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머리말... 2p
Ⅱ. 당대의 절도사와 번진... 3p-8p
1. 절도사와 번진의 의미 ... 3p
2. 부병제의 바탕을 둔 군사체제 및 대외정책 ...3p-5p
3. 번진의 성립 및 군사구조 ... 5p-8p
Ⅲ. 안사의 난의 배경 ... 8p-11p
1. 현종대의 성세 ... 8p-10p
2. 안록산과 양귀비, 그리고 현종 ... 10p-11p
Ⅳ. 안․사의 난의 전개 ....................................................... 11p-15p
1. 난의 원인 ... 11p
2. 난의 발발 ... 11p-12p
3. 난의 종식 ... 12p-13p
4. 난의 결과 및 영향 ... 13p-15p
5. 난이 혁명이 되지 못한 이유 ... 15p
Ⅴ. 안사의 난 이후의 당의 상황 ... 15p-18p
1. 번진의 내지화 및 하북삼진 ... 15p-16p
2. 환관의 정치개입 ... 16p-18p
Ⅵ. 맺음말 ... 19p
Ⅶ. 인증서목 ... 20p
Ⅱ. 당대의 절도사와 번진... 3p-8p
1. 절도사와 번진의 의미 ... 3p
2. 부병제의 바탕을 둔 군사체제 및 대외정책 ...3p-5p
3. 번진의 성립 및 군사구조 ... 5p-8p
Ⅲ. 안사의 난의 배경 ... 8p-11p
1. 현종대의 성세 ... 8p-10p
2. 안록산과 양귀비, 그리고 현종 ... 10p-11p
Ⅳ. 안․사의 난의 전개 ....................................................... 11p-15p
1. 난의 원인 ... 11p
2. 난의 발발 ... 11p-12p
3. 난의 종식 ... 12p-13p
4. 난의 결과 및 영향 ... 13p-15p
5. 난이 혁명이 되지 못한 이유 ... 15p
Ⅴ. 안사의 난 이후의 당의 상황 ... 15p-18p
1. 번진의 내지화 및 하북삼진 ... 15p-16p
2. 환관의 정치개입 ... 16p-18p
Ⅵ. 맺음말 ... 19p
Ⅶ. 인증서목 ... 20p
본문내용
인 헌종(憲宗)과 형 경종(敬宗)은 모구 환관들의 손에 죽임을 당했고, 그의 부친 목종(穆宗)과 그 자신은 모두 환관에 의해 옹립되어 황제가 될 수 있었다. 따라서 문종은 환관의 전권의 위해(危害)에 대하여 비교적 확실하게 알고 있었으며, 내심으로는 환관의 세력을 없애리라고 마음먹었다. 그 때 조정 대신들은 두 파로 나뉘어져 서로 싸움만 하고 있던 터라, 당 문종은 부득불 지위가 낮은 관원들 중에서 그의 지지자를 찾아야만 하였다. 이리하여 정주(鄭注)이훈(李訓)이 문종의 신임을 얻게 되었다. 정주와 이훈은 본래 대환관이었던 왕수징(王守澄)이 그의 개인 세력을 키우기 위해 문종에게 추천한 인물들이었다. 그러나 이들 두 사람은 왕수징의 의도대로 일을 처리하지 않고, 오히려 문종에게 먼저 환관을 제거하고 나중에 다른 대사를 도모하라는 계책을 내놓았다.
이훈과 정주는 또 조정 대신들 중에서 서원여(舒元輿), 한약(韓約) 등 환곤 제거에 참가할 수 있는 몇 사람과 비밀 모의를 하였다, 얼마 되지 않아 그들은 환관 내부의 갈등을 이용하여 당 문종과 연합하여 왕수징 등 몇 명의 환관을 죽여 버렸다. 835년 이훈은 재상이 되었고, 정주는 봉상절도 사(鳳翔節度使)가 되었다. 그들은 왕수징의 장례식 날을 기다렸다가 내외협공의 방법으로 모든 환 관들을 처단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훈은 줄곧 정주를 시기하여 그가 공을 독점한 후 정주를 축출 하고자 서원여, 한약 등과 비밀리에 따로 행동 계획을 세웠다.
