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리엔탈리즘의 구성과 재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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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제 1 장 : 재설정된 경계선, 재정의된 문제,세속화된 종교
제 2 장 : 실베스트르드 사시와 에르네스트 르낭
제 3 장 : 동양체류와 동양에 관한 학문
제 4 장 : 순례자와 순례, 영국인과 프랑스인

본문내용

거나 또는 샤또브리앙과 같이 사적인 언어를 기록하거나 했다. 전자의 경우에 문제가 되는 것은, 그것이 일반적이고 집합적인 여러 현상을 서술하는 것의 가능성을 믿는, 몰개성적이고 서양적인 확신에 근거했다고 하는 점이고, 또 생생한 그대로의 현실을 동양 그 자체로부터가 아니라 자기자신의 관찰로부터 이해하고자 하는 경향으로 흐르기 쉬운 점이었다. 그리고 네르벨과 플로벨은 그들의 일반적인 문화적 태도만이 아니라 개인게 관련된 신화학도 동양에 도입하였다. 본래 이 신화학이 그 관심의 대상으로서 또 스스로의 구조 그 자체를 성립시키는 요소로서 동양을 필요로 했다. 두 사람 모두 퀴네가 정의한 동양 르네상스의 감화를 받아 놀랄 만한 고대적인 것, 엑조틱한 것이 준 상쾌감을 추구했다. 따라서 한편으로 동양을 소재로 한 그들의 작품이 다루는 영역은, 정통적인 오리엔탈리즘이 설정한 좁은 한계를 훨씬 초월하는 것이었다. 다른 한편으로 그들 작품의 주제는 동양적 또는 오리엔탈리즘적인 것에 그치지않고, 동양이나 동양에 관한 지식이 부과하는 제약과 도전을 확실히 의식적으로 자유롭게 조정했다. 그리고 또한 플로벨의 오리엔탈리즘은 다른 모든 오리엔탈리즘과 마찬가지로 동양의 부활을 목표로 삼는 것이 된다. 곧, 곧바로 '그가'동양에게 생명을 부여해아 하며, 그 동양을 그 자신과 그의 독자에게 인도하는 의무를 지게 되었다.19세기 중엽까지 프랑스에는 영국 및 다른 유럽 여러 나라와 마찬가지로, 확실히 플로벨이 두려워한 지식의 산업을 개화시키게 되었다. 방대한 양의 텍스트가 생산되었고, 나아가 중요한 것은 이러한 텍스트의 전파와 보급을 위한 기관과 제도가 모든 곳에서 발견되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버튼의 자유는 ,동양인으로서 살아갈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하게, 그가 유럽인으로서 근본을 흔들어 벗어난 결과 생긴 것이다. 버튼은 동양에 살고, 실제로 동양을 보고, 그곳에 젖은 인간의 시각에서 동양의 생활을 이해하고자 진지한 노력을 거듭함으로써 동양에 관한 지식을 확보했다. 그러한 지식을 토대로 하여 그는 동양인에 관한 일반론, 예컨대 아랍의 카이프라는 개념을 통한 한쪽, 또는 동양인의 마음에 교육이 얼마나 적합한 것인가를 설명한 한쪽을 조립했다. 동양은 하나의 장소라는 것으로부터 현실의 학술적 지배의 영역, 잠재적인 제국지배의 영역으로 변화했다. 르낭과 사시 그리고 레인과 같은 초기 오리엔탈리스트들의 역할은, 자신들의 작업과 동야의 쌍방에 대하여 '무대장치'를 부여하는 것이었다. 그 뒤의 오리엔탈리스트들은 학술적인 사람이든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이든 간에 이 무대를 분명히 지켰다. 나아가 그 뒤에 와서는 무대가 경영을 필요로 하게 되었고, 그것은 경영이라고 하는 일을 위하여 개인보다도 제도를 설정하고 정부를 개입시키는 쪽이 훨씬 낫다고 하는 사실이 분명하게 되었다. 이것이야말로 19세기 오리엔탈리즘이 남긴 유산이고, 20세기는 그것을 받은 상속인이 되었다. 그리고 우리들은 어떻게 하여 오리엔탈리즘이 완전히 형식화되고, 이어서 자기복사를 반복하게 되었는가를 조사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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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0.06.15
  • 저작시기2003.05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619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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