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주자료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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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충주자료집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김정호의 청구도 (호서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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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탐방 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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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가는곳 - 충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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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룡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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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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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원고구려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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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평리 칠층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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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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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국영 촬영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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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빈신사터 사사자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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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륵리사지

본문내용

크기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것으로 꼽힐 만하다. 이 또한 본디 그 자리에 있던 거대한 바위를 다듬어 이룬 것으로, 머리 부분을 점차 용의 모습처럼 표현해가던 나말여초의 돌거북 유형과 달리 세모진 머리에 동그란 눈, 너부죽하게 다문 입, 조그많게 뚫린 콧구멍 등이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귀갑문 등 세부적인 묘사는 생략하였고 등 가운데에 네모지게 비좌를 파놓았으나 비신은 간데없다. 재미있는 것은 거북의 왼쪽 어깨쯤에 밟고 올라가라는 사다리인 듯 네 칸이 파여 있고 그 아래에 자그마한 거북 두 마리가 어미의 등을 발발 기어오르는 형상으로 새겨져 있는 점이다. 돌거북은 발이 아주 간략하게 표현되었지만 힘있게 빼올린 목덜미와 앞을 똑바로 바라보는 눈, 낙천적인 입 등으로 인해 자신만만하게 나아가는 자세를 하고 있다.
절터에서 나와 동쪽의 하늘재 방향을 걸음을 옮겨보면 절터를 조금 벗어난 곳에 널찍한 건물터가 남아 있다. 이 건물 자리는 절에 딸린 부대시설이나 병영으로 추정된다. 삼국시대 이래 계립령 길을 누가 장악하는가는 나라의 판도를 가름할 정도로 중요했으므로, 그 요지에 자리잡은 이 절은 사찰로서뿐 아니라 군사적으로도 중요한 기능을 했을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중원 미륵리 삼층석탑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33호
충청북도 중원군 상모면 미륵리에 있는 고려시대의 삼층석탑으로 충청북도유형문화재 제33호이다. 석굴이 있는 사원(寺院) 경내에서 동쪽으로 500m 쯤 떨어진 곳에 자리잡고 있다. 원위치라고 추정되는데 절터와 동떨어진 이곳에 왜 탑이 세워졌는지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
통일신라 삼층석탑 양식을 따른 자그마한 탑이다. 산 속의 등대처럼 이정표의 역할을 했으리라 추정된다. 풍수 보는 이들에 따르면, 미륵리 절을 중심으로 볼 때 지릅재가 장풍의 역할을 제대로 맡고 있지만 하늘재 쪽이 너무 낮아 허하기 때문에 비보책으로 탑을 세웠다고도 한다.
좀더 자세히

