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문학(한국문학)의 기능
Ⅱ. 문학(한국문학)의 근대성
Ⅲ. 문학(한국문학)과 구술문학
Ⅳ. 문학(한국문학)과 고백체문학
Ⅴ. 문학(한국문학)과 문학운동
Ⅵ. 문학(한국문학)과 문학적 픽션
Ⅶ. 문학(한국문학)과 김남천문학
참고문헌
Ⅱ. 문학(한국문학)의 근대성
Ⅲ. 문학(한국문학)과 구술문학
Ⅳ. 문학(한국문학)과 고백체문학
Ⅴ. 문학(한국문학)과 문학운동
Ⅵ. 문학(한국문학)과 문학적 픽션
Ⅶ. 문학(한국문학)과 김남천문학
참고문헌
본문내용
그러나 바로 그 후반기의 김남천을 이해하기 위해 그 전제가 되는 1930년대 전반을 검토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1930년대 후반의 김남천의 사유 틀의 특징이 이 시기에 형성된다고 보이기 때문이다.
1930년대 전반의 김남천을 사로잡고 있었던 것은 ‘전위’라는 말이었다. 자신을 전위로 구성하는 사고, 혹은 전위임을 전제로 하는 사고가 어떤 경로를 거쳐 형성되었는가는 물론 명확하지 않다. 김남천이 공산주의자협의회 사건으로 기소되었을 때의 공판 기록, 그리고 회고 두 편, 그리고 자전적으로 보이는 소설, 어린 두 딸에게와 등불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경로를 확인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1930년 전후한 시기에 김남천이 자신을 ‘전위’로서 규정하고 있었음은 그리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이 전위로서의 자기규정이 1930년대 전반 그의 문학 활동 전체를 규정하고 있다는 것이 이 장의 가설이다.
김남천이 자신을 전위로서, 그리고 실천가로서 규정한 이상 모든 문학 행위는 실천이 된다. 그리고 그것은 ‘실천’인 한에서, 그것도 목적의식적인 실천인 한에서 다른 실천과 우열을 구분할 수 없다. 하지만, 이 시기 내에서도 미묘한 변화를 찾아볼 수 있다. 변화의 계기는 감옥 체험으로 보인다. 이 감옥 체험은 비평에서보다 소설에서 더욱 큰 영향을 주는데, 아마도 소설과 비평이 갖는 차이 때문일 것이다. 비평이 이론적인 작업으로, 모든 논리적 언설이 그러하듯이, ‘추상’과 개념에 바탕 하지 않을 수 없다면, 이러한 추상은 언제나 구체적 실재성으로부터 한 걸음 물러서 있기 때문이다. 구체적 실재성에서 추상화를 통한 현실의 개념적 전유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구체적 실재성과 함께 하고 있는 현실 감각은 약화될 수밖에 없다. 더욱이 1930년대 전반까지의 대부분의 비평이 현실의 인식에 뿌리박은 것이었다기보다는 당위의 요청에 부응하는 것이라고 했을 때 더욱 그러하다.
반면 소설의 경우 소설의 육체라고 할 수 있는 ‘현실’을 수용하여야만 한다. 따라서 비평에서 보이는 당위적인 요청을 직접적으로 형상화하기에는 곤란한 점이 많다. 그런 점에서 감옥 체험을 계기로 어떻게 소설 속에서 이전의 사고가 가지고 있는 완결성―물론 이러한 완결성이란 현실인식의 완결성이 아니라 김남천이 ‘학습’한 이론이 지니고 있는 완결성이다―에 균열이 생기는가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 후에 상술하겠지만, 이러한 균열은 단순한 모습을 보이지는 않는다. 오히려 균열의 지점은 여러 군데서 나타나고 이 균열들이 동일한 차원에서 이루어지지도 않는다. 그러나 지적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이 균열이 김남천 자신에게는 명확하게 인식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김남천의 변화는 현실의 상황의 변화 그리고 자신의 체험에 의한 수동적인 변화로 보아야 할 것이지 어떤 ‘전략’에 의한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될 것이다.
이 글에서는 먼저 김남천이 1930년대 전반에 어떠한 사유를 드러내고 있는가를 먼저 확인하고, 그 다음에 감옥 체험과 임화와의 논쟁을 통해 드러내는 균열이 어떠한 지점에서 나타나고 있는가를 보고자 한다.
김남천은 도일(渡日) 직전부터 프로문학에 뜻을 두었다. 김남천이 일본으로 건너가 호세이[法政] 대학에 입학하였던 1929년도 일본의 문단은 이미 볼셰비키화가 한창 진행되고 있던 시기였다. 김남천 회고에 따르면 김남천은 도일 직전에 문예전선을 구독하였고 그리고 이 잡지의 영향 아래 일본으로 건너갔다. 이 점에서 문예전선구독은 김재남의 말대로 ‘선행 지표’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도일한 김남천은 안막, 임화 등과 합숙 생활을 하였고, 이들을 묶어 주었던 울타리는 <무산자사>였다.