835년 11월 21일, 그들은 거짓으로 당 문종과 백관들에게 석류나무 위의 감로 감로는 상서로운 징조로 일컬어지고 있었다.
를 보러 오라고 초 청하고는 정원에 매복하고 있다가 환관들을 죽여 버리려 하였다. 하지만 한약이 그 자리에서 안절 부절 못하는 것을 보고 환관 구사량(仇士良)이 의심을 하게 되어 매복해 두었던 복병들이 발각되고 말았다. 구사량 등은 문종이 타고 있던 어가를 납치하여 황궁으로 돌아갔다. 이것을 감로의 변(甘 露의 變)이라하고 이렇게 실패로 끝이 났다. 이훈과 서원여 등은 결국 환관들에게 죽임을 당하였 고, 후에 정주 역시 환관에게 피살되었다.
이 오히려 실패로 끝나자 환관의 전횡은 극에 달해 ‘이 때부터 천하의 대사(大事)는 모두 환관이 결정하였고 재상은 다만 집행의 역할을 수행할 뿐이었다. 송윤미,「唐 제도와 牛李黨爭을 통하여 본 <周秦行紀> 서사의 비평적 고찰」, 한국중문학회, 2006, 52쪽
Ⅵ. 맺음말
안사의 난은 당대사회가 유동화, 다양화 되어가는 결정적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확실히 당대를 전기와 후기로 구분 짓는 전환점이었다. 난 이후 율령체제 지배는 대폭적 전환을 하지 않을 수 없었고 동적인 사회정세의 진행에 당은 새롭게 대응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어찌 보면 안사의 난은 개원의 치라 하여 태평성대를 구가하던 당 왕조의 보이지 않게 곪아가던 문제들을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할 수 있겠다. 대표적인 것이 부병제였다.
당의 통치체제를 굳건히 유지케 했던 부병제가 현종 대를 거치면서 번상교대의 형평성과 공정성을 상실하고 또 원거리 번상교대로 인한 이동 중의 고역과 잦은 교체로 인한 시간과 재정낭비, 경우에 따라선 무기한 복무를 하는 등의 요인으로 붕괴되었다. 거기에 주변 민족은 부족의 간의 통합을 이루어 정치적 통일을 이룰 수 있을 만큼 성장하여 당조를 위협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당조는 군제상의 개혁은 왕조의 존폐를 좌우하는 필수적인 사안이었다. 단행된 군제 개혁은 부병제와 같은 징발이 아닌 소모에 의한 모병제를 실시하였다. 모병제의 실시로 군은 유민, 도호, 객호와 같은 계층을 흡수할 수 있었다. 이러한 군제의 변화는 변경을 방어하던 번진을 새로운 세력으로 부상시켰다. 특히 절도사가 득세하게 만들었다. 이런 상황이 안사의 난이 발발의 표면적 원인이었다. 실질적인 이유는 당 왕조가 균전령을 바탕으로 백성들에게 구분전과 영업전을 지급하지 못하자 균전제가 붕괴하였고, 균전제를 바탕으로 이루어지던 부병제도 같이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행정 시스템의 결함으로 몰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물론 안사의 난은 농민 반란이 아닌 정치적 쿠데타였으나 난 이후 백성들이 과중한 세금과 부역을 견디지 못해 급격히 도호가 되거나 유민이 되어 커다란 사회문제를 야기하였다. 이는 나라의 기본인 백성이 흔들리고 있었다는 말이다. 이런 문제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더욱더 심화되었다. 이러한 모순을 해결하기 위하여 당 왕조는 양세법을 실시하는 등 신법을 펼쳤다. 하지만 결국에는 정치와 맞물려 농민들은 더욱 착취당했으며 이런 체제의 모순으로 인해 황소의 난과 같은 봉기가 일어나 당 왕조는 멸망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안사의 난을 사회 붕괴의 시작점으로 볼 것이 아니라 연장선상으로 생각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 사회적 모순은 그 이전부터 일어나고 있었으며 안사의 난은 이를 더욱 가속화시킨 촉진제 역할을 한 것이다. 이것을 주지하면서 대당제국을 패망의 길로 이끈 사회모순을 파악하는 것은 물론 8년간의 격렬한 전쟁 뒤에도 150여 년간 나라를 이어갈 수 있었던 요인 또한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Ⅶ. 인증 서목
