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서론
본론
Ⅰ. 900년경의 중국과 그 후 400년
Ⅱ. 900년경의 한국과 그 후 400년
Ⅲ. 900년경의 일본과 그 후 400년
결론
본론
Ⅰ. 900년경의 중국과 그 후 400년
Ⅱ. 900년경의 한국과 그 후 400년
Ⅲ. 900년경의 일본과 그 후 400년
결론
본문내용
평씨와의 싸움에서 승리를 거둔 미나모토 요리토모(源賴朝)는, 1192년 조정으로부터 정이대장군에 임명되고, 카마쿠라에 막부를 설치하여 무사정권을 수립했다. 카마쿠라 막부는 이후 약 140년간 지속되는데, 이 기간을 카마쿠라 시대라고 한다. 이 때부터 일본에서는 명치유신이 일어날 때까지 700여년간 무사들에 의한 군사독재정치가 지속된다.
카마쿠라막부의 성립은 종래의 귀족정권에 대해 무사가 독자적 정권을 가지게 됨을 의미하며, 이는 장군과 그 부하가 토지를 매개로 맺은 주종관계를 그 기초로 하고 있으며, 막부는 그중 유력한 자를 슈우고(守護)지토오(地頭)로 임명하여 전국적 지배를 실시했다. 하지만, 정권의 구조 자체에는 고대적 성격이 남아 있었고, 쿄오토에는 천황과 귀족들의 정부가 엄연히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에, 카마쿠라 막부는 봉건제도 형성의 한 단계로 보는 것이 온당하다. 13세기 후반, 두 차례에 걸친 여원 연합군의 일본원정(1274, 1281)은 정치, 경제, 사회의 전반에 걸쳐 엄청난 영향을 주었다. 두 번 모두 태풍의 덕택으로 여원 연합군을 물리치긴 했지만, 약소 고케닌들의 재정적 부담이 가중되어 불만이 누적, 막부의 세력을 따르지 않게 되고 막부의 세력은 현격히 약화되었다. 이 틈을 노려 고다이고 천황은, 카마 쿠라 막부를 멸망시킨다.
이 시대 정치의 2중성은 문화면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여전히 전통적 귀족문화가 주류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신흥 무사계급이 갖는 실질적이고 강건한 기풍의 영향을 받은 작품들이 생겨나고, 또 무사계급은 고전문화를 받아들여 무가의 독자적인 문화도 창출해 냈다. 그 경우, 문화의 창조에 민중이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는 점과 송나라 문화의 영향이 강했다는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시대는 전란이 계속되는 불안한 세태였기 때문에, 무사나 백성들은 종교에 귀의하는 경향이 강했고, 그리하여 새로운 불교가 계속해서 생겨났다. 그것은 헤이안 시대의 불교가 엄격한 계율이나 학물을 중요시 한 것과는 달리, 알기 쉽고 실천을 중시하는 것이었다. 또한 중국에서 들어온 선종은 무사들 사이에 널리 유행하였고, 교의나 경전을 갖지 못하고 있던 일본 고유의 신도도 이 무렵, 이세신궁의 신관이 불교 등의 교의를 참고로 해서 신도의 이론적인 기초를 정립하려고 했다.
결론
이상에서 동양의 900년 경과 그 후 400년에 이르는 시대의 중요 사건과 사회문화적 현상에 대해 살펴보았다. ‘동양’이라는 광범위한 지역에서 여기서 특정적인 몇몇 나라를 지정한 것은 우리 나라를 중심으로 동양을 살펴보고자 할 때 중국과 일본의 영향력은 두말할 나위가 없기 때문이며, 동남아시아 지역들 또한 지리적으로 가깝고 이들 지역의 국가들이 자원 보유국이기 때문에 정치, 경제적으로 긴밀한 관계를 갖고 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지역들은 인종, 언어, 풍습 등의 면에서 다양하고 역사발전 단계상의 차이도 매우 크기 때문에 각 지역의 역사적 전개와 사회문화적 발전과정을 구체적으로는 다루지 못한 점이 아쉽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이렇게 동시대의 여러 지역들의 역사적 과정을 살펴봄으로써 아시아의 다양성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이를 통해 생각해 볼 수 있었던 아시아의 다양성 중에는 서둘러 극복하지 않으면 안되는 점은 물론, 다양한 인류세계의 장래와 관련되는 점도 없지 않았기에 이러한 점들이 아시아의 역사를 개괄적으로 이해해야 하는 이유가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따라서 앞으로도 역사를 폭넓게 바라볼 줄 아는 시각을 갖추기 위한 노력은 계속 되어야 할 것이며 동양을 벗어나 세계 전체를 아울러 이해할 줄 아는 자세를 가져야 하겠다.
