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월 최시형 선생의 동학사상에 대한 새로운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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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해월 최시형 선생의 동학사상에 대한 새로운 이해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동학 창시자 수운 최제우(水雲 崔濟愚, 1824-1864) 선생과 비교되는 동학 2대 교주 해월 최시형(海月崔時亨, 1827-1898) 선생의 사상적 특징, 또는 동학 포교 및 발전과정에 있어서의 역할, 동학혁명 전체 과정에서의 역할은 무엇인가?

2. 동학이 당시의 낡은 제도의 모순을 극복하고 새로운 근대성을 밝히는 역할을 했다면 이 측면에 있어서 해월 최시형 선생의 역할은 무엇일까? (한국 근대사에 있어서 해월 선생의 사상적 역할?)

3. 동학의 교조신원운동 과정(1892년 7월-1893년 4월)에서 종래의 종교운동이 정치운동으로 전환되었다고 평가되고 있는 1893년 충청도 報恩集會에서 해월 최시형 선생이 해산명령을 내린 이유는?

4. 그렇다면 보은집회의 역사적 의미는?

5. 기존의 ‘남북접 대립설’에서 통용되고 있는 南接과 北接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6. 그렇다면 남접과 북접의 용어 의미 정리가 어떻게 되는 것이 바람직할까요?

7. 1894년 갑오년 3월의 진산과 금산에서의 기포에 있어서 조재벽이 기포했다는 기록이 매천 황현의 오하기문에 있습니다. 이것이 남접과 북접이 혁명 초기과정부터 연합했을 가능성을 내포한다는 일설이 있습니다. 박맹수 선생님의 견해는 어떠신 지... (금산의 향토사학자이신 길일기 선생의 말씀이십니다.)

8. 시천교 역사/ 오지영의 동학사/ 황현의 오하기문 등의 대립설의 근거가 되는 문헌이 갖는 한계와 일본 기록이 새로운 근거가 되는 까닭(주로 저술 시기와 관계되는).

9. 특히 시천교 역사와 관련해서. 문제점을 지적한다면?

10. 종래 학계에서는(특히 역사학계에서는) 해월 최시형 선생이 모든 일를 결정함에 있어 언제나 신중한 태도를 보임으로써 혁명과정 중에 있어서 온건주의자, 또는 종교주의적인 지도자의 모습만이 필요 이상으로 부각된 점이 있고, 이것이 이른바 남북접 대립설의 근거가 됨으로써 동학농민혁명 과정에서 해월 선생의 역할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도록 만들었고 보여진다. 그렇다면 해월 선생의 지도자로서의 진정한 모습은 무엇이며, 혁명지도자로서의 모습을 없었는가?

11. 일본기록(동경조일신문)과 동비토록 등의 기록에 의해 해월 선생의 ‘靑山 기포령’의 시기(종래 학설--1894년 9월설, 박맹수 교수가 찾아낸 새로운 사료---1894년 4월설) 가 빨라지게 된다면 이것이 갖는 역사적 의미는 무엇일까요?

12. 일본 외무성 외교사료관에 소장되어 있는 사료 <조선국 동학당 동정에 관한 제국공사관 보고일건>에 대한 질문.- <조선국 동학당 동정에 관한 제국 공사관 보고 1건>에 실린 내용 중 최시형이 ‘명령을 어긴 岐路將은 참수하고 나머지 각각의 부대에게 작전 명령을 내리는 사료가 가지는 의미는?

13. 그렇다면 진정한 동학농민혁명의 모습은?

