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일본 고대
▶일본 중세
▶일본 근세
▶일본 중세
▶일본 근세
본문내용
바로 교토의 천황과 조정이다. 천황과 조정은 이미 14세기 남북조 내란 이루 실질적인 권력을 상실하였고, 특히 근세에는 정치권력과는 완전히 단절되어 표면적으로는 막부가 정한 규정에 따라 오로지 학문과 예술에 전념하는 유명무실한 존재로 전락하였다. 그러나 막번권력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오랜 연원을 지닌 이들이 전통적 권위는 신분의 상하를 막론하고 민관의 의식 저변에 깊이 잠재하였으며 영주들도 이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했다. 쇼군 이하 각급 영주층에 대한 율령제 관위의 수여는 천화의 권한이었고 다이묘들은 더 높은 관위를 얻기 위해 교토의 눈치를 살폈다. 게다가 기회 있을 때마다 대정위임론이 대두되었으며 자연재해에 의한 흉년과 기근, 외침의 조짐 등 국가적인 난국에 봉착해서는 천황의 종교적 권위와 신성성에 의존하여 이를 극복하고자 하였다.
근세를 지배한 사무라이에게서는 크게 두 가지 성격을 엿볼 수 있다. 첫째는 정신적인 면으로, 무사도로 대표되는 주군에 대한 끝없는 충성과 복종, 격식, 규율, 절제, 검약의 미덕 등이 이에 해당한다. 사무라이의 이러한 상하 위계적인 계급의식과 주변적인 덕목들은 근세사회의 모든 신분과 계층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둘째는 현실사회에서의 역할이라는 측면이다. 사무라이는 전투수단인 대소 두 자루의 칼을 허리에 차는 것으로 신분을 상징한다. 메이지 초기 무사의 신분과 특원이 폐지되면서 많은 사무라이들이 군인과 경찰 외에 관직이나 교원의 길을 선택한 것도 사무라이의 위와 같은 변화된 성격에서 연원을 찾을 수 있다.
지배계급의 시각에서 보면 일본 근세는 농촌에 일차적인 기반을 둔 농업사회다. 농촌은 중세의 소손을 행정적으로 분할한수십 호로 구성된 무라를 기본으로 하여 무라 단위로 해당 지역의 영주에게 매년 연공을 상납하였으니, 바로 이러한 연공 수업이 무가 지배의 경제적 토대가 된 것이다. 근세의 무라에서 보이는 촌민간의 공동체적인 유대감과 강한 결집력, 각종 규제 등은 패전 후에 국가를 전쟁으로 치닫게 한 일본적 집단주의의 온상이자 대표적인 봉건유제라고 매도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무라공동체의 전통은 현재까지도 지속되고 있고, 최근에는 가정 붕괴와 청소년 범죄의 다발 등 전통적 가치의 혼란에 대한 하나의 대안책으로 각광 받기도 한다. 도시의 발달은 상업적 농업과 수공업 생산력의 비약적인 중대, 육상과 해상의 교통망 정비, 통일된 도량형 제도와 화폐어음의 상용화, 상업자본의 성숙 등이 전제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일본의 경우 이미 17세기 말엽에는 위와 같은 전국의 도시와 농촌까지를 포괄하는 시장경제권이 형성되었으니, 일본을 방문한 조선통신사 일행도 문화적인 우월감의 반면에 일본의 달달된 시장경제에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18세기에 들어서 막번 영주의 재정이 전반적으로 궁핍화하면서 대다수의 영주는 어용상인들의 경제력에 의존하여 간신히 재정을 꾸려 나갈 수밖에 없었다. 한편으로 18세기 이후 도농을 불문하고 민간에서 부를 축적한 신흥 재력가들이 대거 등장하고 이들이 점차 지역사회의 문화와 여론을 주도하는 계층으로 부상하면서 일본은 영주와 무사 중심의 사회에서 서민 위주의 사회로 완만한 전환을 경험한다. 문화적 측면에서는 삼도를 중심으로 한 각지의 도시에 중하층 상공인을 주 고객으로 하는 전통 예능과 출판문화, 향락산업 등 도시민의 문화가 번창하였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화폐경제의 발전에 따른 빈부 격차가 심화되면서 생계유지조차 힘든 하층민도 양산된다. 바야흐로 근세사회는 내부적인 붕괴의 조짐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다.
