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머릿말
1.여운형의 정치사상
2.조만식의 정치사상
맺음말
1.여운형의 정치사상
2.조만식의 정치사상
맺음말
본문내용
주었다. 그러나 식민지지주제와 일제의 민족분열책에 의해 중도노선을 마련하지 못한 우리 민족은 봉건잔재를 청산하는 절차와 방법, 그리고 새로이 건설될 민족국가의 상에 대한 견해 차를 좁혀 하나로 뭉치는데 어려움을 겪게 된다.
이러한 해방정국의 혼란한 상황 속에서 일제하에서 건국동맹이라는 비교적 강력하고 대중적인 독립운동 조직을 지휘하며 일제에 저항하였던 여운형은 민족이익을 무시한 계급이익의 맹목적인 추종과 외세에 의한 민족의 분열을 반대하고 좌우를 막론하고 전민족의 힘을 결집하여 민족주의 국가를 세울 것을 일관되게 주장하였다.
여운형은 줄곧 민족의 통일과 그에 의한 단일민족국가 건설을 최우선시하고 계급의 이익이나 개인의 이익은 통일전선체와 그에 이은 통일민족국가 안에서 논의되어야 하는 것으로 주장하였다. 해방 직후 결성한 건국준비위원회의 강령에서 “우리는 완전한 독립국가의 건설을 기함”을 첫 번째로 제시하였던 것처럼 여운형은 민주적 변혁을 지향하면서도 그것을 민족의 독립의 완성에 종속시키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당시의 민중은 민족국가가 하루 속히 건설되기를 바랐고, 동족끼리 피를 흘리기를 원하지 않았으며 여운형이 주도한 좌우합작운동은 지식인과 중간층은 물론 농민, 노동자층으로부터 광범한 지지를 받았다. 여운형은 이러한 민족 대다수의 뜻에 따라 좌우 어느 쪽에도 기울어지지 않고 오직 민족통일을 위해 중도노선을 견지하였으며 단결된 민족의 힘으로 한국에 대한 국제적 제약성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여 그것을 긍정적인 기여로 전환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당시 일제하에서 어느 정도의 친일경력으로 인해 사회변혁을 주장하는 좌익과는 분리되어 미군정과 밀착하여 자신들의 기득권을 도모하려고 하던 지주, 자본가 중심의 우익에 대해서도 배척의 대상으로 보기보다는 포섭과 화해의 대상으로 보고 그들도 민족의 통일과 번영을 위해 노력한다면 기꺼이 협조할 수 있는 세력으로 보았던 것이다.
Ⅱ.조만식의 정치사상
1945년 8월 15일 서울에서는 여운형안재홍등이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하였다. 평양에서는 8월 17일 이승만, 김구와 함께 조선 민족주의 운동의 3대 거목으로 불린 조만식의 영도 아래 우익세력 중심의 평안남도 건국준비위원회가 조직되었다. 사회주의 계열은 즉시 조직적인 사회주의국가 건설에 나서고 있었지만 이에 비해 민족주의 계열은 일본의 철저한 언론통제로 말미암아 정세 파악에 뒤늦었다. 그래서 서울과는 달리 평야에서만 자주적인 독립국가 수립을 위한 준비로서 8월 17일 조선건국 평남준비위원회가 설치될 수 있었다. 이 위원회는 당시 평양의 정치 성향을 반영하여 조직되었는데 위원장인 조만식을 비롯하여 태반이 민족주의 또는 기독교 계통의 인사로서 구성된 것이었다. 만약에 소련 군정이 실시되지 않았다면 이들을 중심으로 근대 시민 사회가 건설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사령부는 북한의 공산화를 목표로 하여 먼저 민족주의세력이 주도하는 조만식의 평남건국준비위원회를 해체시키고 대신 조만식을 위원장으로 내세운 공산주의자와 비공산주의자가 반반씩 참가하는 인민정치위원회를 조직케 했다.
하지만 양 진영의 이념과 정책상의 갈등과 대립이 심각해지고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에 의한 신탁통치문제가 전면으로 대두되자 민족진영과 공산진영은 반탁과 착탁으로 확연히 갈라서게 되고 마침내 고당도 위원장을 물러나게 된다.
1945년 11월 소련군사령부는 민족주의 세력을 제거할 목적으로 조만식을 당수로 한 조선민주당을 창설하게 된다.
