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하겠지요. 어디서 무슨 소리가 나는지 들어나 봅시다.”
마침 오전 7시 종소리가 들렸다. 윤군은 자기 시계를 꺼내, “제 시계는 어제 선서식 후 6원을 주고 산 것인데, 선생님의 시계는 2원짜리입니다. 저는 이제 1시간밖에 더 소용이 없습니다.” 라며 내 시계와 바꾸자고 하였다. 나는 기념으로 그의 시계를 받고, 내 시계를 그에게 주었다. 윤군은 마지막 길을 떠나기 전 자동차를 타면서, 가지고 있던 돈도 꺼내 내 손에 쥐어 주었다.
“약간의 돈을 가지고 가는 것이 무슨 방해가 되겠소?”
“아닙니다. 자동차 요금을 내고도 5~6원은 남겠습니다.”
그러는 사이 자동차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나는 목 메인 소리로 마지막 작별의 말을 건네었다.
“후일 지하에서 만납시다.”
윤군이 차창으로 나를 향하여 머리를 숙였다. 자동차는 엔진 소리를 높이 울리며 천하영웅 윤봉길을 싣고 홍구공원으로 질주 하였다.
나는 그 길로 조상섭의 상점에 들어가 편지 한 통을 써서 점원 김영린에게 주고, 급히 안창호 형게게 전달하라고 했다.
“오늘 오전 10시경부터 댁에 계시지 마십시오. 큰일이 생길 듯 합니다.”
편지를 보내고, 그 길로 이동녕 선생 처소로 갔다. 그동안의 경과를 보고하고 점심을 먹고 난 뒤 소식 있기를 기다렸다. 마침내 오후 1시쯤 되자 곳곳에서 술렁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홍구공원에서 중국인이 폭탄을 던져 일본인이 많이 죽었다.”
“그려사람의 짓이다.”
그러다가 오후 두세 시경 신문 호외가 터져 나왔다.
홍구공원 일본인의 경축대에 대량의 폭탄이 폭발하여 민단장 가와바다河端는 즉사하고, 시라카와白川대장, 시게미츠重光대사, 우에다植田중장, 노무라野對중장 등 문무 대관이 모두 중상 운운.
일본인 신문에서는 ‘중국인의 소행’이라고 하였으나, 그 다음 날 각 신문은 한결같이 윤봉길의 이름을 큰 활자로 실어 놓았다. 곧이어 불란서 조계지에 대한 대대적인 수색이 벌어졌다.
나는 안공근 엄항섭 두 사람을 가만히 불러, 앞으로 그들의 집안 생활은 내가 책임질 테니, 오로지 우리 사업에만 전념하라고 당부하였다. 그리고는 미국인 피치S. A. Fitch에게 당분간 지낼 피신처를 마련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는 기쁜 마음으로 우리를 받아들였다. 나와 김철, 안군, 엄군 네 명이 그의 집으로 옮겨 갔다. 그곳에서 우리는 2층 전부를 사용하였고, 피치 부인은 극진한 정성으로 식사까지 대접하였다. 벌써부터 우리는 윤의사가 희생한 공을 톡톡히 받기 시작하였다.
피치 댁 전화를 사용하여 불란서 조계지 안에 있는 동포들의 집에 연락해 보았다. 때때로 동포들이 체포되었다는 보고가 있어, 그들을 위해 서양 변호사를 고용하였으나 별 효과가 없었다. 나는 체포된 동지들의 집에 돈을 주어 생계를 돕게 하고, 피신하려는 자가 있으면 여비를 마련해 주게 하였다.
이때 안창호 등과 젊은 학생 몇 명이 체포되었다. 왜놈들이 날마다 미친개처럼 사람을 잡으려고 돌아다니니, 임시정부와 민단 직원들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애국부인회까지도 전혀 활동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동포들 사이에서 나를 비난하는 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하였다.
“홍구 사건의 주모자는 따로 있는데, 자기는 몸을 감추고 관계없는 자들만 잡히게 하는 것이 옳지 못하다.”
나는 동지들에게 사건의 진상을 세상에 공개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안공근은 펄쩍 뛰면서 반대하였다.
“불란서 조계지에 계시면서 그 사실을 발표하는 것은 너무 위험합니다.”
그러나 나는 엄항섭에게 선언문을 쓰게 하고 피치 부인에게 영문으로 번역하게 하여 로이터 통신사로 보냈다. 이 발표를 통하여 비로소 동경 사건과 상해 홍구 사건의 주모자가 김구라는 사실을 세계 각국에서 알게 되었다.
위의 이야기는 윤봉길 의사가 도시락 폭탄을 투척하여 일본군 수뇌부를 사망케 하는 이야기이다. 김구의 주도면밀한 계획과 윤봉길의 거침없는 행동능력이 빛을 발하고 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많은 것이 변하였다.
