누 사랑 서청과 유사한 몸채 누상고 서방 내사랑 등이 있어서 이런 실들이 조선초기 상류층 주택에 보편적으로 갖추어져 있었음을 알려준다.
5. 다포형식의 유행
공포 형식에서 볼 때 조선초기 궁전이나 성문 등 국가적인 중요시설은 대부분 다포식으로 지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다포형식은 공포가 처마 밑을 가득 장식하고 포를 여러 겹 중첩시키기 때문에 화려한 느낌을 주는 동시에 처마가 위로 들어 올려지는 효과를 낳아 당당한 외관을 갖는다. 이런 모습이 신 왕조의 위엄을 드러내는데 필요한 궁전이나 성문에 잘 들어맞았던 것이다. 불교사찰에서도 불상을 무신 불전에 다포식이 주로 채택되었다. 반면 지방의 관청건물이나 산간의 사찰들은 주로 주심포식 공포를 꾸몄다. 주심포식은 다포식처럼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비용이 적게 들면서 어느 정도 격식이 있는 것이어서 지방관청이나 산간 사찰의 형편에 알맞은 것이었다.
서울 남대문에는 공사에 종사한 기술자가 누구였는지를 밝혀주는 기록이 전한다. 1960년대 해체수리과정에서 창건공사와 두 차례 재건공사에 종사한 기술자의 인적사항을 적은 기록을 찾아냈다. 건물 곳곳에 먹으로 적어놓은 기록들에 의하면 남대문 창건공사에서 건축기술자의 우두머리 직책인 대목일은 각화사의 승려인 각희가 맡았다고 하였다. 도성의 정문을 짓는 공사를 승려가 대목으로 일했다는 것이 의아하지만 바로 이 점이 조선왕조 탄생기의 시대상을 반영한다. 즉 고려말에 우수한 기술자들은 권문세족의 개인 일에 얽매여 있었고 불교사찰의 건축공사는 승려들이 직접 목수 일을 도맡고 있었는데 조선왕조 창건 직후 국가의 큰 공사가 갑자기 벌어지자 우선 필요한 대로 승려 기술자를 불러서 남대문 창건을 맡겼던 것으로 추측되는 것이다.
조선초기에 들어와 목조건축은 주심포형식과 다포형식을 큰 줄기로 하면서 지역적으로 다양한 변형을 창출하고 있었으며 두 형식의 절충 방안도 적극 시도되었다. 중앙의 관청 관련 시설이 안정된 기술 인력을 바탕으로 화려한 외관을 나타내는 다포형식을 착실히 조성해 나간 반면 지방에서는 승려장인들의 손에 의해 전통적인 주심포식과 이를 변형 응용한 다양한 구조적 고안이 실험적으로 응용되었다. 이른 전통은 16세기로 넘어가면서 익공식이라는 또 다른 독창적인 구조방식을 출현시킬 토양이 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오면서 명나라나 주선은 다 같이 쇄국정책을 폈다. 이런 여건에서는 어느 쪽이나 더 이상 바깥으로부터 새로운 자극을 받기 어려웠다. 조선초기 건축술은 고려시대에 축적된 경험과 기술을 바탕으로 이를 한반도의 여건에 맞추어 더 가다듬고 심화시키는 길로 나아갈 수 밖에 없었다. 앞에서 살펴본 조선초기의 다포형식이나 주심포형식은 그런 노력의 결과인 셈이다.
이 시기 명나라의 건축은 더 이상 목조건축에서 새로운 기술적 창안을 이루어내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중국의 목조건축술은 이미 11세기에 영조법식 이라는 책자의 간행에서 고도로 다듬어지고 합리화된 단계에 이르렀다. 그 이후 목조건축은 더 이상의 새로운 창안을 멈추고 그 수준에서 각 지역의 건축여건에 맞추어 재생산되었다고 생각된다.
명나라에 와서 나타난 새로운 기술적 성과는 벽돌건물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본래 화북지방은 양질의 벽돌을 구울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황하 상류에서 불어오는 흙먼지는 벽돌을 굽기에 적합한 토층을 만들어 주었다. 여기에 원나라 때부터 나타난 목재의 고갈은 자연스럽게 이 지역의 건축재료를 벽돌로 전환시켜주었다. 베이징 부근의 명나라 황제 무덤에는 벽돌조 보울트 구조가 흔하게 응용되었으며 명초에 북방 이민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축조한 장성은 이 시기 벽돌제작과 활용의 정점을 보여준다.
7장
유교 이념에 지배된
조선초기 건축
  • 가격2,000
  • 페이지수9페이지
  • 등록일2010.06.02
  • 저작시기2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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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6164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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