또다시 고당이 소련군과 손잡게된 이유는 고당은 민족의 독립, 남북통일, 민주주의 확립 원칙에 따라 반탁운동, 행정제도, 정당조직, 토지개혁 같은 중대한 정책결정과 시행은 남북한이 동시에 똑같이 이루어져야함 하고 북한 단독으로 해서는 안된다는 확고한 신념을 견지했었다. 그렇기 때문에 처음부터 북한 단독의 정당조직은 고당이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그러나 38선이 고착되어 가는 시점에서 소련의 전횡을 막고 공산당을 견제할 필요성을 차츰 느끼기 시작했던 차에 그런한 요구를 받아 들이게 되었던 것이다.그러나 일찍부터 조만식과 공산측 사이에는 갈등의 소지를 안고 있던 요인들이 싹트고 있었다. 마침내 공산진영은 조선민주당을 송두리째 장악하여 합법적으로 북한민심을 수습하고 정통성을 확보할 수 있는 교두보를 마련되어 사회주의 체제가 그 토대 위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반탁의 책임으로 고당이 공산당에의 해 감금되어 자유롭지 못하게 되자 민족진영의 조선민주당 간부급 전원은 자유를 찾아 월남했다.
위 글에서 몽양 여운형과 고당 조만식의 정치사상의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 그들은 원칙에 대한 확고한 지향과 신념, 이를 성취하기 위한 현실적이고 탄력적인 정치노선의 결합을 주도하였다. 그들의 일생은 변화와 발전으로 일관되었고, 더욱이 민족해방과 조국통일독립의 한길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그 정치사상의 핵심에는 민족통일이 놓여 있었다. 남과 북을 막론하고, 좌와 우를 물론한 민족통일 노선이다. 이는 민족의 통일단결과 화합을 위해서 때로는 투쟁하고 때로는 타협하는 것이었다. 사상이념이데올로기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일정한 사상이나 이념의 틀을 통해서 민족해방과 민족통일독립을 이룩할 수 없다는 것이 실천 속에서 다져진 그들의 신념이었다.
해방직후 정치상황에서 여운형은 좌우를 넘나들면서, 남북을 오르내리면서, 미국과 소련을 함께 상대하면서 민족의 현실적 활로를 찾기 위해 온 힘을 기울였었고, 조만식은 점점 공산주의화 되어가는 자신의 고향인 북쪽을 벗어나지않고 소련과 공산진영을 상대하면서 어떻게든 하나로 뭉쳐야할 민족 통일 문제가 가장 활발히 논의되고 시도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조만식과 여운형은 김구와는 달리 한국인들에게는 이름이나마 남아있는 그런 정치인들이였다. 이번에 보고서를 작성하게 되면서 해방 후 혼란했던 상황에서도 민족을 위한 하나의 통일정부를 세우려는 그들의 정치노선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그들이 내세운 정치노선은 현대 정치에 한국인들이 가장 부합하는 이상적인 정치상이라 볼 수 있다.
참고문헌
이기형, 『몽양 여운형』, 실천문학사, 1984.
정광헌 고당 조만식 회상록 조광인쇄출판사, 1995
이러한 해방정국의 혼란한 상황 속에서 일제하에서 건국동맹이라는 비교적 강력하고 대중적인 독립운동 조직을 지휘하며 일제에 저항하였던 여운형은 민족이익을 무시한 계급이익의 맹목적인 추종과 외세에 의한 민족의 분열을 반대하고 좌우를 막론하고 전민족의 힘을 결집하여 민족주의 국가를 세울 것을 일관되게 주장하였다.
여운형은 줄곧 민족의 통일과 그에 의한 단일민족국가 건설을 최우선시하고 계급의 이익이나 개인의 이익은 통일전선체와 그에 이은 통일민족국가 안에서 논의되어야 하는 것으로 주장하였다. 해방 직후 결성한 건국준비위원회의 강령에서 “우리는 완전한 독립국가의 건설을 기함”을 첫 번째로 제시하였던 것처럼 여운형은 민주적 변혁을 지향하면서도 그것을 민족의 독립의 완성에 종속시키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당시의 민중은 민족국가가 하루 속히 건설되기를 바랐고, 동족끼리 피를 흘리기를 원하지 않았으며 여운형이 주도한 좌우합작운동은 지식인과 중간층은 물론 농민, 노동자층으로부터 광범한 지지를 받았다. 여운형은 이러한 민족 대다수의 뜻에 따라 좌우 어느 쪽에도 기울어지지 않고 오직 민족통일을 위해 중도노선을 견지하였으며 단결된 민족의 힘으로 한국에 대한 국제적 제약성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여 그것을 긍정적인 기여로 전환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당시 일제하에서 어느 정도의 친일경력으로 인해 사회변혁을 주장하는 좌익과는 분리되어 미군정과 밀착하여 자신들의 기득권을 도모하려고 하던 지주, 자본가 중심의 우익에 대해서도 배척의 대상으로 보기보다는 포섭과 화해의 대상으로 보고 그들도 민족의 통일과 번영을 위해 노력한다면 기꺼이 협조할 수 있는 세력으로 보았던 것이다.
