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향토사의 개념
1. 향토사 자료의 종류와 성격
2. 향토사 교재의 지도방안과 문제점
Ⅱ. 박물관의 개념
1. 박물관 자료의 정의
2. 박물관 자료의 종류와 성격
Ⅲ. 성격에 따른 향토사 자료 제시
Ⅳ. 참고문헌
1. 향토사 자료의 종류와 성격
2. 향토사 교재의 지도방안과 문제점
Ⅱ. 박물관의 개념
1. 박물관 자료의 정의
2. 박물관 자료의 종류와 성격
Ⅲ. 성격에 따른 향토사 자료 제시
Ⅳ. 참고문헌
본문내용
그들은 지난해의 원수를 갚기 위해 대부대를 동원할 것이니, 성을 지키기가 예전과 달리 쉽지 않을 것이네. 포루(砲樓)를 세워 대비해야만 문제가 없을 것이네.'
그런 다음 편지 안에 그에 대해 자세히 적어 보냈다.
1593년 6월, 적이 진주성을 재차 공격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종사관 신경진에게 말했다.
"진주성이 위급한데, 포루가 설치되어 있으면 지킬 수 있을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힘들 것이다."
그런데 얼마 후 합천에 내려갔다가 진주성이 이미 함락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단성 현감 조종도 역시 김사순의 친구였는데 그가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지난 해에 사순과 진주성에 머물 때의 일이었습니다. 그가 공의 편지를 보고는 정말 뛰어난 계략이라며 친구 몇 사람과 성을 돌아보고는 8곳에 포루를 설치하기로 했습니다. 그러곤 나무를 베어 강물에 띄어 보내도록 했습니다. 그랬더니 고을 백성들이 모두 나서 '예전에는 포루 없이도 잘 지켜 적을 물리쳤는데 왜 이런 일로 백성들을 괴롭힙니까?'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사순은 물러서지 않고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얼마 후 그가 병이 들어 눕게 되자, 작업도 중단되었지요.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김사순의 아픔이 곧 진주성 온 백성의 아픔이 되었던 것이다. 이것 역시 운이라, 사람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었다. 전게서, pp.229-230
『징비록 녹후잡기』의 기록
⇒ 2차 전투 패배에 대한 유성룡의 아쉬움. 자신의 건의대로 포루만 건설했다면 왜군을 막을 수 있었을텐데 그러지 못했기에 패배했다고 기록함.
◎ 근대 이후 국가 기관에서 발행한 자료 - 진주유등축제 홈페이지, 컬쳐코리아
① 진주남강에 띄우는 유등놀이는 우리 겨레의 최대 수난기였던 임진왜란으로 거슬러 올라가 영욕으로 얼룩진 민족사에 뿌리를 두고 있다. 1592년 10월 충무공 김시민(金時敏)장군이 3,800여명에 지나지 않은 적은 병력으로 진주성을 침공한 3만 왜군을 크게 무찔러 민족의 자존을 드높인 “진주대첩”을 거둘 때 성밖의 의병(義兵)등 지원군과의 군사신호로 풍등을 하늘에 올리며 횃불과 함께 남강에 등불을 띄운데서 비롯되었다.
이처럼 군사신호로 쓰이기 시작한 유등은 남강을 건너려는 왜군을 저지하는 군사전술로 쓰였으며, 진주성내에 있는 병사들과 사민(士民)들이 멀리 두고 온 가족에게 안부를 전하는 통신수단으로도 이용되었다. 전쟁이라는 절박한 상황속에서 통신수단이 변변치 않았던 절체 절명의 순간에, 등불에 안부를 적어 전하고자 하였던 선조들의 안타까운 심경을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김시민 장군의 군사신호로 남강을 건너려는 왜군의 도하작전을 저지하는 전술로 가족에게 안부를 전하는 통신 수단으로 두루 쓰였던 진주남강 유등은 1593년 6월 12만 왜군에 의해 진주성이 적의 손에 떨어지는 통한의 “계사순의(癸巳殉義)”가 있고 난 뒤부터는 오직 한 마음 지극한 정성으로 나라와 겨레를 보전하고 태산보다 큰 목숨을 바쳐 의롭게 순절한 7만 병사와 사민의 매운 얼과 넋을 기리는 행사로 세세연년 연면히 이어져 오늘의 진주남강 유등축제로 자리잡았다. 컬쳐 코리아 http://www.culturekorea.org/tradition/festival_view.asp?cmdType=346
⇒ 유등 축제에 대한 기원. (진주유등축제 홈페이지, 컬쳐코리아 홈페이지)
◎ 구술, 신화, 전설 민담
① 논개
성은 주씨(朱氏)이고, 본관은 신안(新安:중국)이다. 전북 장수(長水) 임내면 주촌마을에서 태어났다고 전해지는데 출생일에 관해서는 알려지지 않았다. 논개에 대한 기록은 조선 광해군 때인 1621년 유몽인(柳夢寅)이 저술한《어우야담(於于野談)》에 전하는데 "진주의 관기이며 왜장을 안고 순국했다"는 간단한 기록만 남아 전한다. 그때문에 논개는 기생이었다고 알려지게 되었다.