- 단행본 -
이근명 편역,『중국역사-上, 下』, 신서원, 2002
누노메 조후, 구리하라 마쓰오 외,『중국의 역사』, 예안, 2001
藤善眞澄 저,『아시아 역사와 문화2-중세사』, 신서원, 1999
김명희,『중국 수 당사 연구』, 국학자료원, 1998
레이 황,『중국, 그 거대한 행보』, 경당, 2003
富士正晴 외 저,『인물로 보는 중국역사-3』, 신원문화사, 1994
김영진 역,『중국 오천년사』, 대광서림, 2001
신채식,『동양사개론』, 삼영사, 2003
강길중, 박종현, 전재훈 공저,『중국역사의 이해』, 경상대학교 출판부, 2003
- 논문 -
강경중,「唐代 藩鎭의 軍組織考」, 호서사학, 2005
김문경, 「唐代 藩鎭의 한 硏究」,『동양사론문선집 1』, 동양사학회, 일조각, 1975
김선욱,「唐代 藩鎭에 關한 考察 - 鎭을 中心으로」, 충남대학교, 1972
송윤미,「唐 제도와 牛李黨爭을 통하여 본 <周秦行紀> 서사의 비평적 고찰」, 한국중문학회, 2006
이훈과 정주는 또 조정 대신들 중에서 서원여(舒元輿), 한약(韓約) 등 환곤 제거에 참가할 수 있는 몇 사람과 비밀 모의를 하였다, 얼마 되지 않아 그들은 환관 내부의 갈등을 이용하여 당 문종과 연합하여 왕수징 등 몇 명의 환관을 죽여 버렸다. 835년 이훈은 재상이 되었고, 정주는 봉상절도 사(鳳翔節度使)가 되었다. 그들은 왕수징의 장례식 날을 기다렸다가 내외협공의 방법으로 모든 환 관들을 처단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훈은 줄곧 정주를 시기하여 그가 공을 독점한 후 정주를 축출 하고자 서원여, 한약 등과 비밀리에 따로 행동 계획을 세웠다.
835년 11월 21일, 그들은 거짓으로 당 문종과 백관들에게 석류나무 위의 감로 감로는 상서로운 징조로 일컬어지고 있었다.
를 보러 오라고 초 청하고는 정원에 매복하고 있다가 환관들을 죽여 버리려 하였다. 하지만 한약이 그 자리에서 안절 부절 못하는 것을 보고 환관 구사량(仇士良)이 의심을 하게 되어 매복해 두었던 복병들이 발각되고 말았다. 구사량 등은 문종이 타고 있던 어가를 납치하여 황궁으로 돌아갔다. 이것을 감로의 변(甘 露의 變)이라하고 이렇게 실패로 끝이 났다. 이훈과 서원여 등은 결국 환관들에게 죽임을 당하였 고, 후에 정주 역시 환관에게 피살되었다.
이 오히려 실패로 끝나자 환관의 전횡은 극에 달해 ‘이 때부터 천하의 대사(大事)는 모두 환관이 결정하였고 재상은 다만 집행의 역할을 수행할 뿐이었다. 송윤미,「唐 제도와 牛李黨爭을 통하여 본 <周秦行紀> 서사의 비평적 고찰」, 한국중문학회, 2006, 52쪽
Ⅵ. 맺음말
안사의 난은 당대사회가 유동화, 다양화 되어가는 결정적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확실히 당대를 전기와 후기로 구분 짓는 전환점이었다. 난 이후 율령체제 지배는 대폭적 전환을 하지 않을 수 없었고 동적인 사회정세의 진행에 당은 새롭게 대응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어찌 보면 안사의 난은 개원의 치라 하여 태평성대를 구가하던 당 왕조의 보이지 않게 곪아가던 문제들을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할 수 있겠다. 대표적인 것이 부병제였다.