첫째는 중국 사람들의 태도이다. 일본이 한국과 중국 두 민족을 이간질하기 위해 ‘만보산 사건’ 을 터뜨려서, 그 때문에 조선 곳곳에서 한인 무뢰배들이 중국 상인과 노동자들을 때려죽이는 소동이 벌어졌다. 중류 이상의 중국인들은 그 일이 왜구의 간계임을 알아챘지만, 하류 계급 사이에서는 고려인이 중국인을 죽인다는 악감정이 생겨 동경사건(이봉창 의거) 이후에도 좀체 사그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4 29 윤봉길 의거로 중국인의 한인에 대한 감정은 놀랄 만큼 좋아졌다.
둘째, 이 거사로 인해 미주 하와이 멕시코 쿠바 등지의 한인교포들이 임시정부로 대단한 성원을 보내기 시작했다. 이봉창의 동경 의거는 완전히 성공하지 못하였지만, 이번 홍구 사건은 절대적으로 성공했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임시정부에 대한 납세와 김구에 대한 후원이 눈에 띄게 늘어나서, 사업도 점차 확장되어 나갔다.
그러나 중국 관내 지역인 독립 운동가들의 태도는 김구에 대해 비판적인 편이었다. 윤봉길 의거 이후 김구의 신변이 위험해져서 친지들의 면담 요구에 함부로 응할 수 없게 되자, 교포들이 불만을 품게 된 것이었다.
속세의 일을 돌아보니 却來觀世間
오히려 꿈속의 일만 같도다. 猶加夢中事
지난 일들을 생각하니, 이 구절이 과연 나를 두고 한 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김구가 겪었던 일들이 마치 주마등 같이 스쳐갔음을 시사해 준다. 나라를 위해서 자신을 희생했었던 일들이 꿈속의 일처럼 매우 힘들고 드라마틱했을 것이다. 그에게는 가족의 안위와 일신의 중요함을 찾아보기 힘들다. 하지만 그러한 아름다운 희생이 있었기에 지금의 김구 선생이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마지막 구절은 <나의 소원>의 글이다. 나 역시 김구 선생과 생각을 같이 하는데, 우리나라가 한시라도 빨리 통일이 되어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바란다. 김구가 있었기에, 그리고 우리 조상들이 있었기에 내가 지금 이 글을 쓸 수 있음에 감사하며 이 글을 마치겠다.
마침 오전 7시 종소리가 들렸다. 윤군은 자기 시계를 꺼내, “제 시계는 어제 선서식 후 6원을 주고 산 것인데, 선생님의 시계는 2원짜리입니다. 저는 이제 1시간밖에 더 소용이 없습니다.” 라며 내 시계와 바꾸자고 하였다. 나는 기념으로 그의 시계를 받고, 내 시계를 그에게 주었다. 윤군은 마지막 길을 떠나기 전 자동차를 타면서, 가지고 있던 돈도 꺼내 내 손에 쥐어 주었다.
“약간의 돈을 가지고 가는 것이 무슨 방해가 되겠소?”
“아닙니다. 자동차 요금을 내고도 5~6원은 남겠습니다.”
그러는 사이 자동차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나는 목 메인 소리로 마지막 작별의 말을 건네었다.
“후일 지하에서 만납시다.”
윤군이 차창으로 나를 향하여 머리를 숙였다. 자동차는 엔진 소리를 높이 울리며 천하영웅 윤봉길을 싣고 홍구공원으로 질주 하였다.
나는 그 길로 조상섭의 상점에 들어가 편지 한 통을 써서 점원 김영린에게 주고, 급히 안창호 형게게 전달하라고 했다.
“오늘 오전 10시경부터 댁에 계시지 마십시오. 큰일이 생길 듯 합니다.”
편지를 보내고, 그 길로 이동녕 선생 처소로 갔다. 그동안의 경과를 보고하고 점심을 먹고 난 뒤 소식 있기를 기다렸다. 마침내 오후 1시쯤 되자 곳곳에서 술렁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홍구공원에서 중국인이 폭탄을 던져 일본인이 많이 죽었다.”
“그려사람의 짓이다.”
그러다가 오후 두세 시경 신문 호외가 터져 나왔다.
홍구공원 일본인의 경축대에 대량의 폭탄이 폭발하여 민단장 가와바다河端는 즉사하고, 시라카와白川대장, 시게미츠重光대사, 우에다植田중장, 노무라野對중장 등 문무 대관이 모두 중상 운운.
일본인 신문에서는 ‘중국인의 소행’이라고 하였으나, 그 다음 날 각 신문은 한결같이 윤봉길의 이름을 큰 활자로 실어 놓았다. 곧이어 불란서 조계지에 대한 대대적인 수색이 벌어졌다.