구전에 의하면 원래 양반가의 딸이었으나 아버지 주달문이 사망하고 집안에 어려움이 겹쳐 가산을 탕진하자 장수현감이었던 최경회(崔慶會)의 후처가 되었다고 전한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5월 4일에 이미 서울을 빼앗기고 전라도 지역에서 고경명이 의병을 일으켜 왜적과 싸우다 전사하자 최경회가 의병장으로 나서 싸우게 되었다. 경상도에서 진주성만이 남아 왜적과 싸우고 있었는데 최경회는 의병을 이끌고 진주성을 지원하여 승리를 거두었다(제1차 진주성 싸움). 1593년 최경회는 경상우병사로 임명되어 싸웠으나 수많은 군관민이 전사 또는 자결하고 28일만에 진주성이 함락되고 말았다. 이때 최경회는 남강에 투신하여 자결하였다(제2차 진주성 싸움).
1593년 7월 일본군 왜장들은 승리를 자축하기 위해 촉석루(矗石樓)에서 주연을 벌이는데 논개는 최경회의 원수를 갚기위해 기생으로 위장하여 참석하게 된다. 이 자리에 있던 그녀는 계획대로 열손가락 마디마디에 가락지를 끼고 술에 취한 왜장 게야무라 로쿠스케[毛谷村六助]를 꾀어 벽류(碧流) 속에 있는 바위에 올라 껴안고 남강(南江)에 떨어져 적장과 함께 죽었다.
훗날 이 바위를 의암(義岩)이라 불렀으며, 사당(祠堂)을 세워 나라에서 제사를 지냈다. 1846년(헌종 12) 당시의 현감 정주석(鄭胄錫)이 장수군 장수면(長水面) 장수리에 논개가 자라난 고장임을 기념하기 위하여 논개생향비(論介生鄕碑)를 건립하였다. 그가 비문을 짓고 그의 아들이 글씨를 썼다. 1956년 '논개사당(論介祠堂)'을 건립할 때 땅 속에 파묻혀 있던 것을 현 위치에 옮겨놓았다. 비문에는 "矗石義妓論介生長鄕竪名碑"라고 씌어 있다. 장수군에서는 매년 9월 9일에 논개를 추모하기 위해 논개제전(論介祭典)을 열고 있다.
◎ 현장 자료
Ⅳ. 참고 문헌
조선왕조실록 - 선조수정 26권, 선조 27권, 31권
유성룡 著, 김흥식 譯『지옥의 전쟁 그리고 반성의 기록 징비록』
이난영, 2001 『박물관학입문』, 삼화출판사.
최상훈 외, 2007 『역사교육의 내용과 방법』, 책과함께.
박화자, 주제접근법을 통한 향토사 교재의 지도 방안
컬쳐 코리아 http://www.culturekorea.org/tradition/festival_view.asp?cmdType=346
네이버 백과사전 - 논개
Encyclopaedia Britannica
그런 다음 편지 안에 그에 대해 자세히 적어 보냈다.
1593년 6월, 적이 진주성을 재차 공격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종사관 신경진에게 말했다.
"진주성이 위급한데, 포루가 설치되어 있으면 지킬 수 있을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힘들 것이다."
그런데 얼마 후 합천에 내려갔다가 진주성이 이미 함락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단성 현감 조종도 역시 김사순의 친구였는데 그가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지난 해에 사순과 진주성에 머물 때의 일이었습니다. 그가 공의 편지를 보고는 정말 뛰어난 계략이라며 친구 몇 사람과 성을 돌아보고는 8곳에 포루를 설치하기로 했습니다. 그러곤 나무를 베어 강물에 띄어 보내도록 했습니다. 그랬더니 고을 백성들이 모두 나서 '예전에는 포루 없이도 잘 지켜 적을 물리쳤는데 왜 이런 일로 백성들을 괴롭힙니까?'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사순은 물러서지 않고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얼마 후 그가 병이 들어 눕게 되자, 작업도 중단되었지요.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김사순의 아픔이 곧 진주성 온 백성의 아픔이 되었던 것이다. 이것 역시 운이라, 사람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었다. 전게서, pp.229-230
『징비록 녹후잡기』의 기록
⇒ 2차 전투 패배에 대한 유성룡의 아쉬움. 자신의 건의대로 포루만 건설했다면 왜군을 막을 수 있었을텐데 그러지 못했기에 패배했다고 기록함.
◎ 근대 이후 국가 기관에서 발행한 자료 - 진주유등축제 홈페이지, 컬쳐코리아
① 진주남강에 띄우는 유등놀이는 우리 겨레의 최대 수난기였던 임진왜란으로 거슬러 올라가 영욕으로 얼룩진 민족사에 뿌리를 두고 있다. 1592년 10월 충무공 김시민(金時敏)장군이 3,800여명에 지나지 않은 적은 병력으로 진주성을 침공한 3만 왜군을 크게 무찔러 민족의 자존을 드높인 “진주대첩”을 거둘 때 성밖의 의병(義兵)등 지원군과의 군사신호로 풍등을 하늘에 올리며 횃불과 함께 남강에 등불을 띄운데서 비롯되었다.
