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청원 문화유적 자료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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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청주,청원 문화유적 자료집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우리가 가는곳 -청주, 청원-
신채호 사당
청주 문화의 집
고인쇄 박물관
정북동 토성
상당산성

본문내용

덕사지
양병산 동남쪽 기슭의 옛 연당리 마을에 있는 흥덕사지(興德寺地)는 85년에 토지개발공사에서 시행하던 운천지구 택지개발사업중 많은 유물이 출토되어 공사를 중단하고 청주대학교 박물관에 의하여 발굴된 고사지이다. 사찰의 창건년대와 규모는 알 수 없으나, 현존하는 세계 최고(最古)의 금속활자본인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 하권의 간기에 고려 우왕 3년(1377)에 청주 흥덕사에서 금속활자로 책을 인쇄하였음을 명기하고 있는데, 이것은 독일의 구텐베르크보다 70여년이나 앞선 것으로 1972년 "세계 도서의 해"에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본으로 공인된 것이다.
발굴 완료후 사적 제 315호로 지정되어 우리나라 인쇄문화의 발달과정을 살필 수 있는 고인쇄박물관과 금당, 3층석탑을 복원하고 1992년 3월 17일 개관하였다.
전시실은 인쇄문화실과 흥덕사지 유물실로 되어있고 고서 503점, 인쇄기구 69점, 흥덕사 출토유물 65점등 총 637점을 소장하고 있다
성곽의 대하여
성곽의 시초
우리 나라에 언제부터 성곽이 나타났는지는 분명히 밝힐 수는 없다 문헌상에 나타난 것으로는 사기 조선 전에 평양성의 존재를 언급하고 있는 것이 처음인데 이는 대체로 기원전 2세기에 해당된다. 한편 남한에서는 이보다 훨씬 늦은 삼한시대에 성곽에 관한 문헌기록이 보인다. 고고학적인 성과로는 대체로 서기 2세기 이후에 남한 지역에서 처음으로 성곽이 나타나는 것으로 되어있다. 초기 철기시대에 해당되는 김해 회현리 패총에서 성책을 설치하였던 흔적이 발견된 예가 있다 그러나 철기 문화를 누리고 삼국의 왕권이 강화되기 시작한 서기 1세기 무렵에는 적어도 삼한이나 삼국에 성곽과 비슷한 방어시설이 생겨났다고 보이며 백제나 신라는 그 영역의 확장에 따라 성이나 책을 신축했으며 삼한의 여러 세력들도 취락주변에 성을 가지고 있어 성을 기초단위로 한 성읍 국가를 이루고 있었다고 보인다. 삼국의 성곽 시설로는 대부분 간단한 목책이었을 것으로 추측되며 본격적인 석축에 의한 성곽은 삼국이 고대국가로 발전하기 시작한 3세기 이후에 가능했다. 처음에는 간단한 목책의 시설물로부터 시작하여 차츰 토성으로 발전해 갔으며 그 다음 단계에는 많은 인력과 경비가 소요되는 석성을 쌓았다. 목책은 나무 기둥을 엮어 세워 적이 넘어오지 못하게 만든 원시적인 울타리 성이었지만 삼국시대에 많은 사례를 찾아볼 수 있으며 임진왜란 때 권율 장군의 행주 대첩에서도 목책성이 주요 방어시설로 활용되었다. 토성은 흙을 다져 넣어가며 쌓는 판축법과 토성이 축조될 곳의 좌우 흙을 파내 둔덕을 쌓아올리는 삭토법이 있는데 판축식은 주로 평야에서 삭토식은 산등성이에서 사용되었다. 목책성이나 토성, 석성 등은 그 출현시기가 각기 다르지만 삼국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를 거치는 동안 기능에 따라 혼재해왔으며 조선후기 실학자들에 의해 벽돌성의 필요성이 제기되었으나 정조때 수원성 축성에서 부분적으로 채택되었을 뿐 우리 나의 성곽은 석성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삼국시대의 성곽은 산성이 주류를 이루었으며 그 발생 과정도 산성이 다른 형식의 성곽보다 먼저 나타났다. 