당의 통치체제를 굳건히 유지케 했던 부병제가 현종 대를 거치면서 번상교대의 형평성과 공정성을 상실하고 또 원거리 번상교대로 인한 이동 중의 고역과 잦은 교체로 인한 시간과 재정낭비, 경우에 따라선 무기한 복무를 하는 등의 요인으로 붕괴되었다. 거기에 주변 민족은 부족의 간의 통합을 이루어 정치적 통일을 이룰 수 있을 만큼 성장하여 당조를 위협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당조는 군제상의 개혁은 왕조의 존폐를 좌우하는 필수적인 사안이었다. 단행된 군제 개혁은 부병제와 같은 징발이 아닌 소모에 의한 모병제를 실시하였다. 모병제의 실시로 군은 유민, 도호, 객호와 같은 계층을 흡수할 수 있었다. 이러한 군제의 변화는 변경을 방어하던 번진을 새로운 세력으로 부상시켰다. 특히 절도사가 득세하게 만들었다. 이런 상황이 안사의 난이 발발의 표면적 원인이었다. 실질적인 이유는 당 왕조가 균전령을 바탕으로 백성들에게 구분전과 영업전을 지급하지 못하자 균전제가 붕괴하였고, 균전제를 바탕으로 이루어지던 부병제도 같이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행정 시스템의 결함으로 몰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물론 안사의 난은 농민 반란이 아닌 정치적 쿠데타였으나 난 이후 백성들이 과중한 세금과 부역을 견디지 못해 급격히 도호가 되거나 유민이 되어 커다란 사회문제를 야기하였다. 이는 나라의 기본인 백성이 흔들리고 있었다는 말이다. 이런 문제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더욱더 심화되었다. 이러한 모순을 해결하기 위하여 당 왕조는 양세법을 실시하는 등 신법을 펼쳤다. 하지만 결국에는 정치와 맞물려 농민들은 더욱 착취당했으며 이런 체제의 모순으로 인해 황소의 난과 같은 봉기가 일어나 당 왕조는 멸망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안사의 난을 사회 붕괴의 시작점으로 볼 것이 아니라 연장선상으로 생각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 사회적 모순은 그 이전부터 일어나고 있었으며 안사의 난은 이를 더욱 가속화시킨 촉진제 역할을 한 것이다. 이것을 주지하면서 대당제국을 패망의 길로 이끈 사회모순을 파악하는 것은 물론 8년간의 격렬한 전쟁 뒤에도 150여 년간 나라를 이어갈 수 있었던 요인 또한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Ⅶ. 인증 서목
- 단행본 -
이근명 편역,『중국역사-上, 下』, 신서원, 2002
누노메 조후, 구리하라 마쓰오 외,『중국의 역사』, 예안, 2001
藤善眞澄 저,『아시아 역사와 문화2-중세사』, 신서원, 1999
김명희,『중국 수 당사 연구』, 국학자료원, 1998
레이 황,『중국, 그 거대한 행보』, 경당, 2003
富士正晴 외 저,『인물로 보는 중국역사-3』, 신원문화사, 1994
김영진 역,『중국 오천년사』, 대광서림, 2001
신채식,『동양사개론』, 삼영사, 2003
강길중, 박종현, 전재훈 공저,『중국역사의 이해』, 경상대학교 출판부, 2003
- 논문 -
강경중,「唐代 藩鎭의 軍組織考」, 호서사학, 2005
김문경, 「唐代 藩鎭의 한 硏究」,『동양사론문선집 1』, 동양사학회, 일조각, 1975
김선욱,「唐代 藩鎭에 關한 考察 - 鎭을 中心으로」, 충남대학교, 1972
송윤미,「唐 제도와 牛李黨爭을 통하여 본 <周秦行紀> 서사의 비평적 고찰」, 한국중문학회,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