이처럼 군사신호로 쓰이기 시작한 유등은 남강을 건너려는 왜군을 저지하는 군사전술로 쓰였으며, 진주성내에 있는 병사들과 사민(士民)들이 멀리 두고 온 가족에게 안부를 전하는 통신수단으로도 이용되었다. 전쟁이라는 절박한 상황속에서 통신수단이 변변치 않았던 절체 절명의 순간에, 등불에 안부를 적어 전하고자 하였던 선조들의 안타까운 심경을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김시민 장군의 군사신호로 남강을 건너려는 왜군의 도하작전을 저지하는 전술로 가족에게 안부를 전하는 통신 수단으로 두루 쓰였던 진주남강 유등은 1593년 6월 12만 왜군에 의해 진주성이 적의 손에 떨어지는 통한의 “계사순의(癸巳殉義)”가 있고 난 뒤부터는 오직 한 마음 지극한 정성으로 나라와 겨레를 보전하고 태산보다 큰 목숨을 바쳐 의롭게 순절한 7만 병사와 사민의 매운 얼과 넋을 기리는 행사로 세세연년 연면히 이어져 오늘의 진주남강 유등축제로 자리잡았다. 컬쳐 코리아 http://www.culturekorea.org/tradition/festival_view.asp?cmdType=346
⇒ 유등 축제에 대한 기원. (진주유등축제 홈페이지, 컬쳐코리아 홈페이지)
◎ 구술, 신화, 전설 민담
① 논개
성은 주씨(朱氏)이고, 본관은 신안(新安:중국)이다. 전북 장수(長水) 임내면 주촌마을에서 태어났다고 전해지는데 출생일에 관해서는 알려지지 않았다. 논개에 대한 기록은 조선 광해군 때인 1621년 유몽인(柳夢寅)이 저술한《어우야담(於于野談)》에 전하는데 "진주의 관기이며 왜장을 안고 순국했다"는 간단한 기록만 남아 전한다. 그때문에 논개는 기생이었다고 알려지게 되었다.
구전에 의하면 원래 양반가의 딸이었으나 아버지 주달문이 사망하고 집안에 어려움이 겹쳐 가산을 탕진하자 장수현감이었던 최경회(崔慶會)의 후처가 되었다고 전한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5월 4일에 이미 서울을 빼앗기고 전라도 지역에서 고경명이 의병을 일으켜 왜적과 싸우다 전사하자 최경회가 의병장으로 나서 싸우게 되었다. 경상도에서 진주성만이 남아 왜적과 싸우고 있었는데 최경회는 의병을 이끌고 진주성을 지원하여 승리를 거두었다(제1차 진주성 싸움). 1593년 최경회는 경상우병사로 임명되어 싸웠으나 수많은 군관민이 전사 또는 자결하고 28일만에 진주성이 함락되고 말았다. 이때 최경회는 남강에 투신하여 자결하였다(제2차 진주성 싸움).
1593년 7월 일본군 왜장들은 승리를 자축하기 위해 촉석루(矗石樓)에서 주연을 벌이는데 논개는 최경회의 원수를 갚기위해 기생으로 위장하여 참석하게 된다. 이 자리에 있던 그녀는 계획대로 열손가락 마디마디에 가락지를 끼고 술에 취한 왜장 게야무라 로쿠스케[毛谷村六助]를 꾀어 벽류(碧流) 속에 있는 바위에 올라 껴안고 남강(南江)에 떨어져 적장과 함께 죽었다.
훗날 이 바위를 의암(義岩)이라 불렀으며, 사당(祠堂)을 세워 나라에서 제사를 지냈다. 1846년(헌종 12) 당시의 현감 정주석(鄭胄錫)이 장수군 장수면(長水面) 장수리에 논개가 자라난 고장임을 기념하기 위하여 논개생향비(論介生鄕碑)를 건립하였다. 그가 비문을 짓고 그의 아들이 글씨를 썼다. 1956년 '논개사당(論介祠堂)'을 건립할 때 땅 속에 파묻혀 있던 것을 현 위치에 옮겨놓았다. 비문에는 "矗石義妓論介生長鄕竪名碑"라고 씌어 있다. 장수군에서는 매년 9월 9일에 논개를 추모하기 위해 논개제전(論介祭典)을 열고 있다.
◎ 현장 자료
Ⅳ. 참고 문헌
조선왕조실록 - 선조수정 26권, 선조 27권, 31권
유성룡 著, 김흥식 譯『지옥의 전쟁 그리고 반성의 기록 징비록』
이난영, 2001 『박물관학입문』, 삼화출판사.
최상훈 외, 2007 『역사교육의 내용과 방법』, 책과함께.
박화자, 주제접근법을 통한 향토사 교재의 지도 방안
컬쳐 코리아 http://www.culturekorea.org/tradition/festival_view.asp?cmdType=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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