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싶다.
요즘 수목드라마 ‘산부인과’가 방영중이다. 이 드라마는 2010년 대한민국에서 방영되는 것이니 아무래도 현재 우리 현실과 거의 같다고 판단 할 수 있다. 그런데 낙태에 대한 기술적 대책만 있을 뿐 성교육과 같은 사전 예방에 관해서는 1987년 루마니아와 다를 게 없는 것 같다. 한번은 이런 내용이 있었다.
주인공인 산부인과 여의사가 한 고등학교에 성교육을 하러 갔다. 주인공은 한명의 조교를 대리고 콘돔을 씌우는 방법, 피임약을 어떻게 복용해야 한다는 것 등을 강의한다. 아이들은 흥미를 느끼고 집중해서 들을뿐더러 여러 가지 질문도 한다. 그런데 주인공이 강의를 마치고 병원으로 돌아왔을 때 주위의 반응은 상당히 비관적이며 비판적이다. 아이들에게 학생신분에 성관계를 잘 할 수 있도록 알려주고 왔다는 것이다. 정말 웃긴 일이다. 고등학생 시절에 이런 노골적이고 정확한 교육을 받지 않으면 언제 받는다는 것인가. 대학? 웃긴 소리다. 대학생 때는 성교육을 받기 늦은 나이다. 이미 일이 벌어진 상태일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나도 사실 정확한 성교육을 받은 세대는 아니다. 그래서인지 이 영화를 보고나니 겁이 난다. 피해를 더 많이 받는 쪽은 여자겠지만, 나도 저런 일에 처하게 되면 남자로서 과연 어떻게 행동할지 의문이다.
중학교 1학년 시절에 이런 일이 있었다. 우리학교는 나름 명문이라는 소리를 한창 듣고 있을 때였다. 학교 뒤쪽에서 여자 한명이 쓰러진 채로 발견되었다. 3학년 선배 한명이 학용품 칼을 이용해 여자를 찌른 것이다. 이유는 임신. 아직 16살 밖에 되지 않았는데 3학년 선배가 여자 친구와 교재 중 결국 임신을 시키고 말았던 것이다. 보라. 잘못된 성교육의 병폐는 이 정도다. 22살 밖에 되지 않았지만 이런 일도 보고 듣고 자랐다. 우리 세대가 성교육의 질을 우려하는 건 당연할 지도 모른다. 따지고 보면 낙태가 일어나는 근본원인도 지식부족이 대부분을 차지할 것이다.
이제 사회적인 문제에 대한 이야기는 그만하고 어머니로서 여자에 대해 다루어 보고자 한다. 이와 함께 인간의 본성에 관해서도 이야기해 보겠다. 어머니는 우리를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분이다. 그만큼 책임감도 강하고 자식에 대한 애정도 하늘과 같다. 이 영화 속에서는 ‘오틸리아’의 어머니로서의 면모를 볼 수 있다.
위 그림은 ‘오틸리아’가 ‘가비타’의 태아를 버리는 장면이다. ‘오틸리아’는 자신의 아이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불쌍할 정도로 흐느낀다. 흐느껴 울며 머뭇거리다 다른 사람이 오는 발소리를 듣고 순간적으로 아이를 아파트 쓰레기통에 버리고 만다. ‘가비타’는 ‘오틸리아’에게 아이를 묻어달라고 부탁하지만, 예상외로 ‘오틸리아’는 아파트 쓰레기통에 아이를 버리고 와버린다. 이것은 본성이겠지? ‘오틸리아’도 상당히 무서웠을 것이다. 사실 주위에 사람이 아무도 없었지만 자신은 범죄를 저지르고 있으며 아이를 버린다는 죄책감이 있었을 것이다. 이 장면에서 나는 심장이 뛰었다. ‘오틸리아’는 아이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고 허겁지겁 장소를 모색한다. 뒤에서 걸어오는 남자도 ‘오틸리아’에게는 무서워 보인다. 그렇게 눈물이 그렁그렁한 그녀의 겁먹은 발걸음은 나에게 슬프게만 느껴질 뿐이다.
또 한 가지. 이번에는 ‘가비타’. 사실 내 입장에서 ‘가비타’는 인격적으로 성숙하지 못해 보인다. 물론 낙태를 한 본인이 가장 충격이 컸겠지만, 영화 속에서 ‘가비타’는 태아 보다는 자신의 본능에 더 충실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웃긴 일이다. 여기서 두 주인공이 하는 대화를 들어보면 참으로 아무 일도 없었던 것 같이 느껴진다. ‘오틸리아’가 아이를 버리고 다시 돌아왔을 때 ‘가비타’는 방에 없었다. 카운터에 물어보니 ‘가비타’가 간 곳은 호텔 내 식당. 배가 너무 고팠다는 것이다. 자신의 아이를 낙태하고 나서 밥이 먹고 싶을까. 죽은 아이의 얼굴을 정확히 보았는데도.......... 사실 이것은 내 가치관일 수 있기 때문에 신랄한 비판을 퍼붓지는 못하겠다. ‘뭐, 배가 고프니 그러겠지.’ 하고 넘어가는 사람도 있기 때문이다. 아이를 버리는 장면에서 느낀 긴장감은 사라지고 허탈감과 허무감이 내 몸을 감쌌다.