19세기 후반의 동아시아지역에서 가장 절신한 공통의 시대적 과제는 국가의 독립유지와 근대화의 달성이었다. 그런데 동아시아 삼국 중에서 유일하게 이 둘을 온전히 성취한 것은 일본뿐이다. 근세 일본은 쇄국체제 하에서도 전인민을 조직화하여 독자적이고 안정적인 정치제도의 발전을 이룩하였으며, 무엇보다도 상당한 수준의 사회경제적인 발전을 달성하였다. 마지막으로 근세사회가 쇄국에서 개국으로 전환하는 과정을 간단히 정리해 보자. 18세기 말 이후 거의 모든 번에서는 악화일로를 걷는 재정구조를 개선하기위해 번정개혁을 단행하는데, 그 중에서도 사쓰마, 조슈, 도사, 히젠 등 서남 일대의 번들은 개혁에 성공하여 약간의 재정적인 안정을 도모할 수 있었다. 한편으로 18, 19세기에 걸쳐 러시아와 미국을 비롯한 서양의 함선들이 일본근해에 자주 출몰하고 때로는 에도 막부에 국교 수립을 요구하니, 막부는 이를 심각히 우려하면서도 효과적인 대응책을 마련하지 못하고 초기이래의 쇄국정책에 연연하였다. 1853년 6월 미국 동인도함대의 페리 제독이 이끈 수척의 거대한 군함이 에도만에 진입하여 함포로써 막부를 위협하고 개국을 강요한 사건은 일본 조야를 엄청난 혼란에 휩싸이게 한다. 이미 단독으로 외세에 대응할 힘을 상실한 막부는 스스로의 대외교섭권을 포기하고 모든 다이묘에게 의견을 물어서 공동으로 이에 대처하고자 하였으나, 결국은 미국의 압력에 굴복하여 1854년에 미일화친조약을, 1858년에는 불평등한 내용을 담은 미일수호통상조약을 맺었고 뒤이어 네덜란드, 러시아, 영국, 프랑스와도 같은 성격의 조약을 체결하였다. 외세 방어와 쇄국 고수의 의무를 지닌 막부가 서구의 위협에 맥없이 굴복한 사실은 막부의 권위를 여지없이 추락시켰으며, 게다가 교토의 허락 없이 조약을 맺은 일은 당시 천황과 조정의 복권을 꿈꾸고 있던 세력들을 일시에 궐기시켰으니 천황가를 중심으로 모든 세력을 규합하여 외침에 대항하고자 하는 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다. 이러한 내우외환의 위기 속에서 정국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극심한 혼미 상황에 빠져든다. 번정개혁에 성공한 서남지역 번들의 중하급 사무라이들을 주축으로 하여 서구세력에 대한 저항이 격화되고, 막부와 이들 번 사이에도 내전이 벌어졌다. 마침에 1867년 11월에는 궁지에 몰린 막부가 정권을 형식적이나마 조정에 반환하였으나 사쓰마와 조슈 등 무력 토막을 주장하는 세력들은 바로 그 다음 달에 천황의 칙령을 얻어 왕정복고와 막부 토벌을 선언하니, 이로써 260여 년간에 걸친 에도 막부의 지배는 비로소 정치적인 종말을 맞게 된다.
근세를 지배한 사무라이에게서는 크게 두 가지 성격을 엿볼 수 있다. 첫째는 정신적인 면으로, 무사도로 대표되는 주군에 대한 끝없는 충성과 복종, 격식, 규율, 절제, 검약의 미덕 등이 이에 해당한다. 사무라이의 이러한 상하 위계적인 계급의식과 주변적인 덕목들은 근세사회의 모든 신분과 계층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둘째는 현실사회에서의 역할이라는 측면이다. 사무라이는 전투수단인 대소 두 자루의 칼을 허리에 차는 것으로 신분을 상징한다. 메이지 초기 무사의 신분과 특원이 폐지되면서 많은 사무라이들이 군인과 경찰 외에 관직이나 교원의 길을 선택한 것도 사무라이의 위와 같은 변화된 성격에서 연원을 찾을 수 있다.