이것은 우리 나라의 지세가 산악으로 중첩되어있어 자연지세의 험고를 이용하려 했기 때문이다. 초기에는 주로 낮은 구릉을 이용하여 토축 또는 석심 토축의 토성을 쌓다가 후기로 갈수록 성곽의 규모도 커지고 재료도 대개 석축으로 바뀌게 된다. 또 처음에는 산봉우리를 중심으로 정상부근에 태를 두른 듯한 태뫼형이 많으나 후기에 오면 골짜기를 둘러싸는 포곡형이 주류를 이룬다. 테뫼형은 대체로 규모가 작은 산성에서 채택되고 있는데 높은 산봉우리에 쌓는 경우도 있으나 한편으로는 평야에 가까운 구릉에 자리잡고 있는 경우도 있다. 산성의 둘레는 4백내지 6백 미터 가량 되는 것이 보통이지만 때로는 8백 미터가 넘는 큰 것도 있다. 성벽을 토축으로 한 것이 많으며 또 그것을 이중 삼중으로 둘러쌓은 것을 볼 수 있다. 포곡형은 내부에 넓은 계곡을 포용한 산성을 말하는데 계곡을 둘러싼 주위의 산 능선을 따라 성벽을 축조하였다. 성내의 계류는 평지에 가까운 곳에 마련된 수구를 통해 밖으로 흘려보내는데 성문도 이러한 수구 부근에 설치되는 수가 많다.
성안의 가장 높은 곳에 장대를 만들어 사방을 내려다 볼 수 있게 하고 평탄한 지형을 골라 군창 등의 건물을 세웠다. 성벽은 대개 견고한 석축으로 쌓았으며 자연석 또는 다듬은 돌을 사용하고 있다. 석축의 구조적인 공법으로는 현축과 내탁의 두 가지 축성법이 있는데 전자는 성벽의 안팎을 모두 수직에 가까운 석벽으로 쌓은 것을 말하며, 후자는 바깥쪽만 석축을 이루고 안쪽은 흙과 잡석으로 다져서 밋밋하게 쌓아 올린 것을 말한다. 그런데 삼국시대의 산성은 대개 내탁법을 주로 사용하고 있으며 이러한 형태는 조선시대의 산성에서도 흔히 볼 수 있다. 내탁법의 산성에서 성안 사람들이 성곽을 방어하기에 더 편리했기 때문이다. 석축 방식은 이른바 물림 쌓기란 공법으로 아랫돌에 비해 윗돌을 조금씩 뒤로 물려 쌓아 전체적으로 성벽이 15도 가량의 경사를 유지하게 하였다. 따라서 성벽의 단면은 사다리꼴을 이루게 되는데 이는 성벽이 무너지지 않고 오래 견고하게 견딜 수 있도록 한 공법상의 배려이다.
삼국시대의 축성술은 백제를 통해 일본에 전해져 규수지방과 대마도에는 조선식 산성이란 이름으로 많이 남아 있다. 일본에 건너간 백제인 기술자들은 7세기 전반부터 후반에 걸쳐 대규모의 조선식 산성을 쌓았는데 그 대표적인 것으로는 태재부 방위를 위해 축조한 대얏성, 기진성과 대마도의 금전성을 들 수 있다.
성곽의 분류
성곽의 분류는 거주주체, 지형, 목적에 따라 분류해 볼 수 있다. 거주주체에 따른 분류는 축성시 누구를 위해 조성하였느냐에 따라 평시 거주 여부에 따라 도성, 궁성, 행재성, 읍성으로 분류해 볼 수 있으며 기타로 왜인들이 지은 왜성이나 우리 선조가 일본에 건너가 지은 한식 산성 등이 있다. 목적에 따른 분류로서는 행적 적인 목적과 군사적인 목적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지형에 따른 분류로서는 어느 지형에 지었느냐에 따라 산성, 평지성, 평지와 산성이 혼합된 평산성등이 있다. 이외에도 여러 기준에 따라 분류되어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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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0.06.09
  • 저작시기2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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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617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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