전반적으로 이 영화는 낙태라는 것을 사회적인 면에서 접근하기 보다는 개인적인 면에서 더 깊이 접근 한 것 같다. 연기자의 표정이 일품이었다. 또 원하지 않는 임신을 했을 때 사회분위기에 따라 산모가 어떻게 행동할지를 암시하고 있으며, 무엇보다 부모로서 아이에 대한 책임감이란 무엇인가 하는 것도 알려주고 있다. 심오하면서도 깊은 영화의 전달력이 많은 상을 받게 하지 않았나 싶다.
‘베베’의 이런 대사가 생각난다. ‘임신 4개월부터는 중절이 아니라 살인이다.’ 이 말을 들은 ‘오틸리아’와 ‘가비타’의 표정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다. 의사 사회에서도 실력이 없는 의사에게 ‘의사가 될래? 백정이 될래?’라고 말한다. 백정은 동물을 살육하는 사람이고, 그만큼 인간을 대상으로 시술하는 의사에게 있어서 살인이라는 것은 상당히 중죄라는 것을 뜻하므로 책임감을 가지라는 의미다.
그렇다. 부모는 아이에게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 하지만 이런 경우에도 그런 책임감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주위환경, 경제적 사정을 따지지 않고 아이를 낳아 헌신적으로 기를 수 있는 사람은 몇 되지 않을 것이다. 영화를 보면서 많은 생각을 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절실히 느낀 것이 낙태에 대한 법안을 현실적으로 개정해야한다는 것이다. 부모가 책임감을 가지고 아이를 낳아 기르려고 하는 것이 인간으로서의 도리라고 생각하지만, 그 만큼 그 책임감을 지지해줄만한 요소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 정도는 산모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모두 어머니의 몸속에서 생겨서 태어나지 않았는가? 현재 우리나라도 이런 노력을 많이 하고는 있지만 아직 혼전 임신이나 출산에 대해서는 많이 부족한 것 같다. 병원과 정부, 국회 간에 많은 의사소통을 통해서 빠른 시일 내에 이 영화와 같은 일이 완전히 없어졌으면 좋겠다.
Reference
-네이버 백과사전 ‘낙태’
-네이버 블로그 ‘영화 한편의 행복’ 내 4개월, 3주, 그리고 2일
-네이버 지식 in ‘낙태기구’
요즘 수목드라마 ‘산부인과’가 방영중이다. 이 드라마는 2010년 대한민국에서 방영되는 것이니 아무래도 현재 우리 현실과 거의 같다고 판단 할 수 있다. 그런데 낙태에 대한 기술적 대책만 있을 뿐 성교육과 같은 사전 예방에 관해서는 1987년 루마니아와 다를 게 없는 것 같다. 한번은 이런 내용이 있었다.
주인공인 산부인과 여의사가 한 고등학교에 성교육을 하러 갔다. 주인공은 한명의 조교를 대리고 콘돔을 씌우는 방법, 피임약을 어떻게 복용해야 한다는 것 등을 강의한다. 아이들은 흥미를 느끼고 집중해서 들을뿐더러 여러 가지 질문도 한다. 그런데 주인공이 강의를 마치고 병원으로 돌아왔을 때 주위의 반응은 상당히 비관적이며 비판적이다. 아이들에게 학생신분에 성관계를 잘 할 수 있도록 알려주고 왔다는 것이다. 정말 웃긴 일이다. 고등학생 시절에 이런 노골적이고 정확한 교육을 받지 않으면 언제 받는다는 것인가. 대학? 웃긴 소리다. 대학생 때는 성교육을 받기 늦은 나이다. 이미 일이 벌어진 상태일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나도 사실 정확한 성교육을 받은 세대는 아니다. 그래서인지 이 영화를 보고나니 겁이 난다. 피해를 더 많이 받는 쪽은 여자겠지만, 나도 저런 일에 처하게 되면 남자로서 과연 어떻게 행동할지 의문이다.
중학교 1학년 시절에 이런 일이 있었다. 우리학교는 나름 명문이라는 소리를 한창 듣고 있을 때였다. 학교 뒤쪽에서 여자 한명이 쓰러진 채로 발견되었다. 3학년 선배 한명이 학용품 칼을 이용해 여자를 찌른 것이다. 이유는 임신. 아직 16살 밖에 되지 않았는데 3학년 선배가 여자 친구와 교재 중 결국 임신을 시키고 말았던 것이다. 보라. 잘못된 성교육의 병폐는 이 정도다. 22살 밖에 되지 않았지만 이런 일도 보고 듣고 자랐다. 우리 세대가 성교육의 질을 우려하는 건 당연할 지도 모른다. 따지고 보면 낙태가 일어나는 근본원인도 지식부족이 대부분을 차지할 것이다.