Ⅱ.조만식의 정치사상
1945년 8월 15일 서울에서는 여운형안재홍등이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하였다. 평양에서는 8월 17일 이승만, 김구와 함께 조선 민족주의 운동의 3대 거목으로 불린 조만식의 영도 아래 우익세력 중심의 평안남도 건국준비위원회가 조직되었다. 사회주의 계열은 즉시 조직적인 사회주의국가 건설에 나서고 있었지만 이에 비해 민족주의 계열은 일본의 철저한 언론통제로 말미암아 정세 파악에 뒤늦었다. 그래서 서울과는 달리 평야에서만 자주적인 독립국가 수립을 위한 준비로서 8월 17일 조선건국 평남준비위원회가 설치될 수 있었다. 이 위원회는 당시 평양의 정치 성향을 반영하여 조직되었는데 위원장인 조만식을 비롯하여 태반이 민족주의 또는 기독교 계통의 인사로서 구성된 것이었다. 만약에 소련 군정이 실시되지 않았다면 이들을 중심으로 근대 시민 사회가 건설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사령부는 북한의 공산화를 목표로 하여 먼저 민족주의세력이 주도하는 조만식의 평남건국준비위원회를 해체시키고 대신 조만식을 위원장으로 내세운 공산주의자와 비공산주의자가 반반씩 참가하는 인민정치위원회를 조직케 했다.
하지만 양 진영의 이념과 정책상의 갈등과 대립이 심각해지고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에 의한 신탁통치문제가 전면으로 대두되자 민족진영과 공산진영은 반탁과 착탁으로 확연히 갈라서게 되고 마침내 고당도 위원장을 물러나게 된다.
1945년 11월 소련군사령부는 민족주의 세력을 제거할 목적으로 조만식을 당수로 한 조선민주당을 창설하게 된다.
또다시 고당이 소련군과 손잡게된 이유는 고당은 민족의 독립, 남북통일, 민주주의 확립 원칙에 따라 반탁운동, 행정제도, 정당조직, 토지개혁 같은 중대한 정책결정과 시행은 남북한이 동시에 똑같이 이루어져야함 하고 북한 단독으로 해서는 안된다는 확고한 신념을 견지했었다. 그렇기 때문에 처음부터 북한 단독의 정당조직은 고당이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그러나 38선이 고착되어 가는 시점에서 소련의 전횡을 막고 공산당을 견제할 필요성을 차츰 느끼기 시작했던 차에 그런한 요구를 받아 들이게 되었던 것이다.그러나 일찍부터 조만식과 공산측 사이에는 갈등의 소지를 안고 있던 요인들이 싹트고 있었다. 마침내 공산진영은 조선민주당을 송두리째 장악하여 합법적으로 북한민심을 수습하고 정통성을 확보할 수 있는 교두보를 마련되어 사회주의 체제가 그 토대 위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반탁의 책임으로 고당이 공산당에의 해 감금되어 자유롭지 못하게 되자 민족진영의 조선민주당 간부급 전원은 자유를 찾아 월남했다.
위 글에서 몽양 여운형과 고당 조만식의 정치사상의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 그들은 원칙에 대한 확고한 지향과 신념, 이를 성취하기 위한 현실적이고 탄력적인 정치노선의 결합을 주도하였다. 그들의 일생은 변화와 발전으로 일관되었고, 더욱이 민족해방과 조국통일독립의 한길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그 정치사상의 핵심에는 민족통일이 놓여 있었다. 남과 북을 막론하고, 좌와 우를 물론한 민족통일 노선이다. 이는 민족의 통일단결과 화합을 위해서 때로는 투쟁하고 때로는 타협하는 것이었다. 사상이념이데올로기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일정한 사상이나 이념의 틀을 통해서 민족해방과 민족통일독립을 이룩할 수 없다는 것이 실천 속에서 다져진 그들의 신념이었다.
해방직후 정치상황에서 여운형은 좌우를 넘나들면서, 남북을 오르내리면서, 미국과 소련을 함께 상대하면서 민족의 현실적 활로를 찾기 위해 온 힘을 기울였었고, 조만식은 점점 공산주의화 되어가는 자신의 고향인 북쪽을 벗어나지않고 소련과 공산진영을 상대하면서 어떻게든 하나로 뭉쳐야할 민족 통일 문제가 가장 활발히 논의되고 시도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조만식과 여운형은 김구와는 달리 한국인들에게는 이름이나마 남아있는 그런 정치인들이였다. 이번에 보고서를 작성하게 되면서 해방 후 혼란했던 상황에서도 민족을 위한 하나의 통일정부를 세우려는 그들의 정치노선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그들이 내세운 정치노선은 현대 정치에 한국인들이 가장 부합하는 이상적인 정치상이라 볼 수 있다.
참고문헌
이기형, 『몽양 여운형』, 실천문학사, 1984.
정광헌 고당 조만식 회상록 조광인쇄출판사,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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