14. 해월 선생의 전라북도 순회포교와 扶安의 동향

본문내용

보고일건> 에 대한 질문.- <조선국 동학당 동정에 관한 제국 공사관 보고 1건>에 실린 내용 중 최시형이 ‘명령 을 어긴 岐路將은 참수하고 나머지 각각의 부대에게 작전 명령을 내리는 사료가 가지는 의미는?
- 청산에서 무장으로 보낸 글의 내용이 실린 보고문이 가지는 의미는?
<朝鮮國 東學黨 動靜에 關한 帝國 公使館 報告 一件> 발굴의 의미
첫째 우리들이 지금까지 알아왔던 최시형 선생의 인간상이 잘못되었음을 증명해 주는 예이다. 최시형 선생은 그저 맹목적인 종교적 수도주의자이거나 단순한 비폭력주의자가 아니라, 부득이 하여 ‘무력’이나 ‘물리적 강제력’이 필요한 자리에서는 그것을 사용할 수 있는 결단력을 가진 인물이었다.
--->최시형 선생이나 동학사상이거나,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이해를 새롭게 할 필요성이 있다.
둘째 전근대 시기 민중운동은 거의 대부분 실패하였다. 그 실패는 실패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진 실을 크게 왜곡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어 왔음을 증명해준다. 그러므로 전근대 민중의 역사, 특히 동학농 민혁명의 역사를 제대로 밝히기 위해서는 ‘실패로 인한 왜곡’을 뛰어넘을 수 있는 역사적 상상력을 발휘 할 필요가 있으며, 최대한 사료 수집에 공을 들일 필요가 있다.
<충청도 靑山에서 전라도 茂長으로 글을 보낸 것의 의미>
전라도 동학과 충청도 동학, 즉 남접과 북접, 전봉준 장군과 최시형 선생이 제 1차 봉기부터 어떤 연락 체계 를 갖추고 긴밀하게 연락을 주고받고 있었다는 증거의 하나이다. 이것을 바꿔 말하면, 두 분의 관계가 대립 과 갈등의 관계가 아니라, ‘연대와 협력의 관계’에 있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13. 그렇다면 진정한 동학농민혁명의 모습은?
- 기존의 축소된 의미와 규모의 동학혁명의 한계를 넘어선 후의...
- 전민중적인, 전국적인...
- 1-2년짜리 준비가 아닌 오랜 세월 동안 준비되고 무르익어 온 (오랜 수련을 통한 의식혁명 을 동반하고 조직의 단련을 겸비한)혁명으로써.
1894년 동학농민혁명은
첫째 전라도를 중심으로 한 한 지역적 사건이 아니라 조선팔도에서 모두 일어난 전국적 사건이었다.
둘째 전봉준을 중심으로 한 일부 지도자의 지도에 의해 일어난 것이 아니라, 최시형 선생이 38년 간 실천적 으로 발전시킨 동학사상과, 지하포교를 통해 해월 선생이 전국적으로 형성해 놓은 동학조직과, 그리고 각 지방에 양성해 놓은 동학지도자 등 동학의 모든 것들과 당시 민중들이 손을 잡고(사료 속에는 ‘相 和’라는 표현이 나온다) 일으킨 우리 5천년 역사에서 그리고 세계사적으로도 前代未聞의 대사건, 대혁 명이었다.
셋째 동학사상, 동학농민혁명은 한 마디로 어떤 특정 종교에 머무는 사상이나 운동이 아니었다. 당 시대 전 민중의 소망을 담아낸 사상이었으며, 당시 모든 민중들의 열망을 실현하고자 했던 민중혁명, 즉 ‘아래 로부터의 혁명, 아래로부터의 개벽’이었다.
14. 해월 선생의 전라북도 순회포교와 扶安의 동향
1) 1884년 6월
해월 선생께서 益山 미륵산 산록의 사자암에 4개월간 은거하며 포덕활동
2) 1887년 후반
해월 선생께서 익산 남이면(후일 오산면) 남참의리 南啓天에 집에 은거 하며 포덕활동
3) 1888년 1월
해월 선생 전라도 全州 경유, 參 李夢老 집에서 포덕활동
4) 1889년
南原 任 중심으로 동학교도 증가
(남원 金洪基가 중심이 되어 포덕활동)
5) 1890년
해월 선생 익산군 高貞 등의 집에 머물며 포덕활동
6) 1890년 6월
扶安의 金洛哲, 金洛鳳, 金洛貞, 金洛庸 등 동학에 입도한 후 7월부터 포덕 활동, 1891년 3월에 이르러 휘하 聯臂가 수천 명에 이름
7) 1891년 3월
부안의 김낙철, 金永祚, 金洛鳳 등이 公州 신평 尹相五의 집으로 해월 선 생을 찾아 뵘
8) 1891년 5월
해월 선생 전라도 일대 순회 포덕에 나서, 부안 新里 尹相五의 小室 집, 부안 瓮井의 金永祚(=金錫允) 집과 金洛哲의 집을 차례로 경유하면 포덕 활동. 해월 선생께서는 부안에서 六任을 임명하고, “花開於扶安, 結於扶 安”이라 말씀하심.(김낙철역사)
9) 1893년 2월
부안의 김낙철 전라도 都都執의 직책을 가지고, 김낙봉, 김영조와 함께 부 안 동학교도 수백 명을 이끌고 광화문 복합상소에 참가
10) 1894년 4월
부안의 김낙철, 교도 수백 명을 이끌고 전봉준의 봉기에 호응하여 起包한 뒤, 西道面 松亭里 辛氏閣에 都所를 설치함.
김낙철의 동생 김낙봉은 申少能과 함께 茁浦에 都所를 설치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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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0.06.25
  • 저작시기2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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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6218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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