카마쿠라막부의 성립은 종래의 귀족정권에 대해 무사가 독자적 정권을 가지게 됨을 의미하며, 이는 장군과 그 부하가 토지를 매개로 맺은 주종관계를 그 기초로 하고 있으며, 막부는 그중 유력한 자를 슈우고(守護)지토오(地頭)로 임명하여 전국적 지배를 실시했다. 하지만, 정권의 구조 자체에는 고대적 성격이 남아 있었고, 쿄오토에는 천황과 귀족들의 정부가 엄연히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에, 카마쿠라 막부는 봉건제도 형성의 한 단계로 보는 것이 온당하다. 13세기 후반, 두 차례에 걸친 여원 연합군의 일본원정(1274, 1281)은 정치, 경제, 사회의 전반에 걸쳐 엄청난 영향을 주었다. 두 번 모두 태풍의 덕택으로 여원 연합군을 물리치긴 했지만, 약소 고케닌들의 재정적 부담이 가중되어 불만이 누적, 막부의 세력을 따르지 않게 되고 막부의 세력은 현격히 약화되었다. 이 틈을 노려 고다이고 천황은, 카마 쿠라 막부를 멸망시킨다.
이 시대 정치의 2중성은 문화면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여전히 전통적 귀족문화가 주류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신흥 무사계급이 갖는 실질적이고 강건한 기풍의 영향을 받은 작품들이 생겨나고, 또 무사계급은 고전문화를 받아들여 무가의 독자적인 문화도 창출해 냈다. 그 경우, 문화의 창조에 민중이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는 점과 송나라 문화의 영향이 강했다는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시대는 전란이 계속되는 불안한 세태였기 때문에, 무사나 백성들은 종교에 귀의하는 경향이 강했고, 그리하여 새로운 불교가 계속해서 생겨났다. 그것은 헤이안 시대의 불교가 엄격한 계율이나 학물을 중요시 한 것과는 달리, 알기 쉽고 실천을 중시하는 것이었다. 또한 중국에서 들어온 선종은 무사들 사이에 널리 유행하였고, 교의나 경전을 갖지 못하고 있던 일본 고유의 신도도 이 무렵, 이세신궁의 신관이 불교 등의 교의를 참고로 해서 신도의 이론적인 기초를 정립하려고 했다.
결론
이상에서 동양의 900년 경과 그 후 400년에 이르는 시대의 중요 사건과 사회문화적 현상에 대해 살펴보았다. ‘동양’이라는 광범위한 지역에서 여기서 특정적인 몇몇 나라를 지정한 것은 우리 나라를 중심으로 동양을 살펴보고자 할 때 중국과 일본의 영향력은 두말할 나위가 없기 때문이며, 동남아시아 지역들 또한 지리적으로 가깝고 이들 지역의 국가들이 자원 보유국이기 때문에 정치, 경제적으로 긴밀한 관계를 갖고 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지역들은 인종, 언어, 풍습 등의 면에서 다양하고 역사발전 단계상의 차이도 매우 크기 때문에 각 지역의 역사적 전개와 사회문화적 발전과정을 구체적으로는 다루지 못한 점이 아쉽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이렇게 동시대의 여러 지역들의 역사적 과정을 살펴봄으로써 아시아의 다양성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이를 통해 생각해 볼 수 있었던 아시아의 다양성 중에는 서둘러 극복하지 않으면 안되는 점은 물론, 다양한 인류세계의 장래와 관련되는 점도 없지 않았기에 이러한 점들이 아시아의 역사를 개괄적으로 이해해야 하는 이유가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따라서 앞으로도 역사를 폭넓게 바라볼 줄 아는 시각을 갖추기 위한 노력은 계속 되어야 할 것이며 동양을 벗어나 세계 전체를 아울러 이해할 줄 아는 자세를 가져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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