공연 참가가 단순히 한 극단에의 가맹을 의미하는 뿐만 아니라, 안위한 학창생활을 뒤흔들어 새로운 사회적인 권내로 나서게 하는 하나의 전환점이 될 것을 직감적으로 깨달았다.……오리라고 생각한 것이 너무 돌연스럽게 찾아 온 것도 같고, 또 막연히 고대하던 것이 너무 쉽사리 찾아온 것도 같은 생각이 들었다.
이 회고에 따른다면 김남천은 도일한 1929년 당시 아직 사회운동과는 관련이 없었다. 김남천이 <무산자사>에 관련을 가진 시기는 자료에 따르자면, 1930년에 들어서이다. 김남천은 1930년 10월 조직된 무산자 연구회에 서기국원으로 속해 있었다. 일본에서의 <무산자사> 활동, 그리고 1930년 여름의 평양 고무공장 파업에의 참가는 이 시기 그의 지향이 문학에 있기보다는 정치에 있었음을 확인해 준다.
그러나 이러한 정치적 지향에 대해서는 조금 더 논의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김남천이 문학에 보다는 정치에 기울어져 있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이미 문학과 정치 사이의 분리를 전제하고 있고, 또 이 정치와 문학의 분리와 대립이란 당시의 판단이 아니라 후대의 판단이기 때문이다. 김남천은 정치와 문학이라는 대립을 드러내고 있는 것은 1930년대 중반에 와서 제출한다. 이 때에서야 비로소 문학 대 정치의 이원론이 전면에 부각되는 것이다. 그런데 문학과 정치의 이원론이란 거의 언제나 정치에 종속할 것인가 아닌가라는 질문을 낳게 되고, 그러한 질문의 거의 대부분은 부정으로 답하게 된다. 예술이 독자적인 영역을 가지고 있고, 독자적인 법칙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 따라서 이러한 정치에의 종속은 당연히 부정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정치 대 문학이라는 이원론은 단지 대립의 두 축을 보여주는 것일 뿐만 아니라 이미 그 대답까지도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일단 이러한 이원론이 성립되면, 그 이후의 모든 문제는 이 두 항목의 관계 정립에 놓이게 되기 때문에 이러한 이원론의 등장은 곧 1930년대 후반기의 ‘전향’과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는 문제이다.
참고문헌
김남천, 문학과 구술문학 고백체문학 문학운동, 문학적픽션
김동리(1997), 문학하는 것에 대한 사고, 문학과 인간(전집7), 민음사
김윤식(1990), 해방공간 문화운동의 갈래와 그 전망-임화 김남천의 내면풍경분석을 중심으로, 한국학보
민병인(1994), 김남천 문학론 연구-1930년대 창작방법론의 전개를 중심으로
정호웅 외(1993), 장편소설로 보는 새로운 민족문학사, 열음사
1930년대 전반의 김남천을 사로잡고 있었던 것은 ‘전위’라는 말이었다. 자신을 전위로 구성하는 사고, 혹은 전위임을 전제로 하는 사고가 어떤 경로를 거쳐 형성되었는가는 물론 명확하지 않다. 김남천이 공산주의자협의회 사건으로 기소되었을 때의 공판 기록, 그리고 회고 두 편, 그리고 자전적으로 보이는 소설, 어린 두 딸에게와 등불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경로를 확인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1930년 전후한 시기에 김남천이 자신을 ‘전위’로서 규정하고 있었음은 그리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이 전위로서의 자기규정이 1930년대 전반 그의 문학 활동 전체를 규정하고 있다는 것이 이 장의 가설이다.
김남천이 자신을 전위로서, 그리고 실천가로서 규정한 이상 모든 문학 행위는 실천이 된다. 그리고 그것은 ‘실천’인 한에서, 그것도 목적의식적인 실천인 한에서 다른 실천과 우열을 구분할 수 없다. 하지만, 이 시기 내에서도 미묘한 변화를 찾아볼 수 있다. 변화의 계기는 감옥 체험으로 보인다. 이 감옥 체험은 비평에서보다 소설에서 더욱 큰 영향을 주는데, 아마도 소설과 비평이 갖는 차이 때문일 것이다. 비평이 이론적인 작업으로, 모든 논리적 언설이 그러하듯이, ‘추상’과 개념에 바탕 하지 않을 수 없다면, 이러한 추상은 언제나 구체적 실재성으로부터 한 걸음 물러서 있기 때문이다. 구체적 실재성에서 추상화를 통한 현실의 개념적 전유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구체적 실재성과 함께 하고 있는 현실 감각은 약화될 수밖에 없다. 더욱이 1930년대 전반까지의 대부분의 비평이 현실의 인식에 뿌리박은 것이었다기보다는 당위의 요청에 부응하는 것이라고 했을 때 더욱 그러하다.