미륵신앙
크게 미륵보살이 주재하는 도솔천에 태어나기를 원하는 도솔천 상생신앙과, 말세적인 세상을 구제하러 미륵이 하생하기를 바라는 미륵하생신앙의 2가지 흐름으로 나누나 근본적으로는 이상세계를 제시하는 미륵의 대승설법이 이루어지는 복지사회에의 염원에서 나온 불교적 이상사회관으로 볼 수 있다. 먼저 인도에서는 현재까지 남아 있는 미륵보살상을 통해 간다라 미술의 유입기인 BC 2세기경부터 모든 중생의 이익을 원하는 미륵상이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고, 중국의 경우 현재 남아 있는 룽먼[龍門]석굴의 미륵상들을 통해 6세기 북위 불교의 미륵신앙 열기를 추정할 수 있다. 불교 경전에 등장하는 여러 보살들에 대한 신앙 중에서 미륵보살에 대한 신앙이 가장 오래되었고, 또한 미륵의 명칭은 초기 경전에서 후기 경전까지 끊이지 않고 나오기 때문에 대중들에 대한 영향도 깊다. 특히 말세사상과의 연관은 정치사회적으로 소외된 민중들에게 부각되어 사회 모순을 해결짓는 구세주로서의 미륵을 갈구하는 사회개혁 이념으로서의 역할도 하였다.
한국의 초기 불교 수용에서부터 전래된 미륵신앙은 특히 신라와 백제에서 국가 통치 이념으로서 응용되어 백제의 무왕은 익산 미륵사의 창건으로 왕권을 강화하며, 신라 진흥왕은 왕자의 이름을 금륜과 동륜으로 지어 전륜성왕(轉輪聖王)의 이상적인 치세를 흠모하는 정치를 펼치며, 신라의 화랑 또한 미륵의 화현(化現)인 국선(國仙)을 따르는 청년집단으로 결성되어, 고대 이상세계를 건설하는 주체로 형성되었다. 또한 미륵경전에서 강조된 10가지 착한 행위는 참회를 통해 지난 죄업을 소멸하는 수행을 낳게 되며, 《삼국유사》에 나오는 노힐부득(努慰夫得)의 현신성도(現身成道) 설화는 대중 구제적인 방편과 함께 자신을 연마하는 미륵신앙의 정점을 보여준다. 후삼국시대 궁예의 경우는 말세적인 민심을 이용하여 자신이 미륵이라 하여 일시적인 대중의 호응을 얻기도 하는데 이 또한 미륵하생의 원용이다. 근세 한국에서 일어난 증산교 및 용화교 등도 사회 갈등기에 일어나는 민중의 소망을 사회구제적인 미륵신앙을 통해 해결하고자 하는 종교운동이다.
월악산 국립공원
월악산은 백두대간이 소백산에서 속리산으로 연결되는 중간의 위치에 있으며, 산세가 험준하고 기암 단애가 맹호처럼 치솟아 심산유곡과 폭포와 소 등이 어우러져 한껏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하고 있다.
월악산을 중심으로 여름에도 눈이 녹지 않는다는 하설산을 비롯하여 용두산, 문수봉, 만수봉 등 수려한 산봉우리들이 즐비하고, 정상(영봉)에 오르게 되면 만고풍상을 견디며 자라온 잣나무가 사계절 푸르고 동서남북으로 훤히 트인 하늘이 쾌적하게 펼쳐지며 또한, 충주호의 아름다운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월악산 국립공원은 1984년 12월 31일에 우리나라 20개 국립공원 중 17번째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행정구역상으로 제천시, 충주시, 단양군, 문경시 4개 시군에 걸쳐 있으며 북으로 충주호반이 월악산을 휘감고, 동으로 단양8경과 소백산국립공원, 남으로 문경새재와 속리산국립공원과 같은 아름다운 자연경관으로 둘러싸여져 있다 월악산 영봉은 국사봉이라고도 불리며 예로부터 신령스런 산으로 여겨져 '영봉'이라고 불리어지고 있다. 해발 1,097m로 험준하며 가파르기로 이름나 있고 암벽높이가 150m높이에 둘레가 4km나 되는 거대한 암반으로 형성되어 있다 공원 내에는 1,161m의 문수봉을 비롯하여 여름에도 눈이 녹지 않는다는 하설산, 매두막, 대미산, 황장산 등의 1,000고지가 넘는 높은 산들이 산악군을 형성하며 벌재에서 마패봉에 이르는 백두대간이 뻗어있고 고봉준령들 사이로 많은 경관명소들을 지닌 송계계곡, 용하계곡, 선암계곡이 굽이쳐 흐르며 산악공원의 장관을 보여주고 있다. 주변에 충주호반을 비롯하여 문경새재도립공원과 제천의 의림지, 단양 적성의 선사유적지와 석회암지대에 형성된 많은 동굴들, 청풍의 문화재단지 등 문화경관자원이 산재해 있고 수안보문경문강단양유황온천이 30-40분 거리에 위치하고 있을뿐 아니라 공원내에 미륵리사지를 비롯하여 덕주사, 신륵사 등의 전통사찰과 마애불 미륵사지, 빈신사지사자석탑, 덕주산성, 신륵사 3층석탑 등 많은 문화자원을 보유하고 있는 자연과 문화자원이 어우러진 빼어난 국립공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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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0.06.09
  • 저작시기2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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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617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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