나는 안공근 엄항섭 두 사람을 가만히 불러, 앞으로 그들의 집안 생활은 내가 책임질 테니, 오로지 우리 사업에만 전념하라고 당부하였다. 그리고는 미국인 피치S. A. Fitch에게 당분간 지낼 피신처를 마련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는 기쁜 마음으로 우리를 받아들였다. 나와 김철, 안군, 엄군 네 명이 그의 집으로 옮겨 갔다. 그곳에서 우리는 2층 전부를 사용하였고, 피치 부인은 극진한 정성으로 식사까지 대접하였다. 벌써부터 우리는 윤의사가 희생한 공을 톡톡히 받기 시작하였다.
피치 댁 전화를 사용하여 불란서 조계지 안에 있는 동포들의 집에 연락해 보았다. 때때로 동포들이 체포되었다는 보고가 있어, 그들을 위해 서양 변호사를 고용하였으나 별 효과가 없었다. 나는 체포된 동지들의 집에 돈을 주어 생계를 돕게 하고, 피신하려는 자가 있으면 여비를 마련해 주게 하였다.
이때 안창호 등과 젊은 학생 몇 명이 체포되었다. 왜놈들이 날마다 미친개처럼 사람을 잡으려고 돌아다니니, 임시정부와 민단 직원들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애국부인회까지도 전혀 활동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동포들 사이에서 나를 비난하는 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하였다.
“홍구 사건의 주모자는 따로 있는데, 자기는 몸을 감추고 관계없는 자들만 잡히게 하는 것이 옳지 못하다.”
나는 동지들에게 사건의 진상을 세상에 공개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안공근은 펄쩍 뛰면서 반대하였다.
“불란서 조계지에 계시면서 그 사실을 발표하는 것은 너무 위험합니다.”
그러나 나는 엄항섭에게 선언문을 쓰게 하고 피치 부인에게 영문으로 번역하게 하여 로이터 통신사로 보냈다. 이 발표를 통하여 비로소 동경 사건과 상해 홍구 사건의 주모자가 김구라는 사실을 세계 각국에서 알게 되었다.
위의 이야기는 윤봉길 의사가 도시락 폭탄을 투척하여 일본군 수뇌부를 사망케 하는 이야기이다. 김구의 주도면밀한 계획과 윤봉길의 거침없는 행동능력이 빛을 발하고 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많은 것이 변하였다.
첫째는 중국 사람들의 태도이다. 일본이 한국과 중국 두 민족을 이간질하기 위해 ‘만보산 사건’ 을 터뜨려서, 그 때문에 조선 곳곳에서 한인 무뢰배들이 중국 상인과 노동자들을 때려죽이는 소동이 벌어졌다. 중류 이상의 중국인들은 그 일이 왜구의 간계임을 알아챘지만, 하류 계급 사이에서는 고려인이 중국인을 죽인다는 악감정이 생겨 동경사건(이봉창 의거) 이후에도 좀체 사그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4 29 윤봉길 의거로 중국인의 한인에 대한 감정은 놀랄 만큼 좋아졌다.
둘째, 이 거사로 인해 미주 하와이 멕시코 쿠바 등지의 한인교포들이 임시정부로 대단한 성원을 보내기 시작했다. 이봉창의 동경 의거는 완전히 성공하지 못하였지만, 이번 홍구 사건은 절대적으로 성공했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임시정부에 대한 납세와 김구에 대한 후원이 눈에 띄게 늘어나서, 사업도 점차 확장되어 나갔다.
그러나 중국 관내 지역인 독립 운동가들의 태도는 김구에 대해 비판적인 편이었다. 윤봉길 의거 이후 김구의 신변이 위험해져서 친지들의 면담 요구에 함부로 응할 수 없게 되자, 교포들이 불만을 품게 된 것이었다.
속세의 일을 돌아보니 却來觀世間
오히려 꿈속의 일만 같도다. 猶加夢中事
지난 일들을 생각하니, 이 구절이 과연 나를 두고 한 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김구가 겪었던 일들이 마치 주마등 같이 스쳐갔음을 시사해 준다. 나라를 위해서 자신을 희생했었던 일들이 꿈속의 일처럼 매우 힘들고 드라마틱했을 것이다. 그에게는 가족의 안위와 일신의 중요함을 찾아보기 힘들다. 하지만 그러한 아름다운 희생이 있었기에 지금의 김구 선생이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마지막 구절은 <나의 소원>의 글이다. 나 역시 김구 선생과 생각을 같이 하는데, 우리나라가 한시라도 빨리 통일이 되어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바란다. 김구가 있었기에, 그리고 우리 조상들이 있었기에 내가 지금 이 글을 쓸 수 있음에 감사하며 이 글을 마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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