이제 사회적인 문제에 대한 이야기는 그만하고 어머니로서 여자에 대해 다루어 보고자 한다. 이와 함께 인간의 본성에 관해서도 이야기해 보겠다. 어머니는 우리를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분이다. 그만큼 책임감도 강하고 자식에 대한 애정도 하늘과 같다. 이 영화 속에서는 ‘오틸리아’의 어머니로서의 면모를 볼 수 있다.
위 그림은 ‘오틸리아’가 ‘가비타’의 태아를 버리는 장면이다. ‘오틸리아’는 자신의 아이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불쌍할 정도로 흐느낀다. 흐느껴 울며 머뭇거리다 다른 사람이 오는 발소리를 듣고 순간적으로 아이를 아파트 쓰레기통에 버리고 만다. ‘가비타’는 ‘오틸리아’에게 아이를 묻어달라고 부탁하지만, 예상외로 ‘오틸리아’는 아파트 쓰레기통에 아이를 버리고 와버린다. 이것은 본성이겠지? ‘오틸리아’도 상당히 무서웠을 것이다. 사실 주위에 사람이 아무도 없었지만 자신은 범죄를 저지르고 있으며 아이를 버린다는 죄책감이 있었을 것이다. 이 장면에서 나는 심장이 뛰었다. ‘오틸리아’는 아이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고 허겁지겁 장소를 모색한다. 뒤에서 걸어오는 남자도 ‘오틸리아’에게는 무서워 보인다. 그렇게 눈물이 그렁그렁한 그녀의 겁먹은 발걸음은 나에게 슬프게만 느껴질 뿐이다.
또 한 가지. 이번에는 ‘가비타’. 사실 내 입장에서 ‘가비타’는 인격적으로 성숙하지 못해 보인다. 물론 낙태를 한 본인이 가장 충격이 컸겠지만, 영화 속에서 ‘가비타’는 태아 보다는 자신의 본능에 더 충실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웃긴 일이다. 여기서 두 주인공이 하는 대화를 들어보면 참으로 아무 일도 없었던 것 같이 느껴진다. ‘오틸리아’가 아이를 버리고 다시 돌아왔을 때 ‘가비타’는 방에 없었다. 카운터에 물어보니 ‘가비타’가 간 곳은 호텔 내 식당. 배가 너무 고팠다는 것이다. 자신의 아이를 낙태하고 나서 밥이 먹고 싶을까. 죽은 아이의 얼굴을 정확히 보았는데도.......... 사실 이것은 내 가치관일 수 있기 때문에 신랄한 비판을 퍼붓지는 못하겠다. ‘뭐, 배가 고프니 그러겠지.’ 하고 넘어가는 사람도 있기 때문이다. 아이를 버리는 장면에서 느낀 긴장감은 사라지고 허탈감과 허무감이 내 몸을 감쌌다.
전반적으로 이 영화는 낙태라는 것을 사회적인 면에서 접근하기 보다는 개인적인 면에서 더 깊이 접근 한 것 같다. 연기자의 표정이 일품이었다. 또 원하지 않는 임신을 했을 때 사회분위기에 따라 산모가 어떻게 행동할지를 암시하고 있으며, 무엇보다 부모로서 아이에 대한 책임감이란 무엇인가 하는 것도 알려주고 있다. 심오하면서도 깊은 영화의 전달력이 많은 상을 받게 하지 않았나 싶다.
‘베베’의 이런 대사가 생각난다. ‘임신 4개월부터는 중절이 아니라 살인이다.’ 이 말을 들은 ‘오틸리아’와 ‘가비타’의 표정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다. 의사 사회에서도 실력이 없는 의사에게 ‘의사가 될래? 백정이 될래?’라고 말한다. 백정은 동물을 살육하는 사람이고, 그만큼 인간을 대상으로 시술하는 의사에게 있어서 살인이라는 것은 상당히 중죄라는 것을 뜻하므로 책임감을 가지라는 의미다.
그렇다. 부모는 아이에게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 하지만 이런 경우에도 그런 책임감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주위환경, 경제적 사정을 따지지 않고 아이를 낳아 헌신적으로 기를 수 있는 사람은 몇 되지 않을 것이다. 영화를 보면서 많은 생각을 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절실히 느낀 것이 낙태에 대한 법안을 현실적으로 개정해야한다는 것이다. 부모가 책임감을 가지고 아이를 낳아 기르려고 하는 것이 인간으로서의 도리라고 생각하지만, 그 만큼 그 책임감을 지지해줄만한 요소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 정도는 산모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모두 어머니의 몸속에서 생겨서 태어나지 않았는가? 현재 우리나라도 이런 노력을 많이 하고는 있지만 아직 혼전 임신이나 출산에 대해서는 많이 부족한 것 같다. 병원과 정부, 국회 간에 많은 의사소통을 통해서 빠른 시일 내에 이 영화와 같은 일이 완전히 없어졌으면 좋겠다.
Reference
-네이버 백과사전 ‘낙태’
-네이버 블로그 ‘영화 한편의 행복’ 내 4개월, 3주, 그리고 2일
-네이버 지식 in ‘낙태기구’
소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