반면 소설의 경우 소설의 육체라고 할 수 있는 ‘현실’을 수용하여야만 한다. 따라서 비평에서 보이는 당위적인 요청을 직접적으로 형상화하기에는 곤란한 점이 많다. 그런 점에서 감옥 체험을 계기로 어떻게 소설 속에서 이전의 사고가 가지고 있는 완결성―물론 이러한 완결성이란 현실인식의 완결성이 아니라 김남천이 ‘학습’한 이론이 지니고 있는 완결성이다―에 균열이 생기는가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 후에 상술하겠지만, 이러한 균열은 단순한 모습을 보이지는 않는다. 오히려 균열의 지점은 여러 군데서 나타나고 이 균열들이 동일한 차원에서 이루어지지도 않는다. 그러나 지적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이 균열이 김남천 자신에게는 명확하게 인식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김남천의 변화는 현실의 상황의 변화 그리고 자신의 체험에 의한 수동적인 변화로 보아야 할 것이지 어떤 ‘전략’에 의한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될 것이다.
이 글에서는 먼저 김남천이 1930년대 전반에 어떠한 사유를 드러내고 있는가를 먼저 확인하고, 그 다음에 감옥 체험과 임화와의 논쟁을 통해 드러내는 균열이 어떠한 지점에서 나타나고 있는가를 보고자 한다.
김남천은 도일(渡日) 직전부터 프로문학에 뜻을 두었다. 김남천이 일본으로 건너가 호세이[法政] 대학에 입학하였던 1929년도 일본의 문단은 이미 볼셰비키화가 한창 진행되고 있던 시기였다. 김남천 회고에 따르면 김남천은 도일 직전에 문예전선을 구독하였고 그리고 이 잡지의 영향 아래 일본으로 건너갔다. 이 점에서 문예전선구독은 김재남의 말대로 ‘선행 지표’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도일한 김남천은 안막, 임화 등과 합숙 생활을 하였고, 이들을 묶어 주었던 울타리는 <무산자사>였다.
공연 참가가 단순히 한 극단에의 가맹을 의미하는 뿐만 아니라, 안위한 학창생활을 뒤흔들어 새로운 사회적인 권내로 나서게 하는 하나의 전환점이 될 것을 직감적으로 깨달았다.……오리라고 생각한 것이 너무 돌연스럽게 찾아 온 것도 같고, 또 막연히 고대하던 것이 너무 쉽사리 찾아온 것도 같은 생각이 들었다.
이 회고에 따른다면 김남천은 도일한 1929년 당시 아직 사회운동과는 관련이 없었다. 김남천이 <무산자사>에 관련을 가진 시기는 자료에 따르자면, 1930년에 들어서이다. 김남천은 1930년 10월 조직된 무산자 연구회에 서기국원으로 속해 있었다. 일본에서의 <무산자사> 활동, 그리고 1930년 여름의 평양 고무공장 파업에의 참가는 이 시기 그의 지향이 문학에 있기보다는 정치에 있었음을 확인해 준다.
그러나 이러한 정치적 지향에 대해서는 조금 더 논의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김남천이 문학에 보다는 정치에 기울어져 있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이미 문학과 정치 사이의 분리를 전제하고 있고, 또 이 정치와 문학의 분리와 대립이란 당시의 판단이 아니라 후대의 판단이기 때문이다. 김남천은 정치와 문학이라는 대립을 드러내고 있는 것은 1930년대 중반에 와서 제출한다. 이 때에서야 비로소 문학 대 정치의 이원론이 전면에 부각되는 것이다. 그런데 문학과 정치의 이원론이란 거의 언제나 정치에 종속할 것인가 아닌가라는 질문을 낳게 되고, 그러한 질문의 거의 대부분은 부정으로 답하게 된다. 예술이 독자적인 영역을 가지고 있고, 독자적인 법칙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 따라서 이러한 정치에의 종속은 당연히 부정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정치 대 문학이라는 이원론은 단지 대립의 두 축을 보여주는 것일 뿐만 아니라 이미 그 대답까지도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일단 이러한 이원론이 성립되면, 그 이후의 모든 문제는 이 두 항목의 관계 정립에 놓이게 되기 때문에 이러한 이원론의 등장은 곧 1930년대 후반기의 ‘전향’과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는 문제이다.
참고문헌
김남천, 문학과 구술문학 고백체문학 문학운동, 문학적픽션
김동리(1997), 문학하는 것에 대한 사고, 문학과 인간(전집7), 민음사
김윤식(1990), 해방공간 문화운동의 갈래와 그 전망-임화 김남천의 내면풍경분석을 중심으로, 한국학보
민병인(1994), 김남천 문학론 연구-1930년대 창작방법론의 전개를 중심으로
정호웅 외(1993), 장편소설로 보는 새로운 민족문학사, 열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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