지배계급의 시각에서 보면 일본 근세는 농촌에 일차적인 기반을 둔 농업사회다. 농촌은 중세의 소손을 행정적으로 분할한수십 호로 구성된 무라를 기본으로 하여 무라 단위로 해당 지역의 영주에게 매년 연공을 상납하였으니, 바로 이러한 연공 수업이 무가 지배의 경제적 토대가 된 것이다. 근세의 무라에서 보이는 촌민간의 공동체적인 유대감과 강한 결집력, 각종 규제 등은 패전 후에 국가를 전쟁으로 치닫게 한 일본적 집단주의의 온상이자 대표적인 봉건유제라고 매도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무라공동체의 전통은 현재까지도 지속되고 있고, 최근에는 가정 붕괴와 청소년 범죄의 다발 등 전통적 가치의 혼란에 대한 하나의 대안책으로 각광 받기도 한다. 도시의 발달은 상업적 농업과 수공업 생산력의 비약적인 중대, 육상과 해상의 교통망 정비, 통일된 도량형 제도와 화폐어음의 상용화, 상업자본의 성숙 등이 전제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일본의 경우 이미 17세기 말엽에는 위와 같은 전국의 도시와 농촌까지를 포괄하는 시장경제권이 형성되었으니, 일본을 방문한 조선통신사 일행도 문화적인 우월감의 반면에 일본의 달달된 시장경제에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18세기에 들어서 막번 영주의 재정이 전반적으로 궁핍화하면서 대다수의 영주는 어용상인들의 경제력에 의존하여 간신히 재정을 꾸려 나갈 수밖에 없었다. 한편으로 18세기 이후 도농을 불문하고 민간에서 부를 축적한 신흥 재력가들이 대거 등장하고 이들이 점차 지역사회의 문화와 여론을 주도하는 계층으로 부상하면서 일본은 영주와 무사 중심의 사회에서 서민 위주의 사회로 완만한 전환을 경험한다. 문화적 측면에서는 삼도를 중심으로 한 각지의 도시에 중하층 상공인을 주 고객으로 하는 전통 예능과 출판문화, 향락산업 등 도시민의 문화가 번창하였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화폐경제의 발전에 따른 빈부 격차가 심화되면서 생계유지조차 힘든 하층민도 양산된다. 바야흐로 근세사회는 내부적인 붕괴의 조짐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다.
19세기 후반의 동아시아지역에서 가장 절신한 공통의 시대적 과제는 국가의 독립유지와 근대화의 달성이었다. 그런데 동아시아 삼국 중에서 유일하게 이 둘을 온전히 성취한 것은 일본뿐이다. 근세 일본은 쇄국체제 하에서도 전인민을 조직화하여 독자적이고 안정적인 정치제도의 발전을 이룩하였으며, 무엇보다도 상당한 수준의 사회경제적인 발전을 달성하였다. 마지막으로 근세사회가 쇄국에서 개국으로 전환하는 과정을 간단히 정리해 보자. 18세기 말 이후 거의 모든 번에서는 악화일로를 걷는 재정구조를 개선하기위해 번정개혁을 단행하는데, 그 중에서도 사쓰마, 조슈, 도사, 히젠 등 서남 일대의 번들은 개혁에 성공하여 약간의 재정적인 안정을 도모할 수 있었다. 한편으로 18, 19세기에 걸쳐 러시아와 미국을 비롯한 서양의 함선들이 일본근해에 자주 출몰하고 때로는 에도 막부에 국교 수립을 요구하니, 막부는 이를 심각히 우려하면서도 효과적인 대응책을 마련하지 못하고 초기이래의 쇄국정책에 연연하였다. 1853년 6월 미국 동인도함대의 페리 제독이 이끈 수척의 거대한 군함이 에도만에 진입하여 함포로써 막부를 위협하고 개국을 강요한 사건은 일본 조야를 엄청난 혼란에 휩싸이게 한다. 이미 단독으로 외세에 대응할 힘을 상실한 막부는 스스로의 대외교섭권을 포기하고 모든 다이묘에게 의견을 물어서 공동으로 이에 대처하고자 하였으나, 결국은 미국의 압력에 굴복하여 1854년에 미일화친조약을, 1858년에는 불평등한 내용을 담은 미일수호통상조약을 맺었고 뒤이어 네덜란드, 러시아, 영국, 프랑스와도 같은 성격의 조약을 체결하였다. 외세 방어와 쇄국 고수의 의무를 지닌 막부가 서구의 위협에 맥없이 굴복한 사실은 막부의 권위를 여지없이 추락시켰으며, 게다가 교토의 허락 없이 조약을 맺은 일은 당시 천황과 조정의 복권을 꿈꾸고 있던 세력들을 일시에 궐기시켰으니 천황가를 중심으로 모든 세력을 규합하여 외침에 대항하고자 하는 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다. 이러한 내우외환의 위기 속에서 정국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극심한 혼미 상황에 빠져든다. 번정개혁에 성공한 서남지역 번들의 중하급 사무라이들을 주축으로 하여 서구세력에 대한 저항이 격화되고, 막부와 이들 번 사이에도 내전이 벌어졌다. 마침에 1867년 11월에는 궁지에 몰린 막부가 정권을 형식적이나마 조정에 반환하였으나 사쓰마와 조슈 등 무력 토막을 주장하는 세력들은 바로 그 다음 달에 천황의 칙령을 얻어 왕정복고와 막부 토벌을 선언하니, 이로써 260여 년간에 걸친 에도 막부의 지배는 비로소 정치적인 종말을 맞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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